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로 끊은 ‘빅딜 대작전’ 누가 막으랴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5.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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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이번에는 ‘임기 단축·2선 후퇴’ 카드까지 내놓았다. 대통령이 이처럼 ‘대연정 드라이브’의 속도를 높이는 속내는 무엇일까.

 
1년 3개월 만에 청와대 만찬에 초청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메뉴가 뭐가 나왔는지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권력을 절반 내놓겠다’고 했다가 ‘권력을 통째로 내놓을 수도 있다’고 한 단계 올렸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에는 ‘임기를 단축하거나, 2선으로 후퇴할 수도 있다’며 또 한 단계 충격의 강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만찬에 참석했던 한 초선 의원은 “대통령이 1시간 30분 가까이 얘기하는 동안 단 한 사람만 연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음을 터뜨렸을 뿐, 나머지 참석자들은 내내 어두운 표정이었다”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그가 말한 단 한 사람은 유시민 의원이다.

만찬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뒤풀이 자리를 가졌다. 술 한잔 하지 않고는 도저히 집에 들어갈 기분이 아니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중론이다. 이들은 뒤풀이 자리에서 대통령 발언의 ‘진의’를 놓고 갑론을박했다고들 한다. 참석자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이 날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대통령의 90분 강의를 통해  확인한 대목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 노대통령이 정말 대통령 직을 내놓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점이다. 대다수 참석자들은 노대통령이 선거구제 개편에 올인했다는 점을 새삼 절감했다고 입을 모았다. 개헌을 위한 사전 정비 작업이니 뭐니 하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지만, 일단 최종 목표는 선거구제 개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목숨을 거는 궁극적인 이유는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이 중론이다. 수도권 출신 한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근대화의 기수, YS는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DJ는 한반도 평화 정착의 물꼬를 튼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듯이, 노대통령은 ‘망국의 근원인 지역주의를 극복해낸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치 개혁이니 권력 분점이니, 노대통령이 그동안 추진해온 몇 가지 자랑거리가 있지만, 지방 분권·공기업 분산 등에 이은 화룡정점으로 ‘지역구도 극복’을 역사적 과업으로 여기고 있다는 얘기다. 호남 출신인 한 의원은 “대통령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가장 신경쓰는 것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느냐라고들 하더라.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경제에 올인해서 성장률 1%를 올린다고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겠는가! 그런 맥락에서 보면 대통령이 왜 이렇게 선거구제 개편에 집착하는지 이해된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에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대통령 직도 얼마든지 던질 수 있으리라는 짐작이다.

내년 10월 대통령직 사퇴’ 시나리오 돌아

대통령의 2선 후퇴나 조기 사퇴와 관련해 요즘 여권에는 이런 시나리오가 돌아다닌다. “①한나라당이 대연정과 선거구제 개편에 동의하면, 대통령은 거국 내각이나 한나라당이 구성한 내각에 전권을 주고 2선 후퇴한다. 필요하다면 탈당도 할 수 있다. ②한나라당이 끝내 선거구제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내년 지방 선거가 끝난 후 시한을 정해놓고 사퇴 의사를 밝힌다. 한나라당이 그 시한 내에 선거구제 개편에 응하면 늦게나마 ①번의 길을 가고, 아니면  대통령은 사퇴하고 60일 내에 대선을 다시 치른다. 이 경우 한나라당은 지역주의 안주 세력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고, 대통령은 비록 실패했지만 지역주의에 맞서 대통령 직까지 내놓은 역사적 인물로 기록된다.”

이 시나리오는 여당 내 기획통으로 불리는 한 의원이 8월29일 경남 통영 연찬회 때 처음 소개했는데, 그때만 해도 ‘설마’ 하던 의원들이 다음날 청와대 만찬에서 대통령의 ‘사퇴 불사’ 의지를 재확인한 후에는 ‘그럴듯하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지방 선거 후 대통령이 사퇴 시한으로 못박을 시점은 대략 내년 10월이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청와대 만찬에서 느낀 두 번째 소감은, 대통령이 선거구제 개편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 스스로 권력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은 이미 공표한 것이고, 여야 의원과 대권 주자들, 그리고 호남 지지 기반의 희생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감지했다는 것이다.

의원들의 희생은 동반 사퇴를 의미한다. 만에 하나 노대통령이 지역구도 극복이라는 명분을 걸고 대통령 직을 던질 경우, 의원들만 임기를 다 채우겠다고 버티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의원과 만찬을 한 다음날인 8월31일 언론사 논설·해설 책임자와의 간담회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를 맞출 필요도 있다”라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조기 총선도 맞물리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 비례대표 의원은 “내가 4년 계약직인 줄 알았는데, 2년 반 또는 3년 계약직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좌진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통보했다”라고 농반 진반으로 말했다. 다른 한 비례대표는 지역구 고민까지 털어놓았다.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총선에 출마할 지역구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마음이 바빠졌다는 것이다.

차기 대권 주자들, 특히 열린우리당 대권 주자들도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여당 의원들은 아무리 보아도 노대통령이 정권 재창출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렇게까지 지지도나 민심을 도외시하겠느냐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개헌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고이즈미나 슈뢰더 총리가 부럽다

 
는 식으로 내각제 선호 발언을 자주 하는 것도 대통령 한번 해보겠다는 차기 주자들 처지에서는 마뜩치 않은 일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만찬 때 김근태 장관은 앞줄 맨 구석 테이블, 정동영 장관은 의원이 아니어서 그런지 뒤쪽 제일 구석진 자리를 배정받았다. 대통령이 차기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 의원은 친노 직계로 분류되는 한 의원이 최근 한 친노 그룹 모임에 나가 ‘노대통령이 차기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런 기류 탓인지 차기 대권 주자 진영은 앞으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날 만찬 자리에서 참석자들이 특히 충격을 받은 대목은 바로 대통령의 호남 관련 발언이다. 이 날 대표 발언자로 나선 송영길 의원은 “노대통령이 부산 선거에 출마했을 때 DJ가 지역등권론을 주장해서 노대통령이 피해를 보지 않았느냐. 마찬가지로 한나라당과 연정을 얘기하면 호남 지지층이 등을 돌리게 된다”라는 취지로 연정에 반대하는 뜻을 표명했다. 그러자 노대통령은 “호남에서는 피해를 좀더 봤으면 좋겠다”라고 반박했다. 한 지역에서 한 정당이 독식하는 것은 호남에서도 문제이고, 호남에서 무너져야 영남에서 더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선거에서 떨어질 수도 있지, 한 지역에서 계속 당선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느냐”라는 대목에서는 호남 의원들의 표정이 아주 굳어졌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대통령이 자기 권력은 물론이고 국회의원의 임기, 여권의 주된 지지 기반까지 희생할 각오를 내비치자, 그동안 ‘도대체 대통령의 뜻이 무엇이냐’며 혼란스러워하던 여당 의원들은 오히려 후련해졌다는 반응이다. 대통령의 뜻에 공감하고 안 하고를 떠나 이제 대통령의 의지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의원, 적극 찬동파·관망파로 갈려

이에 따라 여권 내부는 대통령 뜻을 적극 따르든지, 아니면 당분간 지켜보든지 두 갈래 흐름으로 나뉘고 있다. 대통령 뜻을 적극 따르자는 쪽은 유시민 의원을 필두로 한 참정연과 정청래 의원이 주도하는 국참연, 그리고 청와대 출신 의원들로 구성된 친노 직계 그룹이다. 유시민 의원은 이미 각종 인터뷰를 통해 총대를 메고 나섰고, 9월2일부터 1박2일간 전국 운영위원회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한 참정연도 대통령의 뜻을 적극 전파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국참연과 친노 직계들로 구성된 의정연도 조만간 ‘무엇을 할지’ 논의할 계획이다.

이에 반해 당내 386 그룹과 재야파, 호남 출신 의원들은 일단 지켜보자는 분위기다. 지금까지는 적극적으로 연정에 반대한다는 뜻을 피력했지만, 대통령의 뜻이 워낙 완강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해서다. 한 386 의원은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 자기 직을 걸고 뭔가를 하겠다는데 그걸 막을 힘이 있나. 대권 주자들이라도 똘똘 뭉친다면 모를까, 당분간은 상황이 흘러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끌려가지만은 않을 분위기다. 지금이야 지역구도 극복이라는 명분에 밀려 있지만, 대통령이 뭔가 허점을 보이거나,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여론이 세를 얻을 경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가능성도 적지 않다. 특히 호남 출신 의원들은 부글거리는 속이 몹시 버거운 모양이다. “지켜봐야지” 하면서도 “5·18 가해 세력과 어떻게 연정을 하자는 것이냐” “연정을 하면 책임도 함께 지고 선거 공조도 함께 해야지 연정이 무슨 1회성 쇼냐” “90% 이상 노무현을 지지한 호남이 결국 죄라는 얘기냐” 하는 불만이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여당에서 탈당자가 나온다면 이 역시 호남 출신이 1호가 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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