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이 일깨운 새 세계
  • 김은실 (이화여대·여성학) ()
  • 승인 2005.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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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지난 1주일간 세계여성학대회의 사무총장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80개국에서 2천8백명이 참여하고, 논문이 1천6백편 발표되는 대회를 조직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한국 여성학 대회에는 전국에 있는 많은 여성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참여해 대회 조직과 진행에 아이디어와 노동을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공식 언어, 초청 인사 국적에 대한 배려,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대회’라는 것에 대한 개념 등등 많은 논쟁이 있었다. 조직위원회에 참여하는 위원들의 수만큼, 그리고 대회에 참석자 수만큼이나 대회에 대한 인상, 느낌, 평가는 다양할 것이다. 지금 어느 누구도 대회를 총체적으로 평가하거나 재현할 수 없다. 단지 자신의 처지에서 부분 평가만이 가능할 것이다.

 학자로서 나는 이 대회를 새로운 지식/문화 정치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참여했고, 또 참가자들이 경험하고 깨달은 새로운 정치학에 주목했다. 가장 많은 참가자들은 미국에서 왔다. 백인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고 아시아인 그리고 흑인, 원주민, 인디언 학자들도 참여했다. 다음으로 많은 참가자들은 일본·중국·인도에서 온 학자, 활동가, 정책관련자들이었고, 캐나다·영국·타이완·우간다·케냐에서도 많이 왔다. 물론 한국 참가자들이 가장 많다. 그러나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에서 온 참가자들이 1천1백명이 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서양인에게도 그리고 한국인에게도 아시아인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샬롯 번치는 한국인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일본인과 중국인이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인 참가자들은 서양인이 너무 많고 ‘제3세계’인은 없다고 평했다. 한 참가자는 뒤이은 연세대 강연에서 제 3 세계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서양 중심의 대회였다고 평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서울에서 서양인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조차 다른 ‘아시아인’들을 구별해낼 경험 혹은 능력, 시각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대회 조직위원회는 아시아를 가시화하고, 한국을 아시아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일정 부분 긍정 효과를 가져왔고, 또 앞으로 그 효과는 지속되리라 기대한다.   

 일본에서 유명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영어권 문학 학자인 다케무라 교수와 프랑스와 남미 사회를 연구했던 이토 교수는 처음 한국에 왔다. 그리고 아시아 영페미니스트 세션에서 발랄한 젊은 아시아 대학원 여성이 고민하는 문제들, 즉 국민 국가를 넘어서는 정체성 논의와 새로운 연대와 공존의 문제 의식을 보고 놀랐고, 한국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그들은 지리 차원에서가 아니라 문화와 사상 차원에서의 동시성에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아시아’라는 것이 엄청나게 동적인, 움직이는 실체라는 것을 실감한 것 같았다.

아시아의 새로운 ‘지식 담론 공동체’ 형성

 지난 8년 동안 아시아 8개국의 여성 학자들이 함께 작업한 아시아 여성학 교과서 프로젝트 팀은 이번에 상호 인용되고 상호 참조되는 지식공동체를 구상하면서 8개국 여성학 교과서 출판기념 패널을 가졌다. 출판 기념 패널에 참석한 영국의 유명 미술사가이며 페미니스트 문화학자인 그리젤다 폴락은 아시아에서 학자들이 서로 지식을 교환하고 인용하는 새로운 지식 담론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서양 근대 지식인들의 지식을 학습하고 인용했던, 그리고 아시아 젊은 세대에게 전파했던 아시아의 지식인 사회가 이제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자신은 이제 아시아 지식인들과 서로 아이디어와 경험을 교환하고 빌려오는 새로운 소통 방식에 기반을 둔 공동 작업을 시급하게 시작해야 하겠다고 했다. 미국 버지니아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온 샤론 교수 역시 아시아의 영 페미니스트 포럼을 보고, 그리고 교과서 출판을 보고 지구화 시대 미국의 자기중심적 소견과 경험에 비해 아시아의 교류는 훨씬 앞서 있다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번 세계여성학대회는 영어를 공식 언어로 하는 국제 대회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인식과 체험을 가능케 한 뛰어난 성찰의 현장이었다. 소통 수단으로서의 영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것,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서울 한복판에서 구경하거나 섭렵한 것, 혹은 등록비를 낸 만큼 세계적인 학자들의 언설들을 소비해보는 경험을 한 것 등은 자기를 뛰어넘어 새로운 인식의 양상들을 경험하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유명한 세계적 서양 학자’와 ‘로컬의 아시아 학자,’ ‘그들’과 ‘우리,’ ‘손님’과 ‘주인’ 등의 이분법적 논리들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아시아 학자들이 이 구도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번 대회는 지구화시대 지구시민으로, 로컬 지식인으로 또 활동가로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느 정도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지구시민인지를 실험해보는 장이기도 했다. 이 실험은 앞으로 여성학계, 여성운동단체 그리고 여성 예술가들에게 분명히 어떤 흔적을 남기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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