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전자 패권’ 쟁탈전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5.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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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삼성전자, 일본의 소니, 중국의 하이얼 등 동아시아 삼국 전자업체가 세계 시장 패권을 놓고 사활을 건 승부를 펼치고 있다. 전자 시장 삼국시대의 최후 승자는?
 
동아시아 3국 전자업체들이 세계 전자 시장을 삼분하고 있다. 한국의 삼성전자, 일본의 소니, 중국의 하이얼이 각각 자국 전자제품 시장에서 얻은 시장지배력을 지렛대 삼아 해외 시장을 적극 개척하고 있다. GE나 필립스·지멘스·노키아처럼 북미나 유럽 시장에서만 돋보이는 ‘지역 군웅’과 달리 동아시아 삼국의 전자업체들은 전체 매출 가운데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70%가 넘을 정도로 전세계 시장을 공략해 시장점유율을 늘리고 있다.

동아시아 전자업체들은 각국 공업화 단계가 다르다 보니 제품 종류에 따라 비교우위가 뚜렷하게 갈린다. 이로 인해 국가 사이에 수직적 분업 체계가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기술력이 경쟁 우위가 높은 단계인 국가에서 낮은 단계 국가로 잇달아 이전되고 있다. 높은 단계 국가들은 부가 가치가 높은 제품 라인에서 경쟁력을 다져가는 발전 패턴을 보이고 있다.

기술혁신 거듭되며 비교우위 역전

세계무역개발위원회(UNCTAD)는 동아시아 성장 패턴을 ‘기러기(flying geese)형 발전 모델’이라고 표현했다. 산업 발전 과정에서 뒤에 있는 기러기가 앞에 있는 기러기를 쫓아 날아가고,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는 끊임없이 기술적 혁신을 추구하며 뒤에 있는 기러기와의 차별성을 유지한다. 날아가는 기러기 떼처럼 동아시아 전자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소니가 기러기 비행 편대 선두이고 삼성전자가 그 뒤를 따른다면, 하이얼은 맨 뒤에서 두 기러기를 쫓고 있다. 전자산업을 넘어 콘텐츠 산업 영역까지 고공 비행하던 소니가 난기류를 만나면서 처진 사이에 삼성전자가 소니를 위협할 고도까지 치고 올라섰고 하이얼은 ‘13억’ 내수 시장이라는 뒷바람을 받으며 가전 부문에서 삼성전자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선두 기러기가 처지고 후발 기러기가 빠르게 쫓아오면서 한때 뚜렷하게 비교우위를 보이던 제품군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가전제품군에서는 사활을 건 승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경영 실적을 기준으로 세 업체를 평가하면, 삼성전자가 단연 돋보인다. 삼성전자의 주축 사업인 반도체·휴대전화 단말기·액정(LCD) 패널 부문이 천문학적인 수익을 내며 지난해 말 당기순이익 10조원을 넘어섰다. 일본 10대 전자·IT(정보기술) 업체 순익을 모두 합쳐도 삼성전자에 못 미친다. 올해 1/4분기 환율 하락으로 원화 환산 영업이익률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46%나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이 2조1천5백억원이나 되었다. 지난 한 해 동안 거둔 소니의 순익을 2배 웃도는 실적이다.

이시노 마사히코 일본 미쓰비시 증권 상임 애널리스트는 니혼 게이자이 신문사가 펴내는 산업전문지 <비즈테크>에 기고한 글에서 ‘반도체·액정 패널·휴대전화는 삼성전자의 세 가지 신기(神器)다’고 밝혔다. DRAM과 플래시 메모리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사업과 액정 패널 사업, 휴대전화를 주력 상품으로 한 정보통신 사업 분야가 전무후무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삼성전자는 세 가지 사업 부문에서 세계 1~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삼성전자의 세가지 '신령스런 무기'

 
삼성전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일본 업체들이 장악했다. 도시바·NEC·히타치 같은 일본 업체들은 1985년 전후 미국 인텔이나 텍사스인스트루먼트를 밀어내고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차지했다. 인텔은 1985년 DRAM 시장 철수를 발표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주문형 반도체(ASIC) 시장으로 후퇴했다. 전략적으로 후퇴를 준비하면서 인텔은 새로 진출한 마이크로프로세스 시장의 진입 장벽을 높이 쌓았다.

메모리 반도체 전투에서 쾌승을 거둔 일본 업체들은 칩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공성전(攻城戰)에 돌입했다. 그러나 일본 업체들이 고부가가치 제품인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 공략에 치중하다 보니 메모리 반도체 평원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졌다. 이 틈을 노리고 한국의 삼성전자와 LG반도체·현대전자(하이닉스로 통합)가 메모리 반도체 평원을 침공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마이크로프로세서나 주문형 반도체 산업과 비교해 기술 수준이 낮아 대규모 설비 투자를 곁들이면 진입할 수 있었다.

 평원 공격 세력 가운데 가장 돋보인 세력은 삼성전자. 삼성전자는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에 따라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다. 일본 업체들은 최첨단 제조 공정에 투자하지 않더라도 회로 설계 기술만으로 인텔이 쌓은 시장 진입 장벽을 허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견고한 성문만 두들기다가 잇달아 패퇴하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한국 업체 손에 넘어갔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일본 업체들은 뒤늦게 반도체 평원을 회복하기 위해 연합군을 편성했지만 지휘 체계가 불안한 데다 투자 시기를 놓쳐 기술 우위를 앞세운 파괴력이 크지 않았다. 또 한때 백색가전이나 생산하던 업체라며 과소평가했던 삼성전자가 이미 가공할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거둔 승리에 힘입어 한때 눈여겨보지 않던 플래시 메모리 시장까지 개척해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평정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대첩’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1990년대 초 액정 패널 시장을 새로운 타깃으로 삼았다. 삼성전자는 액정 패널 매출 40%를 설비 증설에 재투자해 규모 면에서 일본 업체를 압도해 갔다. 시장 반응 속도에서도 일본 업체들은 삼성전자를 따라올 수 없었다.

반도체와 액정 패널은 ‘시황 상품’이다. 시황 상품은 제조 비용과 관계없이 시장 수요와 공급 사이에서 가격이 결정된다. 제품 시장이 주식이나 선물 거래와 가까운 것이다. 이시노 마사히코 미쓰비시 증권 상임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 전력을 기울여 선물 거래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삼성전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 흐름을 파악해 최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올인’한다. 

액정 패널 분야 세계 1위 자리를 놓고 삼성전자는 한국·네덜란드 연합군인 LG필립스LCD, 일본 샤프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소형 패널 시장은 샤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고, 대형 패널 시장은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또 샤프는 영업이익률이 8~10%에 불과하지만 삼성전자의 액정 패널 사업 영업이익률은 30%를 웃돈다.

소니, 적극적 제휴 전략 추진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2008년에 가면 액정 TV 출하 대수는 5천만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PC용 액정 패널과 노트북PC까지 합치면 액정 패널 시장 규모는 1억7천만대까지 늘어난다. 일본 업체들이 TV 수상기 패널 시장만은 내줄 수 없다고 분전하고 있는데, 전망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소니는 액정 패널 사업에서 일전불사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삼성전자와 화친을 꾀했다. 소니는 삼성전자에 경영권을 내주는 조건으로 올해 4월 액정 패널 합작사 S-LCD를 설립한 것이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소니가 손을 내민 것이다. 소니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평면TV 시장에서 삼성전자에게 선두 자리를 빼앗긴 경험이 있다.

소니가 외국 업체와 손잡고 합작사를 설립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소니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최고전략책임자(CSO)를 겸직하고 있는 가쓰미 이하라 부사장은 2002년 스웨덴 휴대전화 업체 에릭슨과 손잡고 합작사 소니에릭슨을 설립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삼성전자·LG전자·팬택앤큐리텔 같은 한국 업체들은 1990년대 초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 진입해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소니·파나소닉·산요 브랜드를 변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소니는 액정 패널 사업과 마찬가지로 독자 사업을 포기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휴대전화 사업에서도 유례 없는 대첩을 거두며 모토롤라와 세계 2위 자리를 다투고 있다. 일본 후지쓰·NEC·산요·샤프·파나소닉은 휴대전화 단말기 제품을 생산하고 있지만 구색을 갖추는 데 불과하다. 삼성전자는 또 평면TV·캠코더·DVD플레이어·홈시어터 시장에서도 일본 업체들을 잇달아 물리치거나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업체들이 첨단 제품군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중국은 세계 가전산업 생산 중심지로 떠올랐다. 중국 가전산업은 낮은 인건비와 거대한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시장경쟁력을 갖추어 갔다. 오랫동안 수많은 가전업체가 난립하던 ‘13억’ 가전 시장을 평정할 채비를 갖춘 강자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가장 돋보이는 업체는 하이얼. 중국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도시  중국 칭따오에 본사를 둔 하이얼은 1984년 설립되어 20년 동안 주로 냉장고를 생산했다.

하이얼은 1990년대 초부터 눈부시게 성장해 중국 가전시장의 21%, 백색가전 시장의 30%를 차지하는 중국 대표 전자업체가 되었다. 하이얼은 생산 원가가 세계 평균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경쟁 우위 조건을 내세워 전세계 백색가전 시장에서 가격 파괴 바람을 일으켰다. 현재 가전 분야 1만5천개가 넘는 제품군을 생산해 세계 1백60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하이얼, 세계 2위 백색가전 강자로 떠올라

하이얼은 미국 시장에서 자체 브랜드를 내세워 컴팩트 냉장고 시장의 50%, 아파트용 냉장고 시장 25%, 장롱형 냉장고 40%, 와인 냉장고 시장 50%, 룸 윈도 에어컨 시장 18%를 점유하고 있다. 캐나다와 남미에서도 하이얼의 비약은 눈부시다. 하이얼은 2002년 3월 미국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 있는 그리니치 저축은행 건물을 사들여 북아메리카 사업본부를 설립했다.  또 2003년 8월 일본 도쿄 긴자에 하이얼 네온사인 광고를 설치하며 ‘전자산업의 메카’에 진을 치고 있다. 

하이얼은 지난해 전세계 매출 1천억 위안(약 15조원)을 기록하며 세계 4위의 백색가전 업체로 우뚝 섰다. 김석주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 <사들이는 중국, 팔리는 한국>에서 ‘장루이민 하이얼 회장은 1996년 세계를 향해 달리자(走向世界)고 주창하며 글로벌화 전략을 실행에 옮겨 중국 경영자 사이에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하이얼의 침공에 맞서 자사 시장점유율을 지켜내고 있지만 하이얼 제품의 워낙 가격이 낮아 수성을 장담하기 힘든 형국이다. 박승록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가전산업 분야에서 한국과 중국 기업의 기술력 차이는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방어하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다. 하이얼이 세계 시장을 공략하기 전에 일찌감치 베이징·상하이·칭따오·쑤저우에 전진 기지를 세웠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중국을 제2 성장의 전진 기지로 삼고 중국 공략에 사운을 걸고 있다. 삼성전자가 주로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면 LG전자는 에어컨이나 세탁기처럼 백색가전에서 품질 경쟁력을 내세워 시장점유율을 넓혀가고 있다. 하이얼 외에 닝보보드·후이쩌우TCL을 비롯한 중국 휴대전화 업체들은 품질은 낮지만 싼 휴대전화 단말기를 잇달아 출시하며 삼성전자와 모토롤라가 장악한 중국 내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소니는 고공 비행을 하다가 한국의 기러기에 추월당한 전자제품 시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 영토를 개척하고자 했다. 소니는 앞으로 콘텐츠와 접목되지 않는 전자산업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다. 소니가 세계 최대 콘텐츠 매장량을 과시하는 미국 할리우드로 눈길을 돌린 것도 이 때문이다(관련 기사 참조). 소니는 1989년 미국 컬럼비아 영화사에 이어 최근 MGM을 인수했다. 또 컴캐스트와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었다.

 
소니는 현재 안팎으로 난제에 휩싸였다. 2년 전 영업이익이 크게 줄고 주가가 곤두박질했던 ‘소니 쇼크’에서 간신히 회복하는가 싶더니, 2005년 3월 끝난 지난 회기 결산에서 전세계 매출 6백70억 달러를 기록했으나 영업이익률은 1.5%에 그쳤다. 이데이 노부유키 전 소니 회장이 공약한 2007년까지 영업이익률 10%라는 목표가 무색하다. 지난 3월 취임한 스트링거 소니 회장은 전자기기 부문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경영 체제를 단순화하면서도 콘텐츠와 전자기기를 접목해 부가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오랜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콘텐츠와 전자산업을 접목하겠다는 소니의 전략은 전문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나 경영 실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신형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고객이 아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융합 제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소니는) 너무 빠르게 투자를 단행했다”라고 지적했다. 이데이 소니 전 회장도 “너무 앞서 왔다”라고 말했다.

회사 투자 자원을 콘텐츠에 집중하는 사이에 한수 아래로 치부했던 삼성전자가 평면TV 시장 선두를 빼앗았고, 애플 아이포드(MP3 플레이어)는 21세기 워크맨으로 자리 잡았다. 소니 디지털 카메라는 아직까지 경쟁력이 있지만 캐논과 니콘이 위협하고 있다. 비디오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소니 플레이스테이션3은 마이크로소프트 차세대 Xbox 게임기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을 전망이다.

소니는 세계 전자산업 판도를 뒤집을 비장의 무기 두 가지를 준비하고 있다. 첫 번째는 ‘블루레이’라고 일컫는 고용량 DVD포맷 장치다. 소니는 마쓰시타·히타치·필립스와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미국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를 포함해 하드웨어 제조업체와 콘텐츠 생산업체에게 블루레이를 DVD포맷 표준으로 선택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바·NEC·산요가 블루레이보다 싸고 간편한 고화질 DVD포맷을 선보여 치열한 시장 다툼을 예고하고 있다.

"5~10년 후에는 무엇으로 먹고 사나?"

두 번째 무기는 ‘셀(Cell)’ 칩. 도시바·IBM과 손잡고 고성능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개발하고 있다. 소니는 차세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3’ 안에 셀 칩 4개를 집어넣어 정보 처리 속도가 가장 빠른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밝혔다. 생산량과 가격이 적당할지가 관건이기는 하지만 소니는 셀 칩을 앞세워 인텔이 독점하다시피 한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넘보고 있다.

이에 맞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차세대 게임 개발 도구인 XNA를 게임개발자에게 공개해 자사 게임기 Xbox 시리즈용 게임을 개인용 컴퓨터에서도 즐길 수 있게 해, 다소 폐쇄적인 전략을 구사하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에 맞선다는 계획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올해 말 차세기 게임기 Xbox2를 출시해 내년에 나올 플레이스테이션3을 견제할 심산이다.

하이얼은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을 거부하고 자체 브랜드로 해외 시장을 공략한다. 수출과 직접 투자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선난후이(先難後易)’ 원칙을 지킨다. 까다로운 선진국 시장을 먼저 공략하는 방식이다.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다져진 품질과 브랜드 가치라면 동남아시아나 중남미 시장을 공략하기가 쉽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전략은 주효했다.

하이얼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98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캠덴에 냉장고 생산 공장을 설립하는가 하면, 2001년 6월에는 이탈리아 가전제품 공장을 인수했고, 7월에는 합작 휴대전화 공장을 세웠다. 하이얼의 덩지 키우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하이얼 지주 회사인 하이얼CCT홀딩스는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2004년 3월 대규모 증자를 거쳐 해외 IT(정보기술) 업체를 합병·매수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했다. 아직 자산 규모나 가전 부문을 제외한 영역에서 기술력이 한국 기업에 비해 처진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세계 최대 잠재 시장을 등에 업은 하이얼의 성장 잠재력은 무한하다.  

한편 승승장구하고 있는 삼성전자에게도 심각한 고민이 있다. 2003년까지 9년 동안 삼성전자 상무를 맡았던 일본인 기술자 요시카와 료조우 도쿄 대학 경제학연구소 특임연구원은 “삼성전자는 장래 사업의 싹을 잘라 버려 지금 이대로라면 언젠가 자연사한다”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외환위기 때 1만2천명을 강제 퇴사시키고 임직원 급여를 일률적으로 30% 삭감했는가 하면, 해외 관련사를 일제히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채산성이 맞지 않는 사업은 아예 싹까지 잘라냈다. 이로 인해 반도체·액정 패널·휴대전화를 대신할 장래 유망 사업이 보이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일본을 이겼다. 이제 배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자신감에 차 양으로 승부하는 자본집약형 제품에 대한 천문학적인 투자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기업 다수가 과거 성공 방식을 고집하다가 무너졌다. 천문학적인 설비 투자에 기초한 자본집약형 제품에만 몰두하지 말고 양보다 질,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회사를 혁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앞으로 고부가가치 제품군에서 선두 기러기가 구축한 시장 진입 장벽에 막히고 후발 기러기의 추격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지적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다. 이미 일본 업체가 쓰라리게 경험한 ‘패전의 길’이다. 선두 기러기가 저지른 실패까지 답습하지 않기 위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에게 늘 묻는다. “5~10년 후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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