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개만 잘 베도 꿈나라가 안락하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5.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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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능 신비로운 ‘요지경 천국’…소리·냄새 곁들인 맞춤형 인기
사람에게는 누구나 ‘오래된 친구’가 있다. 갓난아기 때부터 스킨십을 하면서 인생의 3분의 1을 동행해 온 친구.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이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맞다. 그 친구는 매일 밤 우리에게 부드러운 등을 내미는 베개이다.
오랫동안 이불의 부속품 취급을 받아온 베개가 달라지고 있다. 과학의 힘을 빌려 당당히 건강 보조 기구로 ‘독립’한 베개가 있는가 하면, 패션 상품으로 진화한 베개도 있다. 또 고전 속의 베개가 복원되어 이불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팔리기도 한다. 각양각색으로 변모하고 있는 요지경 같은 ‘베개 세상’을 들여다본다.
발가락 베개에서 비타민 베개까지:서울 휘경동에 있는 (주)이브자리 침구 매장은 마치 베개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마르코빈즈’라는 수입 베개는 속이 다섯 조각으로 나뉘어 있다. 목을 받치는 부위를 높게 하고, 머리가 닿는 부분은 낮게 해서 숙면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긴 골무를 매단 것 같은 ‘발가락 베개’도 눈에 띈다. 베갯속은 마(麻) 씨로 되어 있는데, 하루 종일 좁은 신발 안에서 시달린 발가락 틈에 끼우면 피로가 풀린다고 한다. 쌀자루처럼 보이는 ‘즐거운 베개’는 자유자재로 모양을 변형해서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주)이브자리 수면환경연구소 조은자 연구원은 “누워서 책이나 텔레비전을 볼 때 특히 유용하다”라고 말했다.

전신 지지 베개는 마치 죽부인을 연상시킨다. 길고 부드러워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이나 임신부가 껴안고 잠을 청하면 금세 목적을 이룰 듯싶다. C자형으로 생긴 ‘볼 지지 베개’는 엎드려 잠깐 눈을 붙일 때 쓸모 있는 침구이다. 스피커를 내장한 ‘소리 베개’도 있다. 녹음기나 MP3와 연결하면 음악이나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편안히 꿈나라로 갈 수 있다. 지갑 겸용 휴대용 베개는 지갑으로 사용하다가, 안에 장착된 비닐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베개로 변신한다.

(주)이브자리 침구 매장에는 없지만 국화 베개도 있다. 국화 베개 전문 판매업체 다인촌의 김현중 대표에 따르면, 국화 베개의 베갯속은 경북 의성에서 채집한 감국 수천 송이로 만든다. 국화가 지닌 향과 성분은 불면증이나 만성 피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나무 알 목침도 있다. 머리가 닿는 부분에 향나무 알을 붙여 코골이·불면증·고혈압 등을 예방한다고 한다.
가격도 효과도 세계 최고?:서울 을지로에 있는 육산기업은 ‘에어봉투’를 만드는 곳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회사 사무실 한쪽에 통나무를 절반으로 뚝 잘라놓은 듯한 나무통을 쌓아놓고 있다. 강창용 대표는 그 나무통을 ‘신비의 원방신침(元方神枕)’이라고 소개했다. 원방신침은 허 준의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베개인데, 잣나무로 틀을 짜고 그 안에 여러 방향성 한약재를 넣어 만든다. 머리가 닿는 둥근 부근에는 좁쌀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이 1백20개 뚫려 있어, 그 구멍을 통해 한약재의 은은한 향이 풍겨 나온다.

강대표가 원방신침을 복원한 것은 1992년. 당시 그는 언어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린 한의원에서 <동의보감>에 나오는 원방신침을 만들어 베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반신반의하며 그는 원방신침을 복원했고, 실제 그 베개를 이용해 자신의 병을 고쳤다. “<동의보감>에 보면 ‘원방신침을 100일 베면 얼굴에 광택이 돌고, 1년을 베면 모든 질병이 물러가고, 4년을 베면 흰 머리카락이 검어지고 눈과 귀가 밝아진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원방신침을 풀어헤치자 향긋한 약초 내음이 퍼지면서, 잘게 쪼갠 인삼·복령·계피·길경(도라지)·신이(목련 꽃봉오리)·천초 등이 드러났다. 원방신침에는 독한 약초 여덟 가지, 독이나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약초 여덟 가지 등 모두 서른두 가지 약초가 쟁여져 있었다. 가격은 30만원. 한국에서 가장 비싼 베개 같은데, 강대표는 지난 12년 동안 5만 개 이상을 팔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만큼 팔릴 만한 이유가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몸에 좋은 점이 한둘이 아니다. 원방신침은 누가 뭐래도 세계 최고의 베개다.”
베개에서 싹이 난다?:고집이 세기로는 한국씨앗요법연구소 강기찬 소장(서울시 홍은동)도 만만치 않다. 그는 베갯속을 자연물(메밀·씨앗·국화 등)과 인공물(메모리폼, 합성 솜, 스펀지 등)로 나누고, 자연물을 또 생명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눈다. 지난 15년 동안 그는 그 가운데 생명력이 있는 배갯속에 매달렸다.

그가 수작업으로 만드는 베개에는 결명자·나팔꽃·오이·우엉·미나리·해송·율무·벚나무 씨앗 등 스무 가지 가량이 들어간다. 씨앗들은 물을 뿌리면 싹이 나는 것들로, 옛 문헌을 참고로 선택한다. 예컨대 시력 보호에는 결명자, 두통에는 국화, 고혈압에는 메밀, 소아 해열에는 좁쌀 같은 식이다. 그에 따르면, 나무와 식물의 씨앗에는 카로틴·피톤치드·음이온 같은 생명의 기운이 들어 있다. “씨앗의 약성(藥性)이 뇌를 통해 몸속에 들어가 병을 고친다. 특히 효과가 있는 질환은 두통·치매·고혈압이다”라고 그는 주장했다.

씨앗베개의 또 다른 효과는 청뇌명목(淸腦明目)이다. 밤새 베어도 사라지지 않는 서늘함이 뇌를 맑게 하고, 눈을 밝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다 보니 가격은 25만8천원으로 좀 높은 편이다. 그 탓일까, 판매 수량도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씨앗베개를 꽉 껴안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초 개발자로서의 자존심과 씨앗배개의 효과를 굳게 믿기 때문이다.

머리가 큰 사람에게 알맞는 베개는?:대다수 사람은 베개를 잠자리에서 머리를 받쳐주는 도구쯤으로 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베개는 우리가 잠자리에 누웠을 때, 바닥과 목 사이에 생기는 공간을 메우는 데 쓰는 침구이기 때문이다. 베개는 목뼈(경추) 7개를 보호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베개를 ‘내 맘대로’ 이용하고 있다. 그 후유증은 심각해 보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베개가 너무 높거나 낮으면 산소 부족으로, 코골이·전신 피로 등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 또 목의 근육 내에 흐르는 혈액 양이 줄어들어 두통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심장에서 뇌로 올라가는 혈관에 장애가 생겨서 목·어깨 통증, 집중력 저하, 무기력증, 안면 노화, 뇌졸중에 걸릴 위험도 증가한다. 일부 전문가는 베개를 잘못 베면 악몽을 꾸고, 불면증에 시달릴 수 있다고 말한다.

수면환경기업 트윈세이버는 맞춤 베개의 선두 주자로 불린다. 2003년 중반 처음 시작했다. 당시 트윈세이버가 한 일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박세진 박사팀과 공동으로 ‘3차원 영상 측정기를 이용한 맞춤 베개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은 한국인의 두상이 크게 네 가지 유형(A~D형)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A형은 뒤통수에서 목 함몰점까지가 가장 긴 두상(아래 그림 참조)을 말한다. 이 두상에 속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약 31.3%. B형은 반대로 뒤통수에서 목 함몰점 사이의 거리가 가장 짧은 유형으로, 전체 인구의 약 25.6%가 여기에 속한다. C형은 목 부위에 굴곡이 밋밋한 형태(전체 인구의 약 25.6%)이고, D형은 짱구처럼 뒷머리가 튀어나온 모양을 하고 있다(인구의 약 17.8%).

트윈세이버 민관영 실장(수면환경공학연구소)은 “베개를 맞추는 일이 옷 맞춤보다 훨씬 간단하다”라고 말한다. 우선, 매장을 찾은 소비자는 두상(頭像)의 형태를 측정하기 위해 측정용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두압(頭壓) 분포 측정대에 누워 잠자리에서 머리의 압력이 어떻게 분포되는지 파악한다. 이 두 가지 자료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소비자에게 적합한 베개의 유형과 높이를 알려주고, 소비자는 매장에 비치된 제품 가운데서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맞춤 베개의 소재는 주로 메모리폼, 가격은 5만~20만 원으로 다양하다.
똑같은 베개인데 왜 가격이 다를까:최근 가장 인기를 끄는 베개 소재는 메모리폼이다. 베개 업체들은 저마다 메모리폼이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인과 우주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소재’라는 점을 내세우며 홍보한다. 실제 메모리폼 베개는 소재 자체가 고탄성인 데다 구조가 촘촘해서 충격 흡수와 탄력이 좋다. 전문가들도 적당한 메모리폼 베개는 건강에 이롭다고 치켜세운다.

이상한 점은 같은 메모리폼 베개인데도 가격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트윈세이버 민관영 실장은 소재 자체는 비슷한 공법, 비슷한 원료를 사용해서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가격 차이가 나는 이유는 디자인이나 마케팅 때문이다”라고 민실장은 말했다.

민실장은 20년 가까이 베개를 연구해온 전문가답게 돈 안 들이고 ‘건강 베개’를 장만하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했다. △높이가 10cm 이상 되는 베개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베개를 뜯어 속을 반 정도 덜어낸다. 좀더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베개 가운데 부분을 바느질한 뒤, 머리 뒤쪽 부분이 닿는 곳의 베갯속을 더 덜어낸다. △목이 자주 아픈 사람은 수건을 둘둘 말아서 목이 휜 부분만큼 채워주면 한결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다. △메모리폼 베개가 낮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때는 수건을 한두 번 접어서 받치면 훨씬 더 편안해진다. △베개를 어깨선까지 죽 당긴 뒤 목을 받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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