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다
  • 이욱연(서강대 중국문화과 교수) ()
  • 승인 2005.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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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김형경의 신작 소설 <외출>을 두고 말들이 많다. 김형경이 허진호 감독이 아시아 한류 시장을 겨냥하여 제작한 영화 <외출>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소설을 썼다. 지금까지 통례로 보자면, 대개 원작 소설을 토대로 이것을 각색해 영화로 만들어 왔다. 소설이 오리지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출>의 경우 이것이 뒤집혔다. 이번에는 영화 감독이 쓴 시나리오가 오리지널이고, 이것을 토대로 작가가 소설을 만든 것이다.

요즘 한국 소설계는 한국 경제보다도 더 심각한 장기 불황에 빠져 있다. 예전에 서울 대형 서점에서 베스트 셀러 1위를 하면 몇십만 부가 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몇만 부 넘기기도 힘들다. 그나마 팔리는 것이라고는 논술용 소설뿐이다. 어차피 문자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는 현실이기에, 소설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도 그런 인류 문명의 추세로 보자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인류 문명의 추세라는 것이 한국 소설계에는 더욱 가혹하게 몰아치고 있다. 최근 몇년간 베스트 셀러 자리를 외국 소설이 점령하면서, 꾸준히 독자들에게 환영받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소설의 현실은 초라하다. 한국 문학의 자존심이라고 할 정도로 문학적 수준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이고 독자들에게도 환영을 받았던 <이상 문학상> 수상 작품집도 예전 명망을 완전히 잃었다. 시에 이어 소설마저도 소설가와 평론가 같은 동업자들끼리 돌려 읽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극단적인 우려마저 나온다. 

<외출>은 이런 초상집에 불을 지른 셈이다. 문학과 영화가 만나는 새로운 실험이라고 적극 옹호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비판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문학이 영화에 밀려나고 있는데, 이번 일은 이제 문학이 죽었다는 것, 소설이 죽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출판사도 아니고 그동안 문학에 대한 순결성을 내세워 왔던 문학과지성사가, 더구나 대중 작가도 아닌 김형경이 이번 작업에 참여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도 하고, 소설가 스스로 소설에 자해를 가했다고 분노하기도 한다.

“문지가, 김형경이 저럴 수 있는가”

물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더니, 원작 소설을 가지고 영화로 만드는 것은 되지만, 영화 시나리오를 가지고 소설로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문학이 죽었다고, 문학이 장삿속에 빠졌다고 흥분하는 것은 문학만이 제일이라는 문학중심주의이다. 어차피 장르가 엇섞이고 통합되는 추세로 보자면 영화와 소설이 만나 서로 몸을 섞는 일은 앞으로 더욱 흔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소설이 먼저이고 영화가 뒤라는, 오랫동안 소설이 차지해온 오리지널에 대한 우선권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게임과 영화와 소설 등 갖가지 예술 장르들이 뒤섞이면서, <외출>과 같은 일은 앞으로도 자주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 <외출> 파문이 못내 씁쓸한 것은, 한국 영화에 비해 서사를 찾지 못한 채, 이야깃거리를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지금 우리 소설계의 가난한 처지 때문이다. 대개 영화가 소설에서 탐을 내는 것은 서사다. 그래서 영화는 소설의 주무기인 서사를 빌려 자신의 주무기인 이미지와 결합해 새로운 자기 세계를 만든다. 그런데 이제 소설이 영화에서 서사를 빌려오는 처지가 되었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작가들이 <삼국지> 다시 쓰기에나 몰두하고, 많은 작가들이 자기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한국 소설계의 곤궁한 처지를 이번 <외출> 파문에서 절감한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올해 52억원을 투입해 한국 문학 회생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지원을 받은 문학가도, 한국 문학도 회생하고 있다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 문학이 외국 문학에게, 영화에게 내준 영토를 되찾는 일이 갈수록 아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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