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수난 시대
  • 장영희 전문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5.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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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과 삼성이위기에 직면했다.민노당과 시민단체들은지배 구조 탓에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이회장과 삼성은 ‘X파일 국면’을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7월26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 제품 비교 전시회를 찾았다. ‘X파일’ 사건이 수면에 불거진 지 5일 만에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이회장은 디자인·브랜드 같은 소프트 경쟁력을 높여 삼성을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고 한다.

다음날 삼성그룹 사장단도 정례 간담회인 수요회의에서 상황이 어려울 때일수록 경영에 전념하자고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회장과 삼성 사장단의 이 ‘조용한’ 행보를 재계 관계자들은 X파일 사건이 삼성그룹에 몰고온 파장과 동요를 막기 위해 부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X파일 파문은 삼성의 불법 자금 제공 의혹을 넘어 기아자동차 연루 의혹으로까지 번지는 등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아졌다.

삼성측은 7월25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X파일 사건에 대한 첫 반응이었지만,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못했다. 사과 주체가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일 수 있는 임직원 명의였고 사과의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던 것이다. 삼성측은 “사과는 도청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한 입장 표명이다”라고 밝혔다.

흥미로운 대목은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의 한 임원이 ‘(녹취록 보도 가운데)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이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두 사람(이학수·홍석현)의 대화가 대화로 끝나고 실행되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 합계로 (자금) 제공 액수가 얼마라고 나오는 부분’을 예로 든 것이다. 삼성측이 적어도 두 사람이 만나 자금 제공 관련 얘기를 했다는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회장과 이회장을 보좌한 핵심 인사들이 최대 위기에 직면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설령 권력 기관의 불법 도청 결과물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1997년 당시 이학수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대화 내용은 한국 사회에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킬, 아니 이미 일으키고 있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18개 시민·사회·교수 단체들은 7월27일 ‘정·재·언’ 유착 관계 규명이 X파일 사건의 본질이라며 검찰을 향해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들은 한나라당 등 정치 세력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 등이 이 사안을 불법 도청 문제로 몰아가 본질을 흐리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들은 삼성의 행위가 권-언·정-경·법-경 유착을 도모한 악행이므로 최우선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며, 이회장의 지시 혹은 공모 여부가 반드시 수사되어야 한다고 이회장을 정조준했다.

이회장은 과연 X파일 국면을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을까. 7월26일부터 그룹 심장부인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앞은 항의 행렬로 시끄러웠다. 2백22개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언론개혁국민행동은 삼성의 태도를 규탄하고 관련자 구속 수사를 촉구했다. 이 날 ‘이건희를 구속하라’는 민주노동당원의 피켓도 등장했다. 이 당의 심상정 의원도 “삼성이라는 절대 권력, 이 추악한 검은 커넥션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이번에야말로 삼성 이건희 회장을 청문회에 세워야 한다”라면서 이회장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삼성측이 재차 강력한 법정 대응 방침을 밝힌 이후  언론에서 ‘이건희 회장 처벌될까’ 따위의 기사들은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아직 그가 안전지대로 옮아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이건희 회장 등의 업무상 배임·횡령 혐의를 확인하는 결정적 부분을 수사하지 않고 은폐한다면 검찰은 자본 권력의 시녀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라는 참여연대의 으름장을 빼놓더라도 X파일의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기를 기대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문화일보>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TN소프레스에 의뢰해 성인 7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한 예다. X파일이 불법 자료라 할지라도 관련자의 위법 행위를 수사해야 한다(77.9%)는 응답이 수사할 필요가 없다(19.0%)는 의견보다 네 배 가량 높았던 것이다.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예단할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회장이 수사 선상 자체에서 완전히 빠지기는 어렵다는 것이 재계나 검찰 주변의 관측이다.

회장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해 왔으나…

드러난 것만 해도 삼성은 1980년대부터 2002년 대선까지 총 8백65억원을 대통령이나 대통령 후보에게 건넸다. 이회장이 불법 정치자금 제공과 관련해 기소된 것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제공한 100억원 뇌물 건이 유일했다.(그는 다음해 집행유예를 받았고 몇 달 후 사면되었다). 만약 녹취록의 내용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이번에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공산을 배제할 수 없다. 한 재계 관계자가 ‘딱 걸렸다’고 표현하듯이 이회장의 지시를 암시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치자금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삼성측은 한사코 ‘회장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전면 부인해왔다.

 
녹취록 관련 보도들에 따르면, 삼성 수뇌부는 대선을 앞두고 사실상 능동적으로 자금을 지원했을 뿐더러 그들의 이해 관계에 중요한 사람들을 관리해 왔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사실 그동안 삼성그룹이 전방위로 유관 인사를 관리해 왔다는 것은 재계의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삼성은 왜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은 “편법·탈법에서 비롯한 경영권 세습과 지배 구조와 관련한 법률적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서였다”라고 주장했다. 심상정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삼성이 정·관계, 검찰,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에 인맥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절대 권력화하고 재벌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최근 불거졌던 ‘삼성공화국’ 논란부터 들추어낼 필요가 있다. 지난 5월25일 삼성 밖에서 나돌던 삼성공화국 논란이 사장단 간담회에서 정식 의제로 논의되었다. 이회장이 ‘삼성의 독주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겸허하게 듣고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해 보라’고 제안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삼성공화국 의제로 6월1일 한 차례 더 간담회가 열렸는데 이들의 결론은 그동안 삼성공화국을 비판한 사람들과 간극이 실로 컸다. 사장단은 삼성경계론의 실체를 삼성이 너무 커진 데 따른 박탈감으로 규정했고, 이 비판 세력이 단 1%에 불과하지만 이들을 겸허하게 포용해 진정한 국민 기업이 되겠으며, 그러기 위해 상생과 나눔 경영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김상조 교수는 “삼성은 비판 세력이 단 1%라는 오만함부터 버려라. 삼성공화국 비판은 삼성전자의 성과를 시기하는 것도 아니고 성장을 억제해야 하겠다는 반시장적 정서 표출도 아니다. 삼성전자는 더욱 성장해야 하며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이라는 기업집단이 경제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차원을 넘어 경제 환경을 왜곡하고 오염시키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국민 경제의 활력을 죽이는 권력자로 변모한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입법· 행정·사법·언론·대학 같은 한국 사회의 감시·견제 메커니즘을 무력화하는 행태를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은 한국 최대 기업집단이다.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절대적 위상은 몇 가지 지표가 웅변하고도 남는다. 지난해 말 현재 삼성그룹이 10대 그룹에서 차지하는 매출과 순이익 비중은 각각 30.4%(1백35조5천억원) 34,8%(15조7천억원)에 달했다. 수출과 시가총액 비중도 22%(5백27억 달러) 23%(91조원)에 달해 한국 경제계는 가히 삼성그룹 독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런 경제적 영향력 탓일까. 한 경제 전문가는 삼성이 정부 정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견인하고 있다고 평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사람들은 정책을 ‘발신’한다고 표현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2003월 2월 대통령직인수위에 <국정 과제와 국가 운영에 관한 어젠다>라는 연구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 대표적 예다. 노대통령 핵심 참모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이 보고서는 70 ~80명의 연구진이 참여했고 분량도 4백 쪽이 넘었다.

 
사실 노무현 정부가 강조했거나 추진한 정책인 ‘2만달러론’ ‘산업 클러스터’ ‘동북아 중심 프로젝트’는 이미 삼성이 보고서를 냈거나 비슷한 시기에 주장했던 사안이다. 이뿐만 아니다.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의 삼성 배우기 열풍도 불었다. 금융감독원·기획예산처·국무총리실 등은 삼성경제연구소가 주관하는 특별 연수를 받았다.

법적 문제 야기한 3세 승계 구도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삼성의 영향력은 경제력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삼성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집단에 끊임없이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있다. ‘시장 우위’라는 대통령의 말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부가 특정 기업을 지원할 수단도 이미 없어졌고 그것을 기대할 필요도 없는 삼성이 무리수를 두는 것은 오직 한가지 지배 구조 때문이라고 재계나 학계 일각에서는 주장했다. 현재의 지배 구조를 유지하고 그것을 3세에게 넘기기 위해 삼성이 전방위 로비를 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는 1995년 60억8천만원을 증여받아 16억원을 증여세로 내고 남은 44억8천만원을 몇 단계 굴려 삼성에버랜드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이재용→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승계 구도가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승계 구도는 삼성가나 구조본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법적 문제를 야기했다. 이 법률적 위험은 지난해부터 부쩍 삼성그룹을 강타하고 있다. 우선 2003년 말 삼성에버랜드는 금융업 관련 자회사인 삼성생명 주식(19.34%)의 장부가액이 회사 자산 총액의 50%를 넘어 금융지주회사 요건을 갖춘 것이 참여연대에 의해 2004년 4월 드러났다. 공정위가 즉각 1년 안에 금융지주회사법 위반 상태를 해소하라고 명령하자 삼성측은 지난해 6월 투자유가증권 평가익 처리 기준을 변경해 일시적으로 법 위반 상태를 벗어났다.

하지만 삼성생명이나 삼성전자의 주식 가치가 높아지면 또다시 법을 위반하는 상황에 빨려들 수밖에 없다. 급기야 지난 5월 에버랜드는 전격적으로 삼성생명 보유 지분 평가방식을 지분법에서 원가법으로 변경해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지분율이 20% 미만이라도 ‘중대한 영향력 행사 범위’에 해당되는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금융산업의구조개선에관한법률(금산법) 24조(동일 계열 금융기관의 다른 회사 주식 소요 제한)도 마찬가지다. 재벌이 계열 금융기관의 돈, 다시 말해 고객 돈을 총수의 경영권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데 쓰는 것을 막는 장치인 이 조항을 삼성생명은 1997년 3월 법 발효 시점부터 위반했다. 삼성전자 주식을 한도를 초과해 소유하고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2004년 이후 최근까지 삼성전자 주식을 특별계정상품(변액보험)으로 추가 취득해 또다시 금산법을 위반했다는 것이 지난해부터 논란이 되었다. 삼성카드도 1998년 에버랜드 주식을 금감위 승인 없이 한도를 초과해 인수했다.

최근 국무회의 의결을 둘러싼 논란은 삼성과 정부에 대한 비판을 극에 달하게 했다. 재경부가 2004년 11월 입법 예고안에 비해 부칙 조항을 대폭 추가해 삼성생명과 삼성카드의 금산법 위반 행위를 사실상 합법화해 주면서 이것이 국회에서 재논의하는 것으로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칙은 앞으로 국회에서 박영선 의원 등이 발의한 금산법 개정안과 일대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다.

기업집단을 규율하는 유일한 법인 공정거래법 11조(계열 금융기관의 의결권 제한)를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삼성은 2006년부터 3년 동안 5%씩 줄여 현행 30%에서 15%로 낮추는 의결권 제한 조항이 자신들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국회를 통과하자 이것을 지난 6월 헌법재판소에 끌고갔다. 위헌 소송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금융자본이 산업자본 지배하는 구조가 탈?

공정거래법 11조나 금산법 24조, 금융자주회사법 상의 각종 규제들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분리라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질서의 근간과 관련되어 있다. 또 이 사안과 충돌을 빚는 재벌은 삼성이 유일하다. 변칙 세습 공격을 잘 방어해온 삼성이지만, 이 규제의 그물망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는 독특한 지배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 지배 구조는, 이재용→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 사슬이 핵심이다. 그 연결 사슬 하나하나에서 첨예한 법적 논란이 지난해부터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법률적 논란을 완전히 종식하는 길은 삼성가가 금융과 산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현행법상 양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업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는 삼성가가 그토록 무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배 구조 때문이라는 것을 이번 X파일 사건이 그 일단을 드러냈다. 결국 법률적 위험을 거세하기 위한 ‘지배구조 홍역’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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