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표 조형물 ‘밀실’에서 뚝딱?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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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 밀어붙이기식 작품 계약 두고 논란 가열

미술 동네가 시끄럽다. 청계천 입구에 들어설 한 대형 조형물 때문이다. 최소 수십억 원이 드는 프로젝트가 공모 절차 한번 거치지 않고 추진되고 있는 데 따른 불만이다. 문화연대는 3월14일 ‘청계천 조형물 조성사업을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로 진행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미술인회의·민족미술인협회 등 미술가 단체가 함께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입’이 발단이었다. 이시장은 1월 초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청계천 시발점에 서울의 랜드 마크가 될 세계적인 조형물을 세우겠다”라고 밝혔다. 이시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가에게 의뢰할 방침이며, 외국인 관광객이 보러 올 정도의 대단한 명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덧붙였다. 그 ‘유명한 대가’ 가 클라스 올덴버그이며, 서울시가 그와 조형물 설치 계약까지 이미 마쳤다는 소식이 최근 보도되면서 파문이 인 것.

1929년 스웨덴 태생인 올덴버그는 앤디 워홀·로이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1960~1970년대 팝 아트를 선도했던 미술가. 일상용품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한 조형물로 유명하다. 일본 도쿄 국제무역전시장 앞에 있는 12.2m 크기의 <톱>과 미국 필라델피아 시청 앞의 13.5m짜리 <빨래집게>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올덴버그의 조형물은 세계적인 명성 못지 않게 작품 값이 비싸기로도 유명하다. 청계천에 들어설 작품의 추정 값은 최대 50억원 안팎. 서울시가 도쿄의 <톱>이나 필라델피아의 <빨래집게> 정도 크기로 작품을 의뢰하고, 소더비 등 국제 경매 시장에서 1m 크기 정도 되는 올덴버그의 작품이 보통 40만~50만 달러에 거래된다는 점을 감안해 추산한 액수다.

 

국제 미술 시장 사정에 밝은 한 전문가는 이와 관련해 “외국에서 완제품을 수입하느냐, 국내에서 제작하느냐에 따라 값이 크게 차이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앞에 있는 보로프스키의 작품 <망치질하는 사람>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같은 작품에 비해 3분의 2 가격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제작했기 때문. 한편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가 최근 '비싸게' 수입해 설치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데미안 허스트의 조형물 <채리티>의 수입가는 22억원이었고, 서울 테헤란로 포스코 빌딩 앞에 세워진 뒤 ‘고철덩어리 같다’는 논란을 일으켰던 프랭크 스텔라의 <이마벨>은 17억원짜리였다. 

미술계 반응은 찬반으로 나뉜다. 대부분의 미술단체와 작가들은 서울시의 밀실 행정을 비판하는 쪽이다. “공공 미술은 시민 개개인의 심미적인 체험이나 도시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공공성에 대한 토론 등 최소한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성완경 인하대 교수·미술평론가)는 것이다.

미술계가 반발하는 이유 중에는 국내의 대형 조형물 시장을 외국 작가들이 독식하는 데 따른 소외감도 한몫 하고 있다. <이마벨>이나 <망치질하는 사람> 등 최근 수년간 화제가 된 조형물은 대부분 외국 작가의 작품이다. 모두 해당 기업의 오너가 개인적으로 결정한 것들이다. 사기업의 컬렉션에 속으로만 끙끙 앓던 미술계가 이번 일을 계기로 공공 미술 설치에 관한 사회적 공론화에 나선 셈이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화가 임옥상씨는 “서울시가 산업자본주의 찬가를 불러온 퇴물 팝아트 작가의 작품을 세우기로 밀실에서 결정했다”라면서 계약 철회를 요구했다. 최근 서울 남부터미널 근처에 비닐로 만든 환경조형물 <숨쉬는 과일나무>를 세운 설치작가 최정화씨는 공공기관마저 국내 작가를 무시한다고 비난하면서 “내게 의뢰하면 100분의 1의 비용으로 복제품을 만들어줄 수 있다”라고 힐난했다.

 

반면 세계적인 작품이 들어서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인사들도 있다. 미술 평론가 박신의씨(경희대 교수)는 “진행상의 문제는 있지만 외국 작가를 선정했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했다. 박교수는 또한 올덴버그의 작품은 산업자본주의를 찬양하기보다 예술의 장엄함이나 권위를 해학적으로 풍자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 미술계 인사는 “이명박 시장이 세계적인 작가라는 기준을 제시한 만큼 후보는 올덴버그나 보로프스키 정도로 압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직 국내 작가들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는 이르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서울시의 태도. 언론에 보도되고 미술계의 성명이 발표된 마당인데도 서울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서울시 본청과 청계천복원본부의 관련 부서에 모두 문의했지만 ‘언론 보도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이시장이 몇몇 인사에게 자문한 뒤 직접 결정했다’ ‘조형물은 삽 모양으로 만들기로 했다’ ‘작가만 올덴버그로 결정되었을 뿐 아직 세부 계약은 진행된 게 없다’ 등 확인되지 않는 소문만 무성하다. 미술계 안팎의 논란에 서울시가 어떻게 대응할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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