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보다 수성이 더 쉬워?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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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재벌 신화/전문경영인은 악역으로 몰리기 일쑤
 

세상이 바뀌면 드라마도 바뀌는 것일까. 1990년대까지 기업 드라마는 <야망의 세월><TV손자병법><미스터 큐> 등 샐러리맨 신화를 담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외환위기와 더불어 이제 샐러리맨 신화는 시효를 다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업 드라마는 재벌 신화를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재벌 신화 중에서도 창업 신화보다 수성 신화를 더 선호한다. 기업을 세우느라 곁눈질할 겨를이 없는 창업주보다 풍요하게 자라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벌 2세가 훨씬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재벌 2세를 소재로 하면 고가 상품의 PPL에 유리하다).

기업의 흥망성쇠와 관련해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이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수성이 더 쉽게 그려진다. 재벌 2세가 나오는 드라마의 '수성 신화'는 일정한 공식을 따른다. 젊은 후계자가 있다. 그러나 그는 창업주에 반발해 보헤미안적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회사의 위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경영을 맡게 된다. 숨은 재능을 발휘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 과정에서 재벌 2세는 평범한 여성을 만나 신분 상승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 이것이 <파리의 연인>이나 <오 필승 봉순영> 등 재벌 2세가 나오는 트렌디 드라마가 따른 공식이었다.

재벌 2세 위주로 그려지는 트렌디 드라마에서 유탄을 맞는 사람은 전문경영인이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샐러리맨 신화를 그릴 때 악역은 재벌 2세의 몫이었지만 이제 그 역할은 전문경영인에게 돌려졌다. 재벌 드라마에서 전문경영인은 ‘창업자가 피와 땀으로 일궈낸 기업을 날로 먹으려는 악한’으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철저하게 혈통주의를 따르는 이런 드라마는 몸속에 뭔가 다른 유전자가 있는 창업주의 자식에게 승계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제목을 비롯해 드라마의 설정이 협찬사를 노골적으로 간접 홍보하고 있어서 비난을 사고 있는 SBS <루루공주> 역시 재벌가를 소재로 하고 있다. 루루공주(김정은 분)라는 재벌가의 상속녀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루루공주는 ‘수표 한 장은 갚아야 한다’는 말에 ‘100억만 갚으면 되느냐’고 통 크게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루공주>가 현실의 재벌을 닮기 위해서 다양한 설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씨 가문과 김씨 가문이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는 드라마 속 KU그룹은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이 공동으로 경영했던 LG그룹을 연상시킨다. 또 남편의 기업을 이어받아 리조트 개발 회사를 운영하는 장여사(윤소정 분)는 현대아산그룹 현정은 회장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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