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관계-동상이몽3/사뮤엘 헌팅턴의 경우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4.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이 현대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또 미국 국익의 관점에서 어떻게다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선명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대표적인 예를 꼽으라면 저는 <문명 충돌 >의 저자인 사뮤엘 헌팅턴을 주저 없이 추천하겠겠습니다. 이 책에서 헌팅턴은 냉전 질서 해체 이후 미국(서구)의 국익을 위태롭게 할 최대의 잠재 위협으로 무슬림과 중국을 지목합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한 수법으로 무슬림 세계와 중국을 위협으로 지목하는데, 그것이 말 그대로 '문명의 충돌'입니다.
헌팅톤은 우선 모든 문명에는 그 문명을 지탱하는 핵심 국가(core state)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서구 기독교 문명의 경우는 미국, 중화권 문명의 경우는 중국, 무슬림 문명의 경우는 과거 오스만 투르크 같은 나라들이라는 겁니다. 각기 다른 문명권의 핵심 국가들은, 자기네 문명권을 유지하기 위해 거시적 차원에서 다른 문명권의 핵심 국가와 갈등을 벌이게 되는데, 대개 그러한 갈등은 상대적인 영향력/상대적인 군사력/경제력 및 복지 혜택/다른 문명권으로부터 자기네 문명권의 구성원들을 지키거나 구분짓거나 배제시키려는 노력/다른 문명권과 대별되는 가치와 문화의 고수/그리고 문명권의 영역(territory) 등의 다양한 방면에서 갈등을 빚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문명과 문명은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게 되어 있다는 거지요.
헌팅톤 문명 충돌론의 핵심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문명과 문명이 서로 마주치는 지점, 이른바 '단층선(fault line)'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는 문명과 문명이 충돌할 때 전쟁이 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폴트라인이라고 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각기 다른 문명권의 핵심 국가는 단층선을 직접 맞대고 있지 않을 경우, 보통은 서로 무력을 사용하는 등의 직접 대결을 벌이지 않는데 예외가 있다 합니다. 단층선의 갈등이 핵심 국가로 에스컬레이트되거나, 문명간 국제적인 세력 균형에 큰 변동이 생길 때랍니다. 후자에 의해 직접 충돌이 벌어지는 것을 헌팅턴은 '헤게모니 전쟁'(hegemonic wars)이라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헌팅턴이 중국 얘기를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1996년 헌팅턴이 책을 펴낼 시점에(좀 더 정확히는 이보다 4년전 문명 충돌론의 대요를 담은 논문을 발표했던 1992년 시점에) 헌팅턴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띈 점은 중화 문명의 핵심 국가인 중국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니다. 헌팅턴은 이처럼 새로운 강자가 등장할 때 기존의 강자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갈등의 양상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즉 기존의 강자가 '세력 균형' 정책을 선택하면 갈등의 양상은 전쟁으로 나타나기 쉽고, '편승'(bandwagoning) 전략을 선택하면 갈등 양상은 이보다 훨씬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세력 균형은 봉쇄 정책, 경우에 따라서는 한판 전쟁까지 벌이는 사태를 의미합니다. 반면 편승 전략은, 바꿔 말해 '순응 전략', 그 결과 한 지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상실하는 것을 뜻합니다.
헌팅턴은 서구와 중국간 세력 균형의 변동에 어떤 친화성(kinship)이 없어서 반드시는 아니지만 무력 충돌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부상하는 중국을 '동아시아에 있어서 미국 핵심 이익에 대한 도전'이라고 확실하게 못 박아 버립니다. 헌팅턴은 미국이 약 1백년동안 동아시아에서 압도적인 힘을 가진 지배적인 강대국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일관된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사실도 덧붙이지요.
그러면 왜 중국이 위협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가. 헌팅턴은 상당히 많은 이유를 갖다 붙입니다. 먼저 중국 역사나 문화, 중국의 전통, 땅덩어리 크기, 경제적 역동성, 그리고 셀프 이미지 등 모든 면이 중국으로 하여금 동북아에서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지위를 추구하게 만들 거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 '과거의 했던 짓거리로 보나, 스스로를 패권 국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으로 보나 저 놈들은 틀림 없이 패권을 추구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헌팅턴은 또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소련 등 과거 패권국들이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 뒤 예외 없이 패권주의를 추구했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중국처럼 큰 나라
가 경제 성장에 성공하면 틀림 없이 패권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팅턴은 덧붙이기를 중국은 이미 1980년대말부터 자국의 경제 자원을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군사비 지출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은 점점 더 중국에 오리엔트되고 있으며, 남지나해에서 군사적인 영향력까지 확대하는 등 '과거의 전력'은 물론, '현재의 움직임'까지 심상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이 만약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될 경우 어떻게 나올 것인가. 헌팅턴은 여러 가지 예상 답안을 내놓으며 은근히 주변국을 겁줍니다(의도는 의심쩍지만 내용은 우리도 참고할만하다고 봅니다). 첫째, 중국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중국의 영토적 통일성을 지지해달라고 요구할 거랍니다(티벳, 신장, 홍콩, 타이완 등-이 부분은 분명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둘째, 경제나 인권, 무기 확산, 기타 다른 이슈들에 대해 중국편을 들어달라고 요구할 거라는 겁니다(벌써 명분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넷째, 중국 군사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그같은 우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나선다는 겁니다. 이 외에 중국의 이해에 맞게 무역과 투자 정책을 구사할 것이며, 지역 문제에서 중국의 리더쉽을 주장할 것이며, 중국 이민자에 대한 문호 개방을 추구할 것이며, 화교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것이며...헌팅턴이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제네들 그대로 놔두면 골치아파 진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헌팅턴은 남의 얘기를 소개하는 것처럼 하면서 은근슬쩍 '세력 균형' 전략을 제안합니다. '서구의 국제 관계 이론에 따르면, 밸런싱이 대개 바람직한 옵션이고, 실제로도 밴드웨건보다는 밸런싱이 훨씬 더 자주 애용되어 왔다'며 스티븐 월트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밴드웨건은 (상대방에 대한)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뜻에서 위험하다(risky)고 합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공격적일 경우의 대응 방식으로는 밸런싱 전략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세세한 세력 균형 수법까지 일러줍니다. "A라는 국가는 C라는 국가, D라는 국가와 동맹을 맺는 방식으로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는 B라는 국가에 대해 세력 균형을 시도할 수 있다. 이 때의 방법은 자국의 군사력과 다른 힘, 즉 군비 경쟁을 유도하는 식을 개발하는 것 따위며, 이들 수단을 조합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A라는 국가와 B라는 국가는 서로에 대해 1차 균형자이며, A라는 국가는 다시 B라는 국가와 C라는 국가간 관계에서는 2차 균형자라 할 수 있다".
헌팅턴은 이렇게 제3자의 입을 빌어 대응책을 주문, 코치하고 있지만 '세력 균형'이라면 아마 중국도 어지간히 자신 있는 분야일 것입니다. '합종연횡'이니 '이이제이'니 하는 동양판 '세력 균형' 이론은 이미 춘추 전국 시대 때 실험이 끝난 것이고, 그 뒤로도 중국이 걸핏하면 즐겨 써먹었던 전략 아니겠습니까. 어쩄거나 위의 사실만 놓고 볼 때 헌팅턴은 상당히 일찍이, 그리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도'를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헌팅턴이 제시했던 전략은 오늘날 미국이 실행하고 있는 대중국 전략과도 상당 부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아 보이므로, 감상 기회를 다음 회까지 연장하겠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