[올어바웃 아프리카] 아프리카연합 본부 앞에는 중국 깃발이 펄럭인다
  • 이형은 팟캐스트 ‘올어바웃아프리카’ 진행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2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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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아프리카 국가들, 특히 냉전시대부터 오랫동안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 온 아프리카 국가들 곳곳에는 중국의 존재를 보여주는 표시들이 가득하다. 학교나 병원 등 건물 간판에 큼직하게 쓰인 한자가 대표적이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공장과 회사도 많고 중국 제품들로 채워진 대형 슈퍼마켓이 등장했다. 중국 식당들이 들어섰고 건설 현장에 가면 아프리카 현지 노동자와 섞여 있는 중국인도 볼 수 있다. 외국인을 만나면 ‘헬로우’나 ‘봉주르’ 대신 ‘니 하오’라고 인사를 건네는 아프리카인도 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아프리카연합(AU) 본부 청사 앞에 펄럭이는 중국의 오성홍기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밀접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높이 99.9m, 연면적 5만2000㎡의 아프리카연합 본부 청사는 중국이 2억 달러를 들여 완공해 2012년 아프리카연합에 기증했다. 건물뿐만 아니라 사무실 집기 등 모든 비용을 중국이 부담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프리카연합 본부 청사를 중국이 준 ‘선물’로 받아들인다. 서방국가와 달리 정치적 조건이나 간섭없이 이루어진 중국의 원조 방식을 환영해서다. 대부분의 서방국은 중국의 대(對)아프리카 정책을 ‘신제국주의’라고 우려하며 견제하고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은 서구의 생각과 다르게 중국과의 관계를 ‘윈-윈’으로 여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펼치는 중국의 행보를 보면 ‘차이나프리카(Chinafrica)’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차이나프리카’는 하나의 국가인 중국과 정치․경제․사회․문화․기후․자원 등이 각기 다른 54개 국가로 구성된 거대한 대륙과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다. 

 

중국은 어떻게 아프리카 대륙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을까. 단기간의 ‘원조 정책과 경제협력’은 비결이 아니다. 오히려 냉전 때 제3세계와 ‘탈식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연대를 강화하고 이 토대 위에서 수십 년간 협력한 오랜 결과다. 탈식민화 이후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 외에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네들은 독립 후에도 여전히 과거 식민 종주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런 불평등한 관계로 이루어지는 ‘북-남 협력’보다, 개발도상국이나 신흥경제국가와의 ‘남-남 협력’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에서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을 환대하고 있는 시진핑 중국 주석. ⓒ Xinhua(연합)


 

유럽보다 먼저 시작된 중국과 아프리카의 만남

 

중국과 아프리카 대륙의 첫 만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과거의 일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첫 접촉은 기원전 10세기 이집트와 첫 무역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육로를 통해 수세기 동안 지속된 이들의 교류는 주로 북아프리카에 한정됐다. 육로를 벗어나 인도양을 통해 이루어진 중국과 아프리카와의 교류의 시작은 8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중국인의 흔적이 많지는 않아도 간혹 발견되는 유물 덕분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남아프리카 림포포에서 발견된 8세기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 케이프타운에서 발견된 한자,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근처 쿤두치 무덤에서 나온 9~10세기 물건으로 추정되는 사기 그릇과 중국 화폐 등이 나오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고고학의 증거들은 아프리카와 중국과의 교류가 유럽이 아프리카에 발을 내딛기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010년 케냐 말린디의 맘브루니 마을, 라무의 만다섬에서 발견된 청자파편 및 명왕조의 영락통보는 유럽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영락통보는 1403년에서 1424년 사이 중국에서 제조된 것이다. 명나라 때 정화의 원정대에 의해 인도양을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온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년도가 1389년인 대명혼일도는 포르투갈에 의해 유럽-아프리카 무역로가 처음으로 개척되었다는 기존의 가설을 뒤엎었다. 중국이 바스코 다 가마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보다 최소 1세기 정도 먼저 인도양을 통해 아프리카로 ‘항해’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냉전시대가 낳은 ‘이념적 경제관계’ 

 

15세기에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 진출했고 노예무역이 시작되면서 중국과 아프리카간 교류는 이후 약 500년간 주춤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탈식민화가 진행 중인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등 많은 신생 독립국가들이 제3세계 그룹을 결성했고 비로소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는 다시 시작됐다. 

 

제3세계는 1955년에 개최된 반둥회의를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을 선언했다. 이 회의는 아프리카 민족 독립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했다. 

 

탈식민화가 진행되는 동안 중국은 알제리, 앙골라, 남 로데시아(현재의 짐바브웨) 등 아프리카 식민지의 반(反)식민주의운동과 무장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아프리카에 대한 지원에 있어서 중국은 희생적이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3무(無)지원(무이자․무담보․무조건)으로 아프리카를 지원했다. 

 

아프리카와 중국의 밀접한 관계는 1971년 10월25일 유엔 총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49년부터 유엔 상임이사국이었던 대만은 ‘2758호 결의안’에 의거 유엔에서 쫓겨나고 중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중국의 합법적 권리 회복을 골자로 한 이 결의안은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로 통과되었는데, 찬성 76표 중 26표가 아프리카 대륙의 표였다. 

 

 

경제적 동기에 따른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

 

중국과 아프리카 대륙 관계를 들여다보면 경제와 무역이 우선이다. 과거 아프리카 진출과 다른 점이다. 이전에는 이념과 정치가 앞섰다. 반면 이제는 경제적 실용주의에 입각해서 중국의 아프리카 자본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에너지자원 확보와 시장 개척이라는 전 세계적 과제 탓에 중국은 아프리카에 더욱 진출 중이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중국의 대외활동이 줄면서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 노력도 주춤했다. 하지만 1996년 5월 장쩌민 주석이 케냐, 이집트, 에티오피아, 말리 나미비아, 짐바브웨 6개의 아프리카 국가를 돌면서 다시 본격화됐다. 당시 장 주석의 아프리카 순방은 중국 국가원수의 첫 아프리카 대륙 방문이라는 의미 외에도 이념적, 정치적이었던 아프리카와의 관계를 경제적 진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장 주석은 아프리카 각국 정부에 경제 협력을 제안하며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FOCAC)’ 설립을 제안했다. ‘윈-윈 협력’ 관계 아래 철도, 도로, 공항 등 대형 인프라 건설을 무상 제공하고 지하자원 채굴권으로 보상 받는 현대식 물물교환체계를 구축해 갔다. 

 

장 주석이 제안한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FOCAC)’은 2000년 베이징에서 1회를 시작했다. 매 3년마다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교차로 개최되고 있다. 2006년 북경에서 개최된 제3회 포럼에는 48개 아프리카 국가가 참여했고 41개국의 아프리카 각국 국가원수가 직접 베이징으로 왔다. 2015년 1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된 ‘제6회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Forum on China-Africa Cooperation : FOCAC)에는 중국 정상을 비롯해, 아프리카 연합 및 아프리카연합회 의장, 부르키나파소, 상투메 프린시페, 스와질란드 3개국을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 각국 정상들이 참석했다. 중국-아프리카 동반발전’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이 포럼에서 중국은 차후 3년간 아프리카 지원 규모를 600억 달러로 확대하기로 했다. 협력 중점 분야도 단순히 자원 개발이 아니라 산업화, 인프라 구축에 두고 있다. 최근 경제성장 둔화와 원자재 값 감소로 등 악가도 불구하고 중국이 투자 규모 확대하는 것은 아프리카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겠다는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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