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자본, 심판대 서다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5.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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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의 ‘뜨거운 감자’인 외국 자본이 마침내 도마에 올랐다. 국세청이 세무 조사라는 칼을 빼어든 것이다. 그동안 ‘투기 본색’을 드러내며 한국에서 막대한
 
미국 사모투자펀드(PEF) 뉴브리지캐피탈의 리처드 블럼과 데이비드 본더만 공동회장은 지난 4월20일 한국에서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회공헌기금 2백억원을 기증하겠다고 발표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내외신 기자들은 블럼과 본더만 회장을 상대로 “제일은행 매각으로 1조1천5백억원 양도차익을 얻은 것 치고는 2백억원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 “앞으로도 조세 회피처(tax heaven)를 활용해 한국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영업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이에 블럼 회장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누가 세금을 회피한다는 것이냐? 뉴브리지캐피탈은 미국과 한국이 체결한 조세 협정에 따라 낼 필요가 없는 세금은 내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뉴브리지캐피탈은 지난 4월15일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설립한 종이 회사(페이퍼컴퍼니) KFB뉴브리지홀딩스를 내세워 제일은행을 영국 스탠더드차터드 은행에 팔아 양도차익 11억5천6백38만 달러(1조1천8백억원)을 벌었다. 국내에 사업장을 둔 투자 회사가 이만큼 양도 차익을 거두었다면 3천5백억원 가량을 양도소득세로 납부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이중과세방지협정을 맺고 있고 KFB뉴브리지홀딩스가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있어 1차 과세권은 라부안이 갖고 있다. 뉴브리지캐피탈이 라부안에 세금을 냈다고 하면 한국 국세청은 세금을 과세할 수 없다.

국세청, 세무 조사로 대응 착수

국세청이 뉴브리지캐피탈을 상대로 세무 조사를 벌이기 위해 서류 검토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세청은 이미 지난 4월15일 미국 사모주식펀드 칼라일과 부실자산투자펀드(벌처펀드) 론스타를 상대로 세무 조사를 벌인다고 발표했다. 미국 영화 감독 마이클 무어가 연출한 영화 <화씨911>에 등장하는 사모펀드 칼라일은 지난해 2월 한미은행 지분을 씨티은행에 매각해 양도차익 7천억 원 가량을 벌었으나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았다. 또 론스타는 서울 강남 스타타워빌딩을 팔아 투자한 지 3년6개월 만에 2천4백억원의 차익을 거두었고, 극동건설을 팔아 3천6백50억원을 회수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세금을 내지 않는다.

천문학적인 차익을 거두었음에도 세금을 내지 않는 외국계 투기 자본에 대해 국민 정서가 극도로 악화하자 국세청은 세무 조사라는 칼을 빼어들었다. 이번 세무 조사는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일반 조사가 아니라 ‘기획 조사’이다. 재정경제부 고위 관리는 “국세청이 세무 조사에까지 착수했다면 탈세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세청이 ‘탈세’내지 ‘과세권’이 있다고 결론지으면 외국계 투기 자본들은 양도차익 크기에 따라 최소 8백억~4천억 원까지 추징당하게 된다.

 
지금까지 외국 자본의 순기능과 폐해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한국이 ‘투기 자본의 놀이터’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이는가 하면, 외국 자본에 대한 반감은 동북아 금융 허브를 꿈꾸는 정부 정책과 맞지 않는다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또 투기 자본이 들락날락하면서 한국 증시의 안정성을 크게 해치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투명 경영을 자리 잡게 하고 부실 기업 구조 조정을 순조롭게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외국 자본을 둘러싼 여론의 스펙트럼에 혼란을 느껴서인지 올해 초 청와대 경제보좌관실에 보고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경제보좌관실은 올해 2월 중순 관계 부처, 한국은행, 국제금융센터로부터 협조를 받아 ‘투기성 외국 자본 유입의 영향과 대응 방향’을 보고했다.

정부 부처와 금융산업 전문가 사이에서  논의되던 외자 논란은 ‘5% 보고제도’ 도입을 계기로 외국계 투기 자본에 대해 규제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비화했다. 지난해 말 국회가 증권거래법을 개정하면서 경영권 행사를 목적으로 주식 5% 이상을 매입하면 주식 취득 목적과 자금 조성 내역을 공시하게 강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외환위기 이후 우대를 받던 외국 자본이 반발하고 나섰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3월 ‘5% 보고제도가 외국 투자자를 규제하겠다는 목적’이고 ‘경제 국수주의가 한국 미래를 위협한다’고 보도했다.

이대순 투기자본감시센터 대표는 “5% 보고제도는 미국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외국 자본의 대변지 같은 보도 행태를 보이며 한국인을 협박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외환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외국인 투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외국인은 국내 은행 산업과 주식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 주식 시장에서 외국인 주식 보유 비율은 40.1%로 늘어났다. 개인이 20.1%, 국내 기관투자자가 17%에 불과하다. 국내 10대 그룹에 대한 외국인 주식 보유 비중은 46.9%까지 올라갔다. 또 시중 은행 8개 가운데 3개를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나머지 5개 시중 은행 가운데 우리금융지주를 제외하고 4개는 외국인 지분이 절반을 넘는다.

제일은행을 영국 스탠더드차터드가 인수했고, 외환은행은 론스타가 소유하고 있다. 한미은행은 2000년 칼라일에 팔렸다가 지난해 씨티은행으로 넘어갔다. 국민은행 76.2%, 하나은행은 62.9% 조흥은행과 신한은행은 68.3%까지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은행 시장에서 외국계 은행이 차지하는 시장점유율은 21.8%까지 치솟았다(도표 참조). 미국(5%) 독일(4%) 일본(6%) 스위스(9%) 같은 선진국은 물론이고 외국 자본이 판치는 멕시코(20%)보다 높다. 외국 자본이 자국 금융산업을 장악한 중남미 국가들은 주식 시장과 금융산업의 불안정이 심해져 경제 위기에 대응 능력이 떨어지고 국가 기간 산업의 성장이 저해되는 부작용을 겪고 있다. 

또 상장 기업 10개 사 가운데 한 곳이 국내 최대 주주보다 외국인 지분이 커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다. 외국인이 소유한 국내 토지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여의도 면적의 18배나 된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여의도 면적의 6배에 불과했다.

일부 투기 자본, 유상 감자 등으로 막대한 차익 올려

 

한때 외국 자본을 유치하면 국가 영웅으로까지 칭송받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2002년쯤. 이때부터 ‘외국자본 경계론’이 시민단체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대안연대회의는 2002년 ‘주주 가치 증대를 내세워 국부를 유출하고 국민 경제의 안정을 해치는 외국 자본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대안연대회의를 비롯한 3개 시민단체를 통합해 출범한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외국계 투기 자본과 금융감독원을 상대로 매각 무효 소송이나 업무상 배임 혐의로 소송을 제기하며 외국자본 규제론을 확산해 나갔다.

뉴질랜드 사모펀드 소버린이 SK주식회사를 상대로 적대적 합병·매수(M&A)를 시도하자 국내 경제단체들까지 나섰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은 ‘외국 자본이 국내 기업을 약탈해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비명을 질렀다. 국내 기업들은 외국 자본의 적대적 M&A 시도를 경계하며 단기 실적 위주로 경영 행태를 바꾸고 설비 투자를 줄이면서까지 경영권 방어를 위해 현금 보유액을 높였다. 외국계 투기 자본은 이와 같은 국내 기업의 정서를 이용해 막대한 차익을 거두기도 한다.

삼성물산 주식을 대량 인수했던 영국 사모펀드 헤르메스는 지난해 3월 기자회견을 열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적대적 M&A를 감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삼성물산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식을 매집하게 되었고 주가가 올라가자 헤르메스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보유 주식을 전량 매각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겼다. 김경원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시장 조작과 사기에 가까운 행위이나 이를 처벌할 제도적 뒷받침도 없고 금융 당국이 처벌할 의지도 없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전승철 금융경제연구원 국제경제팀장은  “투기성 외국 자본이 투자 자금을 조기에 회수하기 위해 설비 투자를 줄이고 국내 기업의 성장성을 해치고 이로 인해 국부가 유출되는 문제점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대표 사례가 영국 브릿지인베스트먼트홀딩스(BIH)가 대주주인 브릿지 증권. BIH 전신인 KOL은 리젠트 증권을 인수한 후 1999년 70% 고배당을 실시해 2백억원을 회수했고 2002년 브릿지 증권을 출범시킨 후 세 차례에 걸쳐 유상 감자를 실시해 6백억 원을 회수했다.

지난해 6월에도 브릿지 증권은 을지로와 여의도 사옥을 판 돈으로 또 유상 감자를 시행해 1천1백25억원을 빼갔다. 이대순 투기자본감시센터장은 “BIH는 이제 브릿지 증권을 매각하겠다고 나섰고 매각 허가 여부를 심사하는 금융감독위원회가 허가하지 않으면 회사를 청산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만도 대주주인 선세이지(JP모건 자회사)는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유상 감자를 실시해 초기 투자 금액 2백46억원의 다섯 배가 넘는 1천7백10억원을 빼내갔다. 이밖에 ㈜OB맥주·메리츠증권·서울증권에서 비슷한 사례가 나타났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5월 증권거래소 상위 2백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12%가 외국인 주주의 경영 간섭으로 애로를 겪었고, 그 사유 가운데 47%가 설비 투자 대신에 배당률을 높이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응답했다.

외국계 투기 자본은 외국 은행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국내 금융기관을 인수하면서 선진 금융 기법과 경영 노하우를 전수한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국내 금융 전문가들은 반론을 제기한다. 김경원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외국 자본에 넘어간 시중 은행들은 대규모 구조 조정을 거쳐 인력을 크게 줄였고,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적은 기업 대출을 축소하고 주택담보 가계 대출에만 치중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다. 그게 선진 금융 기법이냐”라고 말했다. 외국계 은행은 가계 대출은 30% 가량 높이고 기업 대출은 28% 줄였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은 투자 자금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외국 자본이 외환위기 회복에 기여한 공로를 부인할 수 없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재경부 고위 관리는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이렇게 다를 수 있냐? 외환위기 때 들어온 외국 자본은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을 인수해 금융과 산업 구조 조정을 신속하게 추진하는 데 기여하지 않았는가. 거덜나게 생긴 집안을 간신히 살려놓았더니 이제 와서 가재도구를 싸게 팔았다느니, 끌어들인 돈이 어쨌다느니 따지니 참 어이가 없다”라고 말했다.

투기 자본이라고 해도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을 구조 조정해서 흑자 기업으로 만들어 기업 정상화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또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서 기업 감시 기능과 경영 투명성이 높아졌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주주 이익을 중시하는 경영 풍토도 확산되었다. 관치 금융이라는 용어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글로벌 스탠더드와 시장 원리에 맞게 금융산업이 재편되었다. 이로 인해 국내 금융산업에 대한 대외 신인도도 높아졌다.

규제책보다 옥석 가리기 우선해야

김경원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외국 자본 규제책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일자리 창출 효과와 국민 경제 기여도가 높은 양질의 자본을 선택적으로 끌어들이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승철 금융경제연구원 국제경제팀장은 “국가 기간 산업을 외국계 자본이 인수하는 것을 규제하는 정책이나 기업의 경영권 보호 장치를 강화하는 정책을 도입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외국 자본에 대한 정서적 반감이나 금융 자유화를 저해하는 규제책은 국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연방 정부가 국가 기간산업을 인수하는 외국 자본의 적격성을 심사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인수를 무효화할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일본도 ‘외환과 무역법’에서 ‘국민 경제의 원활한 운영에 악영향을 현저하게 미친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사전 심사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국 ‘공정무역법’과 프랑스 ‘화폐재정법’에도 공공 이익에 반하거나 국가 안보와 공공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 투자에 대해서 사전 승인 제도를 실시하거나 투자 철회를 지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또 투기성 자본에 의한 적대적 M&A를 막기 위해 갖가지 경영권 방어 장치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재벌의 소유 구조를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반대하는 국민 정서가 크다. 전승철 금융경제연구원 국제경제팀장은 “5~20% 지분을 갖고 그룹 계열사를 황제처럼 경영하는 기업 소유자들에 대한 국민 정서가 경영권 방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반대할 것이다. 또 기업지배구조 선진화라는 정책 과제와도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 작업은 외국계 투기 자본의 발호를 막는 데도 필요한 선결 과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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