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문학’의 새벽이 열리다
  • 이문재 (moon@sisapress.com)
  • 승인 2005.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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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처음 열린 ‘민족작가대회’ 참관기/남북 문인들, 모국어는 ‘하나’ 확인

 
무심결에 방북증이라고 말해왔는데 출발 직전 받아보니 ‘방문증명서’였다. 지난해 8월 방북 교육을 받은 이후 1년 가까이 기다려온 ‘비자 아닌 비자’였다. 여권과 똑같은 크기. 발행인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장관이 아니라 통일부장관이었다.  방문 목적은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참석. 방문기간 2005.07.20~2005.07.25.

나에게도 북한 방문증은 처음이었지만, 신문학 100년을 넘긴 한국 문학 처지에서도 실로 오랜만에 받아든 것이었다. 해방 직후 남과 북의 문인들은 분단을 막기 위해 1945년 12월13일 서울에서 만나 전국문학자대회를 열기로 합의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두 세대, 60년이 흘렀고 세기가 바뀌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적극적으로, 전면적으로, 또 급격하게 달라졌다. 남과 북은 달라야 했다. 둘 사이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다른 것이 옳은 것이었고 같은 것은 그릇된 것이었다. 동질감은 금기였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저 금기에 스러져 간 목숨이 얼마나 많았던가.

저 금기가 얼마나 많은 자유와 권리를 옥죄었던가. 저 금기가 겨레의 상상력을 얼마나 왜소하게 만들었는가. 국토의 분단은 곧 상상력의 분단이었다. 분단이 강요해온 금기는 내면의 검열관으로 자리 잡았다. 꿈자리까지 들어와 헤집고 다니는 무서운 검열관. 방문증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동안 1959년 이래 내 생애의 전부가 담겨 있는 분단 시대가 혈관 속을 쿵쾅거리며 뛰어다녔다.

그러나 분단 현실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인지도 몰랐다. 7월20일 오후 12시3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지 50분 만에 평양에 내려 기념 사진을 찍기 직전이었다. 말 한마디에 남과 북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북측 언론사에서 나온 사진 기자가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남측 작가들을 향해 이렇게 주문하는 것이었다. “김치가 아니고 쉰김칩니다, 자, 쉰김치이!” 긴장하고 있던 남측 작가 98명의 얼굴이 일제히 펴졌다. 대부분 평양 땅을 처음 밟은 남측 작가들은 마음놓고 웃었다.

‘쉰김치’ 한마디에 웃음보 터지다

 
‘쉰김치’라는 한마디가 분단의 거대한 둑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 같았다. 평양 공항에서 우리말은 살아 있었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거리가 없었다. 남과 북이 같은 말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관념이었는지도 모른다. 관념은 현실로 바뀔 때 엄청난 폭발력을 갖는다. 이번 대회 기간 황석영씨가 북쪽의 대표적 소설가 홍석중씨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황씨는 “모국어가 나의 조국이다”라고 말했다. 모국어. 그러니까 이번 민족작가대회는 문학 이전에, 작가 이전에, 이념과 체제 이전에 남과 북으로 갈라서 있던 우리 말이  만나는 자리였다.

인천공항에서 출발이 두 시간 늦어진 것은 짙은 안개 때문이었지만, 평양 도착 당일 오후 치러지기로 했던 본 대회는 다른 이유로 세 시간 가량 연기되었다. 해외에서 참가한 문인들의 대표성 문제 탓이었다. 당초 남북이 합의하지 않은 사항이었는데, 대회 직전 북측이 일본과 중국에서 참가한 동포 작가들을 ‘해외 대표단’으로 승격시키자고 주장했다.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에서 기다리던 작가들은 어느새 ‘쉰김치 효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쉰김치 효과는 순안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들어오면서 증폭되었다가 이내 잦아들곤 했다. 청량음료를 파는 노점(푸른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천막 디자인이 매우 세련되어 있었다), 남새(채소) 상점, 식료품 상점, 양복점, 사진관, 공중전화 부스 등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하나의 민족’을 떠올렸다. 하지만 건물의 이마나 옥상에 걸려 있는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구호(예컨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들이 ‘두 개의 체제’라는 엄연한 현실을 일깨웠다.

뒤늦게 개막되었지만, 본대회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문인들이 만나 남과 북을 아우르는 ‘6·15 민족문학인협회’를 구성했다. 또 이 기구를 통해 남북 문학인을 대상으로 ‘6·15 통일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하며, 남북 문인이 참여하는 문예지 <통일문학>(가칭)을 펴내기로 한 것이다.

북한 작가들, 남쪽 작품 줄줄 꿰어

나중에 전해 들은 것이지만, 이날 대회가 미루어지는 동안, 그러니까 남측 대표단들이 고려호텔에서 기다리는 동안, 인민문화궁전에 미리 와 있던 북측 작가들은 세 시간 넘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한다. 벽초 홍명희의 친손자이며 지난해 자신의 소설 <황진이>로 창비(옛 창작과비평사)가 제정한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홍석중씨에 따르면, 북측 작가들이 이번 대회에 보인 관심과 열의는 대단했다. 지병이 있는 노작가들도 만류를 뿌리치고 대회장에 나왔으며, 앞자리에 앉은 북측 작가들은 자리를 빼앗길까 봐 세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었다.

본대회가 끝나고 바로 이어진 만찬 석상. 서먹서먹함은 이내 사라졌다. 대부분 남측 작품을 꿰고 있는 북측 문인들이 말문을 텄다. 나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원탁 바로 앞에 박세옥이라는 북측의 시인이 앉아 있었는데, 통성명을 하자마자 “아, 이문재 시인, 내가 잘 알고 있지요”라는 것이었다. 6년 전에 나온 내 시집 제목이며, 몇몇 시는 그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 박시인은 1989년 무산된 남북작가회담 때 북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판문점까지 나왔던 북한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인민문화궁전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미안했다. 나는 북한의 시, 북한의 시인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다른 자리에서 만난 북한 시인들은 고 은 시인이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 행한 연설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고 김남주 시인의 시편들을 비롯해 정지아씨의 <빨치산의 딸>, 조정래씨의 <태백산맥>, 신경숙씨의 <외딴 방> 등이 북에서 많이 찾는 남쪽 작품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한반도의 핵문제를 다룬 김진명씨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많이 읽는다고 한다.

‘모국어의 시원’ 앞두고 밤잠 설쳐

이번 작가대회의 절정은 백두산 정상의 해맞이였다. 남과 북의 작가 1백50여명이 7월23일 새벽, 백두산 천지에서  ‘통일문학의 새벽’을 맞이하기로 했다. 전날 평양에서 비행기 편으로 백두산 삼지연 공항에 도착한 문인들을 환영한 것은 끝간 데 없는 고원의 숲이었다. 삼지연 공항에서 베개봉호텔로 향하는 40여분 동안 도로는 거의 비포장이었지만, 이깔나무며 가문비나무, 자작나무가 이루는 고원의 밀림은 남달랐다. 이념과 체제의 중심인 평양에서 한 시간 남짓 날아와 원시의 품이었다. 표정이 거의 없는 회색의 도시에서 진초록 자연 속으로, 일상적 언어가 불필요한 신화의 공간으로 진입한 것이다.

 
평양에서 헤어짐의 역사가 만남의 역사로 전환되었다면, 백두산에서 남과 북의 문인들은 만남의 역사를 가능케 한 모국어의 시원으로 거슬러올랐다. 몇백 년 전까지만 해도 용암을 분출한 휴화산 아래에서, 5천년 겨레의 신화를 간직한 백두산에서, 인류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스스로 자연이었던 백두산 천지에서, 분단 60년은 하찮은 인간의 역사인지도 몰랐다. 백두영봉 코앞에서 남과 북의 작가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7월23일 오전 2시30분. 작가들은 버스에 올라 두 시간 남짓 북으로, 위로, 동이 트는 새벽으로, 한반도의 정수리로, 신화의 둥지로, 모국어의 시원으로 달렸다. 천지로 향하는 길 오른쪽은 동쪽. 두만강이 첫걸음을 떼기 시작하는 천리천평일 것이었다. 왼쪽 계곡 아래로는 천지의 물이 사기문폭포·백두폭포·형제폭포를 타고 내리며 쉬지 않고 압록강을 적시고 있을 것이었다. 무두봉(해발 1930m)을 지나서 얼마나 되었을까. 짙푸른 하늘 아래 연한 분홍으로 터오는 여명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가 문득 서쪽을 바라보니, 보름달이 떠 있었다. 지는 달과 뜨는 해.

 
천지로 오르는 길은 연신 급한 커브였다. 차창 앞으로 먼동이 보였다가 달이 떠 있는 서쪽 하늘이 보이곤 했다. 이윽고 장군봉 아래 개활지에 도착했다.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천지는 맑았다. 맑아도 여간 맑은 것이 아니었다. 일출 직전, 천지는 자신의 전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물안개 한 자락 없었다. 천지는 ‘예까지 왔으니, 두 눈 부릅뜨고 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천지를 에워싸고 있는 연봉들도 자신의 윤곽을 날카롭게 벼려놓고 있었다.

천지는 상상한 것보다 컸다. 천지는 크고 넓고 깊고 깨끗했다. 장엄하고 단호했다. 천지는 넘치지 않는 풍요였고, 흐르는 고여 있음이었다. 함부로 곁을 내주지 않는 넉넉함이었다. 나는 천지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지만, 천지는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잘못을 빌어야 할 것만 같았다. 천지 앞에서 나는 다짐하기보다는 뉘우쳐야 할 것만 같았다.

천지에서 돌아서자, 운해가 해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저 운해 아래로 백두대간이 힘차게 내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운해에서 고개를 돌리자, 천지 왼쪽 어깨 위로 달이 아직 떠 있었다. 해와 달이 백두산 천지를 향해 꼭지점을 이루는 지점에서 ‘통일문학의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60년 만의 해맞이는 남과 북의 작가들이 평양에서 작성한 공동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5박6일 백두산·묘향산 보는 일정 전무후무”

‘첫째 우리 민족작가들은 6·15 공동선언을 조국 통일의 유일한 이정표로 삼고 이를 견결히 옹호하고 끝까지 고수할 것이다. 둘째, 우리 민족작가들은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 아래 민족자주, 반전 평화, 통일 애국의 정신으로 문학 창작에 매진할 것이다. 셋째, 우리 민족 작가들은 사상과 신앙, 출신 지역과 입장을 넘어 굳게 단합하며 민족문학 활동에서 연대와 연합을 더욱 활성화해 나갈 것이다.’

고 은 시인은 전날 삼지연에서 쓴 시 ‘다시 백두산에서’를 낭송했다. 시집 ‘<백두산>’을 발표한 바 있는 고은 시인은 남과 북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천지의 새벽에 두 발 딛고 서서, 한반도의 어제와 오늘을 둘러보고, 민족의 내일을 내다보았다.

 
고 은 시인은 ‘오늘 새벽 4시 백두 영봉/정수리에 꽂히듯 올라/내 조국 전체를 깡그리 바라보며 바람부른다//기뻐라/기뻐 어쩔 줄 몰라/어흥 호랑이 울음 운다/숨지 못해 젖어든 내 눈동자/열여섯 소년 그 시절의 그것/여기 백두 열여섯 봉우리에/내 핏줄 걸어 바라본다//내 몸 여기저기/박힌 못들이/다 빠졌다’라며 외치듯 노래했다. 백두산에서 <빨치산의 딸>의 작가 정지아씨의 목소리로 다시 듣는 고 김남주 시인의 시 <조국은 하나>도 감격적이었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남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백두산에서 내려온 7월23일 오전, 삼지연에서 발이 묶였다. 오전까지 평양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는데, 평양이 다시 안개에 갇혔다고 했다. 이날 오후, 대회는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육로로 이동해 밤늦도록 ‘민족문학의 밤’을 갖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첫날 본 대회에 이어 백두산 시낭송회가 민족 문학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강조했다면, 묘향산의 밤은 그야말로 남과 북의 작가들이 ‘넥타이’를 풀고 마주 대하는 친교의 시간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백두산과 달리 평양의 날씨는 대회를 도와주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린 끝에 오후 늦게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출발할 때,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결국 묘향산에서 남북 작가들은 ‘문학의 밤’을 갖지 못했다.

나는 묘향산 보현사에 대해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상원암까지 올라갔다 오는 일정이 평양 안개 때문에 취소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남북의 작가들이 모국어로 만나는 것 못지 않게, 남과 북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데 불교가 커다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북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유형 문화재의 대부분이 불교 관련 유적이었다. 마침 남측 대표단 가운데 동국대 홍기삼 총장(문학평론가)이 참가하고 있는 데다, 보현사에서 예불을 드릴 계획이라는 소리를 미리 들은 터였다. 하지만 북쪽 불교는 남쪽 불교에 견줄 때 아직 ‘불교 이전’이었다. 몇년 전과 달리 삭발을 하고 가사 장삼을 착용했지만, 남쪽 불교와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극소수 복원해놓은 사찰 건물은 목재가 아니라 시멘트로 지어져 있었다. 단청도 천연 재료가 아니고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려 했던 휴정을 기리는 사당 수충사는 초라해 보였다. 천년 고찰 보현사는 북측이 성역화한 국제친선관의 빛에 가린 그늘처럼 보였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해 놓은 국제친선관이 북한 최고의 ‘유형 문화재’로 보였다. 국제친선관의 관리와 운영만큼은 세계적 전시관 수준이었다.

열 개의 차이보다 하나의 동질성에 주목

묘향산에서 평양으로 돌아오는 두 시간 남짓, 차창 밖 북녘의 산하는 푸르렀다. 시야 끝으로는 높은 산이 보였지만, 평양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고속화도로 양켠은 대부분 평야였다. 낮은 구릉들은 물론 경사가 제법 있는 산비탈들도 대부분 밭이었다. 경지 면적을 늘리느라 개간에 치중한 정책이 가뭄과 홍수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간간이 소년단이나 청년단이 조성한 인공림이 보였다.

 
청천강 줄기를 따라 달리는 동안, 도로 양쪽으로 두 벌 김매기가 끝났을 논이 끝없이 펼쳐졌다. 일요일인데도 논과 밭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소설가가 “저 정도 들판이면 식량 걱정 없겠는데”라고 말했다. 두 눈으로 보이는 평안도의 들녘은 평안하고 풍요해 보였다. 일률적인 형태의 농가 건물이 없었다면, ‘농업전선은 주공전선 총집중’이라는 구호가 보이지 않았다면, 청천강 유역의 산천은 남쪽에서는 더 이상 찾기 어려운 ‘고향의 풍경’이었다.
위압적으로 솟은 고층 아파트가 없었고, 땅을 뒤덮은 비닐하우스도 없었다. 두 시간 동안 고속화도로를 달리는 동안 마주 달려오는 차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진 땅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야 어떻든, 7월 하순, 북의 들녘은 온통 온전한 초록이었다. 평북의 산하는 고스란해 보였다. 평안도의 준평원은 소와 달구지의 시대였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행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불행이겠지만, 아직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만찬을 겸한 폐막식은 다시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렸다. 간단한 폐막 연설이 끝나자, 만찬장은 이내 들썩거렸다. 곳곳에서 ‘위하여’를 외치며 건배를 했고, 자리를 옮기며 인사를 나누는 남측 작가들도 많았다. 북측에서는 “5박6일이란 기간에다 백두산·묘향산을 둘러보는 일정은 전무후무하다. 김정일 장군님(국방위원장)께서 이번 대회에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혔지만, 그런 북측이든 남측이든 서로 아쉽기만한 표정이었다.

만찬장에서 만난 북의 젊은 여성 시인 박경심씨(36)는 대회 첫날 처음으로 남측 작가들을 보았을 때 이방인처럼 보였다고 했다. 박씨는 그러나 “분열의 60년보다 이 며칠이 더 길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은 눈빛으로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말이 필요없었다. 이 대회가 고맙다. 참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폐막 만찬장에서 북의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가는 데 또 60년이 걸린다면 죽고 말 겁니다.”

7월25일 오후 4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고려민항 615편에 올랐다. 멀어져 가는 북녘의 산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난 5박6일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차이보다는 동질성을 보기 위해 애썼다. 열 개의 차이보다 하나의 동질성을 주목하려고 했다. 모국어는 하나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대회는 60년 만의 만남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남과 북의 문학은 아직 대칭적·수평적 관계가 아니다. 비대칭, 기우뚱한 수평이다. 남쪽 작가들이 모국어를 강조한 반면, 북의 작가들은 6·15정신을 내세웠다. 개별적 자아로서 스스로 하나의 ‘공화국’이기를 자처하는 남측 작가들과 공화국 안에서 사회적 자아로서 실존하고 기능해야 하는 북측 작가들이 서로 접점을 만들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5박6일 동안 남과 북의 작가들은 그야말로 ‘상봉’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극장’ 안에서.

남쪽으로 돌아온 나는 당분간 함께 북에 다녀온 동료 작가들을 만나지 않을 참이다. 두 가지 이유이다. 우선, 북에서 보고 느낀 바가 나와 똑같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느낀 바와 너무 다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평양을 떠나기 직전, 민족작가대회 남측 대표단은 기자회견을 갖고 내년 6월, 2차 대회를 서울에서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 남한 방문증을 받아든 북한의 젊은 시인은 과연 어떤 심경으로 남행길에 오를까. 한라산 백록담, 아니 간판과 광고판이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 한복판, 자본주의의 극장 안에서 두 손을 부여잡고 캐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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