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 ‘문화혁명’ 일어나나
  • 정문호 ()
  • 승인 2005.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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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전도사’ 서머스 총장 구설 잇따라…‘직선적 소신 발언’ 옹호론도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 대학은 미국인은 물론 전세계가 선망하는 대학이다. 이 대학의 총장은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만큼이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최근 이 대학 총장이 신중하지 못한 언행으로 잇달아 구설에 오르고 있다. 클린턴 정부 시절 재무장관을 지냈던 래리 서머스 총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화제가 된 것은 최근 여성 비하 발언으로 여론의 도마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월 한 여성 관련 세미나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선천적’으로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 뒤진다는 성 차별 발언을 해 미국 여성계와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취임 후 학내 개혁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학점제와 종신직 교수제 개혁, 의대 및 공대 대폭 강화, 법대 이전안 등 굵직굵직한 개혁안을 내걸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버드 대학 재학생은 물론 교수진과 첨예한 대립 구도를 형성해왔다. 이런 그를 두고 일부에서는 독선적이고 건방진 검투사라는 비난을 퍼붓는가 하면, 다른 일부에서는 제2의 도약을 위해 매진하는 뛰어난 행정가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학점제 개선·여성 비하 등으로 물의 빚어

서머스 총장이 처음 구설에 오른 것은 2001년 7월 취임한 직후였다. 취임 일성으로 하버드 개혁을 들고 나온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최우수 점수인 A학점이 남발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매년 졸업생의 90% 이상이 우등으로 졸업하고, 재학생 중 절반이 A학점을 받고 있는 기존의 학점 제도를 뜯어고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재학생들이 아우성을 쳤다. 자신들이 A학점을 받은 것은 그만큼 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이지 교수들의 후한 인심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서머스는 “금메달은 오직 한 사람이 받는 것이다”라며 학점제를 대폭 개선하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학점제 개선 발언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서머스 총장은 곧이어 한 흑인 교수에 대한 폄하 발언으로 또다시 구설에 올랐다. 그 사건은 서머스가 총장에 취임한 지 3개월째 되던 2001년 10월에 터졌다. 서머스의 공격을 받은 교수는 미국에서 흑인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자 하버드를 대표할 만한 명교수 14명에게만 주어지는 ‘University Professor’라는 직함까지 받은 코넬 웨스트 박사. 젊은이 못지 않은 톡톡 튀는 행동과 청중을 사로잡는 달변으로 그는 ‘하버드의 공부벌레들’ 사이에서 인기 최고였다. 그는 자신의 과목을 수강한 재학생들에게 A학점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또 과거 흑인 지도자들을 칭송하는 랩뮤직을 CD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행태가 ‘튄다’고 생각했던 서머스는 그를 집무실로 불러 ‘학문에만 전념하라’고 권고했다. 서머스의 권고는 사계 최고의 권위자임을 자부하던 웨스트에게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그는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프린스턴 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웨스트 교수의 이적 소동은 동료 교수는 물론 많은 재학생들이 서머스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행한 최근의 여성 비하 발언은 불타는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서머스는 엘리트 대학에 수학 교수나 과학 교수가 없는 이유로 세 가지를 꼽았다. 이 중 특히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말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의 발언 내용이 알려진 뒤 하버드 대학 인문과학 여성위원회 소속 교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MIT·프린스턴·스탠퍼드 등 미국의 초일류 대학 총장들까지 발끈했다. 그들은 언론을 통해 서머스 발언을 공동 비판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서머스는 마지못해 사과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랄까. 공교롭게도 서머스가 취임한 뒤 종신직을 보장받은 여성 교수들이 급감했다. 지난해 종신 교수 직을 보장받은 교수는 모두 32명인데, 그 가운데 여성은 고작 4명이었다. 성차별 의혹과 관련된 ‘구체적인 물증’까지 거론되어 이제 사태는 ‘총장의 정중한 사과’ 선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서머스의 돌출 행동에 대해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서 최근 <하버드의 규칙>이라는 저서로 호평을 받고 있는 리처드 브래들리는 “한마디로 하버드 문화를 모르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라면서, 그를 ‘건방지고 잘난 체하며 무례한 인간’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서머스에 대해 동정론 내지는 옹호론을 펴는 이도 적지 않다.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 클로디아 골딘 교수는 “우리 대학 총장이 꼬장꼬장한 학자적 탐구심을 간직하고 있는 점이 자랑스럽다”라며 서머스의 직선적인 소신 발언을 두둔했다.

‘정치 무대에서 익힌 보스 기질’ 통할까


A학점 남발에 따른 학점개선제든 각종 차별 논란이든 꼼꼼히 따져보면 언론이 침소봉대한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한 예로 서머스가 제기한 남녀차이론은 근거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실제 미국의 전국과학재단(NSF)이 2001년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수학 및 과학 분야 박사는 모두 28만5천5백명인데 그 중 여성은 11.5%에 불과했다.

서머스 옹호론자들은 웨스트 교수를 둘러싼 논란도 기존의 학문적 업적에 안주하지 말고 연구에 더욱 매진하라는 뜻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서머스 총장은 대학 개혁 과제 중 하나인 교수 정년제 개혁의 시범 사례로 2002년 학장 추천을 통해 종신 교수직 부여가 100% 확실시되던 50대 초반 실력파 교수 2명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는 좋게 해석하면, 서머스식 ‘충격 요법’인 것이다.

서머스는 원래 MIT에서 과학을 전공했으나 하버드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꾸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28세에 사상 최연소로 하버드 대학 종신 교수 직을 부여받은 천재다. 그는 전국과학재단이 해당 분야의 독보적 업적을 기념해 부여하는 앨런 워터먼 상은 물론 2년마다 40세 이하의 가장 뛰어난 경제학자에게 주는 존 베이츠 클라크 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실력파이다.

일각에서는 하버드 대학 총장 취임 후 서머스가 보여준 일련의 직선적이고 전투적인 행동이 워싱턴 정치 무대에서 익힌 보스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한 비판가는 “서머스는 지금 하버드에 문화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라고까지 지적했다. 그의 혁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전적으로 하버드만의 문제다. 하지만 걸핏하면 ‘미국의 경우’에서 모범 답안을 찾아 나서는 한국의 대학 당국자들에게 만큼은 현재 하버드 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혁을 둘러싼 진통은 ‘강 건너 불’이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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