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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운동이자 공감의 정치인 여성 건강 운동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ㅣ 승인 2005.07.29(Fri)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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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치적인 사건이나 사회적 파문보다 몸을 통한 고통이나 쾌락을 통해 더 즉각적이고 급격하게 변화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의 고통을 치유하거나 쾌락을 제공하고 관리해주는 사람들에게 종속되곤 한다. ‘X파일’과 같은 큰 정치적 사건이 터지고 부동산 문제가 시끄러워도, 일상의 개인들에게는 자기 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선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건강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시도하지만,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며칠 전 가족이 입원한 병원을 찾았더니, 방문객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에 매주 영어로 의학 세미나가 열린다고 쓰여 있었고, 그 병원 의사들이 외국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홍보물들이 여러 곳에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게시물들은 병원의 명성을 알리는 광고이지, 환자나 방문객들과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유하거나 소통하겠다는 의지는 없어 보였다. 그것은 단지 ‘우리 병원 의사들은 글로벌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팔 수 있습니다’는 홍보이고, 환자들은 ‘전문화한’ 의사에게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다.

같은 날 오후 나는 이 병원의 홍보 전략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 즉 의사나 의료 체계에 대한 의존을 낮추고, 의학 지식은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여성운동단체 ‘또 하나의 문화 몸 살림터’의 <우리 몸, 우리 자신>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우리 몸, 우리 자신>은 미국 ‘보스턴 여성건강서 공동체’가 출판한 <Our Bodies, Our Selves>를 한국어로 번안한 책이다. 7백26쪽에 달하는 이 책은 번역을 기획한 지 7년 만에,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여성 54명의 무료 번역과 교열, 출판 편집인 3명의 각고의 노력, 여성 보건의료 전문가·여성학자·여성운동가 들의 공동 노력으로 출판되었다. 출판 비용을 지원해 달라고 여러 곳에 요청했지만 도움 받지 못했다. 무엇이 여성들로 하여금 이윤 추구와 자기 PR 시대에 그토록 긴 시간을 비영리적이고 이름 나지 않는 집단 작업에 몰두하게 했을까?

1970년대 초 미국에서 여성운동이 여성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기반은, 여성의 몸에 대한 공통의 경험과 관심이었다. 여성들은 사회가 여성 건강에 관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 상황, 산부인과의 의료 시술 남발, 안전한 피임법에 대한 열망, 원하지 않는 임신을 조절하는 낙태가 불법이라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몸의 고통과 수치심, 몸에 대한 무지를 다른 여성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임신이나 출산, 완경(‘폐경’) 같은 여성 몸의 자연적 과정을 질병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을 거부했고, 자신의 몸이 남성을 기준으로 설명되는 것, 그리고 의료 서비스의 수동적 소비자라는 현실에 저항했다. 이러한 저항과 새로운 의학 지식에 대한 욕구가 <Our Bodies, Our Selves>를 낳았다. 의료 체계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선용하기 위해서는 몸의 경험을 다른 여성들과 공유해야 하고, 그로부터 얻은 지혜가 사회적 지식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건강은 소비재가 아니라 기본 권리이고, 그것은 의료 서비스 수혜의 결과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며, 사회, 커뮤니티, 환경 간 상호 작용의 산물임을 주장한다.

1970년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이 책은 이후 30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최소 5백만권 이상이 팔렸다. 미국에서만 여덟 번이나 개정판을 냈다. 한국에서 이 책이 출판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몸의 경험이 자기의 정체성의 출처가 되고, 새로운 에너지의 근거임을 인식하는 여성 집단이 2000년도 이후에야 가시화했기 때문이다. <우리 몸, 우리 자신> 출판은 번역할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문제가 아니라, 미국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책을 한국 여성을 위한 책으로 번안해낼 집단이 있느냐 문제였다. 몸의 경험을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여성들, 문화적 맥락의 차이를 번역할 수 있는 사유 능력과 여성의 몸에 대한 여성주의 의식을 지닌 집단의 출현을 말한다.

이 책이 내가 방문한 병원 홍보물의 관점과 확연히 다른 점은, ‘우리는 미국과 이 정도로 근접해 있다 혹은 같아지려고 노력한다’는 번역이 아니라, 미국의 경험을 상대화하면서 한국 상황을 중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맞는 풍부한 사진과 삽화, 한국어 참고 문헌들이 각장 마다 빼곡히 수록되어 있다. 여성 건강에 대한 의학서이자 몸에 관한 정치학, 문화인류학서인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여성들과 독자들이, 철저히 소비재가 되고 있는 의료 서비스에 대해 용기 있는 문제 제기 집단으로 세력화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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