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에도 신성이 가득”
  • 이문재 편집위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2.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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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편지> 펴낸 생태공동체 운동가 황대권씨
안하무인.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나, 한국에서도 기승을 부리는 인종주의나 소수자 차별은 물론, 생명에 대한 인간의 태도 또한 안하무인이다. 지난 11월22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 교육회관 4층 소회의실.





<야생초 편지> 저자 황대권씨(47)가 에너지대안센터 회원들과 마주 앉았다. 황씨는 안하무인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야생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공동체와 생태주의가 결합하는 대안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황씨의 사전에는 잡초라는 단어가 없다. 잡초라는 말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 재배하는 식물이 아니면 모두 잡초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리하여 잡초는 제초제를 뿌려 죽여야 마땅한 귀찮은 존재다. 하지만 황씨에게 야생초는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다. 그가 보기에 야생초는 ‘그 가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풀’이다. 지구상에는 35만 종에 달하는 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인간이 재배하는 야채는 고작 3천 종. 황씨는 인간의 문명사란 야생초 냄새를 지워온 역사라고 말한다.


최근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야생초 편지>(도솔)는, 황씨가 감옥에서 서울 집에 있는 여동생 미선씨에게 보낸 글과 그림을 묶은 것이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사회과학대학원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전공하던 그는 1986년 이른바 학원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3년 2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미국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귀국하는 길에 평양에 들른 사실이 발각되는 바람에, 그가 엮여 들어간 것이다.


야생초는 약초이자 유기농 채소


지난해 MBC 텔레비전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학원간첩단 사건이 국가기관에 의한 조작극이었다고 밝혀냈지만, 당시 서른 살이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 두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내 인생은 내 의지로 바꿔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던 사회과학도에게 무기 징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갇혀 있는 그가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법정에 서는 것이었다. 캄캄한 분노의 터널을 통과하던 1991년 봄, 그는 ‘거사’를 계획했다. 1주일 간 ‘삐라’를 만들고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외부 인사들까지 참석하는 종교 집회가 열리는 날, 그는 집회장의 단상을 점거하고 ‘국가 보안법 폐지하고 전향제를 폐지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 서는 대신 징벌방에 갇혔다. 두 달 동안 두 손이 묶인 채 ‘개밥’을 먹으며 그는 끊임없이 신을 찾았다. ‘왜 나를 이렇게 내치십니까?’ 그러나 신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징벌방에서 나오며 그는 두 가지를 버렸다. 유일신을 포기했고, 출옥해야 한다는 욕망도 지워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황씨 역시 ‘안하무인’이었다. 감옥 안에서 야생초와 만나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냉이 제비꽃 괭이밥 씀바귀 마디풀 방가지똥 지칭개 개쑥갓 황새냉이 벼룩나물 명아주 쑥 사철쑥 꽃마리 나팔꽃 사과나무 뽕나무…. 1992년 봄, 그는 안동교도소 안에서 야생초를 키우며 거듭 태어났다. 그에게 야생초는 완상용이 아니었다. 야생초는 그의 지병이던 기관지염을 고쳐준 약초이자, 김치나 잼을 만들 수 있는 유기농 채소였다.


야생초를 키우는 한편 도가적 사유 체계를 발전시켰다. 풀 한 포기에도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으며, 몸이 곧 우주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야생초를 좋아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마음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만(慢)을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때가 묻은 관상용 화초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이나 교만이 야생초에는 없다는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야생초를 키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운동장은 물론 담장 아래에도 풀 한 포기 나 있는 것을 참지 못하던 ‘결벽증 소장’이나 청소부들을 설득해야 했고, 씨앗 구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오랜만에 사회 참관을 하러 외출할 때에도 그는 땅만 보고 다녔다. 안동농고 온실에 견학 갔을 때에는 일행의 뒤꽁무니에서 꺾꽂이가 가능하다 싶은 식물들을 ‘슬쩍’하기도 했다.


야생초를 키우고 먹으면서 관심사가 한층 넓고 깊어졌다. 동양 철학과 의학은 물론이고 매일 아침 자기 오줌을 먹으며 질병을 치유하는 요료법, 도인술과 명상도 병행했다. 겉은 고요하지만 속에서는 우레가 친다는 ‘묵내뢰(默內雷)’라는 글씨를 놓고 묵상을 하기도 했다.





생태공동체는 제국주의의 유일한 적수


1998년 여름, 그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서른 살에 들어가 마흔셋에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출옥 이후 5개월 간, 서울 부모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던 그는 전남 영광으로 내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야생초의 세계로 들어간 것인데, 막상 풀이 지천인 곳에서 풀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풍성하면 열정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흙냄새를 맡으며 ‘징역독’을 빼는 한편, 임야 2만 평을 개간해 오가피 두충 황기 같은 약용 식물을 심었다.


그때 노르웨이 국영 방송(NIR)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찾아왔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석방운동을 펼쳤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은 초청장을 보내왔다. 앰네스티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1999년부터 2년 간 영국 임페리얼 대학과 슈마허 대학에서 생태농업과 생태 디자인을 배웠다. 슈마허 대학은 그가 감옥에 있을 때부터 꿈꾸던 곳으로, 생태학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이다. 황씨는 “슈마허 대학에서 생태학으로 우리 삶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는 세계관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현재 그는 생태공동체 연구 모임 대표를 맡고 있다. 푸른누리공동체 최한실, 불교환경교육원 유정길, 한 살림 윤형근, 한국도시연구소 이근행 씨 등이 참여하고 있다. 어떤 단체나 조직에 가입하지 않아서 대표를 맡게 되었다는 황씨는, 국내 생태공동체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편람을 펴내기 위해 전국에 산재한 공동체를 탐방하며 글을 쓰고 있다.


‘옥중 동지’였던 야생초와 더불어 살며 그가 온몸으로 체득한 삶의 지침은 바로 이것이다. ‘끈기를 가지고 행하되, 조화와 균형 속에서!’그의 명함에는 ‘공동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가 생태공동체를 바라마지 않는 까닭은, 생태공동체만이 막강한 제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사회 구조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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