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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으로 카피를 뽑아보니

[문화 비평]

윤준호(카피라이터 서울예대 광고창작과 교수) ㅣ 승인 2005.06.24(Fri)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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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준호  
누군가를 가르쳐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 문장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선생 자신이다.’ 또 한 학기를 마감하는 설거지로 바쁜 요즘, 그런 생각이 새삼스레 나를 붙든다. 이번 학기에도 배운 것이 많다는 증거다. 

‘가족’을 테마로 ‘카피 쓰기’ 실습을 시켰는데, 참으로 다양한 아이디어가 풍성하게 쏟아졌다. 짐작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가족’과 ‘가정’이라는 키워드 속에 숨어있었다. 이혼, 입양, 자살, 과잉 보호, 출산율 저하, 청소년 문제, 세대 간의 대화 단절···. 가족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시대를 생각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공익 광고 형태로 제작된 학생 작품들에서 읽히는 메시지의 핵심을 간추려 보자면 이렇다. 오늘 이 땅의 미래와 정체성이 흔들리는 까닭은 가정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더욱 절실하게 걱정해야 할 것은 무너지고 있는 교실이 아니라 무너지는 가정이다. 위기의 심각성은 공교육이 아니라 가정 교육에 있다.  

왜 아니랴. 사회를 강물에 비한다면 가정은 발원지다. 발원지가 썩는데 어떤 물줄기가 온전하겠는가. 먼저 맑혀야 할 윗물은 사회의 상류(上流)가 아니라 ‘부모’라는 이름의 상류다.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정수기’ 노릇 정도일 테니까. 공교육을 나무라기 이전에 가정이라는 이름의 교실이 어떤 모습인지를 돌아볼 일이다.  

학생들의 습작 광고 몇 개를 옮겨보자. 소년의 멍든 얼굴 옆에 삐뚤빼뚤한 글씨의 카피. ‘아버지가 오늘도 야근이었으면 좋겠다.’ 말할 것도 없이 가정 폭력 문제다. 아버지가 공포의 대상인 집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학원 폭력, 사회 폭력의 교사는 어쩌면 아버지들인지도 모른다. 

대조적인 작품도 있다. 비주얼은 하루 종일‘엄마’만 찾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휴대전화 통화 내역 표시 화면. 헤드라인은 ‘최대리는 오늘도 엄마에게 열일곱 번의 결재를 받았습니다.’ 조그만 글씨들이 그 통화 내역을 말해준다. ‘엄마, 나 점심 뭐 먹을까?’ ‘엄마, 나 오늘 친구랑 저녁 먹고 들어가면 안돼?’··· 하긴, 멀쩡한 아들딸을 두고도 ‘말아톤’ 청년의 어머니처럼 자식의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가.  

만약 앞이 보이지 않는 식구가 있다면

또 이런 것. 자살한 영화배우 장궈룽(張國榮)의 미소 짓는 얼굴이 보인다. 그 옆에 명료한 카피. ‘그는 아직도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의 가족들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자살을 이렇게 표현한 것도 있다.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있는 남자, 그의 머리를 관통해서 나란히 서 있는 아내에게로 날아가는 총알. 그 충격적인 그림에 붙인 한마디. ‘자살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경계선이 보이질 않는다.  말의 크기나 넓이를 잴 수 있다면 그것은 ‘지구’나 ‘우주’에 견주어도 작지 않을 것 같다. 하여, 이런 카피도 설득력을 가지는 것 아니겠는가. ‘외국인 근로자-그들도 이제 이 땅의 가족입니다’ ‘지구는 대가족입니다’.  

가족은 세상의 최소 단위이면서 세상의 울타리를 무한대로 넓혀놓기도 한다. 그런 광고를 만든 학생들이 있어서 박수를 많이 쳐주었다. 가족의 마음이 되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편리해진다는 내용의 광고다. ‘핸드폰 메이커 사장님 여러분. 왜 이런 제품은 만들지 않으십니까?’ 그리고는 휴대전화의 문자판을 클로즈업해 놓았다. 보통 휴대전화와 다르다. 문자판에 점자가 찍혀 있다.  

아! 정말, 왜 아무도 이런 제품을 만들지 않는 걸까.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점자를 병기한 엘리베이터 숫자판이 떠오른다. 당신이 휴대전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가족 중에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벌써 그런 물건을 만들었을 것이다.   

가족의 눈으로 바라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가족은 사랑의 단위를 넘어 문화의 단위가 된다. 아니, 세상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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