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되 경쾌한 ‘전쟁 판타지’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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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신감각 분단 영화:<웰컴 투 동막골>

전쟁은 인간의 야만성을 폭발시킨다. 이런 야만의 경험은 전쟁이 끝나면 문화 예술로 승화해 전후문학 등 다양한 문화 예술 작품을 낳는다. 영화가 대중 문화의 주도권을 쟁취한 뒤로는 영화가 이 역할을 맡아왔다. 베트남 전쟁이 남긴 깊은 상흔을 스크린으로 옮긴 <플래툰>과 <지옥의 묵시록>은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들었다. 

세계 영화계에 아시아 영화의 존재를 각인시킨 중국 제5세대 감독의 디딤돌도 중일전쟁이었다. 전쟁 앞에 허물어지는 인간 군상을 그린 장이머우의 <붉은 수수밭>, 첸카이거의 <패왕별희>는 각종 영화제의 주요 상을 휩쓸었다. <붉은 수수밭>의 주연으로 장이머우의 계보에 속한 지앙웬 역시 <귀신이 온다>로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6·25라는 동족상잔의 내전을 겪은 한국은 이 비극적인 전쟁을 영화적 성숙으로 이끌지 못했다. 기나긴 독재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한국전쟁은 반공 영화로만 제작되었을 뿐이다. 독재의 사슬에 상상력을 거세당한 감독들은 스크린에서 전쟁을 재생산할 뿐이었다. 독재의 사슬이 풀릴 때까지 기나긴 유예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오히려 할리우드가 한국전쟁을 되씹는 일에 더 열심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 영화만큼의 아우라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적지 않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제임스 미치너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마크 롭슨 감독의 <원한의 도곡리 다리>(1954년), 로버트 레드퍼드의 데뷔작 <워 헌트>(1962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야전병원 매쉬>(1970년), 007 시리즈를 주로 연출한 테렌스 영 감독이 연출하고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인천>(1982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승리의 전쟁>(1986년) 등이 한국전을 배경으로 했다.

독재의 터널을 지나고서야 한국전쟁을 깊이 응시하는 수작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분노와 적개심이 아니라 전쟁의 비극과 인간성 파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은 영화를 통해서 한국전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열어주었다. 

<쉬리> 이후로 한국전쟁과 분단은 강력한 흥행 코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제규 감독은 이념과 사랑(<쉬리>), 혹은 이념과 가족애(<태극기 휘날리며>)의 대립을 통해 갈등을 증폭시키며 관객을 모았다. 분단과 분단이 남긴 또 하나의 상흔인 독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 역시 강한 긴장감을 주며 흥행에 성공했다.

분단은 코미디 영화의 소재로도 애용되었다. <간첩 리철진> <그녀를 모르면 간첩> <동해물과 백두산이> <간 큰 가족> <천군> 등 분단 상황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가 줄 지어 제작되었지만 대부분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분단을 코미디의 소재로만 활용하려는 얄팍한 상업주의에 관객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분단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이데올로기의 주술과 증오의 주술로부터 벗어난 남북한 군인의 아름다운 만남을 보여줌으로써 분단에 대한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열어주었다. 감동과 재미를 모두 만족시키며 관객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신예 박광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웰컴 투 동막골>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계보를 잇는 영화다. 남북한 군인과 미군 조종사가 전쟁이 비켜간 두메 마을에서 만나는 모습을 판타지적으로 그렸다. <선영아 사랑해> (교보생명) <젊은 그대> 등의 CF를 제작했던 박감독은 CF 감독 출신으로는 드물게 탄탄한 스토리 전개로 완성도 높은 영화를 제작했다.

진지하되 경쾌한 ‘전쟁 판타지’

무릉도원과 같은 강원도의 두메 산골 동막골에 우연히 들어선 남한의 탈영병과 북한의 낙오병,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는 동네 사람들의 순진무구함에 감화되어 전쟁의 시름을 잊는다. 이들은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며 스스로를 무장해제한다. 얼떨결에 들어섰지만 이들은 마음 속으로 동막골을 원해 왔던 것이다. 떠나야 할 시간이 되어도 이들은 다시 총을 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웰컴 투 동막골>의 가장 큰 매력은 진지하면서도 경쾌하다는 점이다. 강제규 감독이 스티븐 스필버그이고 박찬욱 감독이 올리버 스톤이라면 박광현 감독은 팀 버튼이었다. 그는 폭격 장면마저 불꽃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환상적으로 그려 놓았다. <귀신이 온다>에서처럼 시종일관 관객을 쥐고 웃기다가 마지막 순간 결정적인 울음을 안긴다. 

박광현 감독은 장진사단에 속하는 감독이다. CF 감독이었던 그는 장 진 감독의 손에 이끌려 영화에 입문했다. <묻지마 패밀리>의 ‘내 나이키’편을 연출하면서 그는 영화계에 이름을 알렸다. 80억여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웰컴 투 동막골>의 제작도 장감독이 이끄는 ‘필름있수다’가 맡았다.

그러나 박감독은 단 한 편의 영화로 장감독을 뛰어넘었다. 천재 연극 연출가로서 제작하는 작품마다 대박을 터뜨렸지만 장감독은 영화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의 영화는 ‘영화의 탈을 쓴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영상보다 대사가 앞서는 그의 영화에 대중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CF 감독 출신인 박감독은 연극 연출가 출신인 장감독과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논리보다는 감성을, 말보다는 영상을 중시하는 그의 연출 방식은 장감독보다 영화에 더 맞았다. 얽히고 설킨 상황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이 갈등을 풀어내는 모습을 판타지적으로 그리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웰컴 투 동막골>은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이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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