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쇠가 주인 노릇 했으니…
  • 장영희 전문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5.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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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규 전 현대 부회장 퇴출 ‘막전막후’/‘정윤규’ 된 양 행동한 것이 결정타

 
이제는 남과 북이 ‘김윤규’를 떠나보낸 듯하다. 지난 3개월 가까이 남과 북을 자극하며 대북 사업을 위축시켰던 김윤규 파동이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10월20일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위)의 대변인 담화는 김윤규 전 부회장 퇴출에 대해 배은망덕 같은 극렬한 표현을 써가며 현대그룹을 성토했지만, 그것에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명시적으로 김씨 복귀를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북측이 현대가 ‘김윤규 문제’를 얼마나 잘못 처리했는지 장황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나열한 것은 다분히 내부용 성격이 짙어 보인다. ‘알리바이’이자 ‘사료’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아태위는 7월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현정은 회장·김윤규 부회장의 회동을 주선했는데, 현대가 한 달도 안되어 회동을 성사시킨 주역을 축출해버리자 난처해졌다고 한다. 

북측 사정에 밝은 한 대북 사업가는 “북측 강경파가 김위원장 ‘접견자’를 잘라낸 것에 반발하며 주선자인 아태를 공격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아태로서는 ‘이런 비정상적인 사태가 빚어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현대측의 그릇된 처사’라는 것을 다시 한번 부각해 내부를 달랠 필요가 있었다”라고 해석했다. 아태위 관계자들은 김윤규 비자금이 북으로도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북한 당국으로부터 조사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담화문이 내부를 겨냥한 ‘퍼포먼스’라고 읽게 하는 정황은 더 있다. 아태위는 ‘현대 상층’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현정은 회장을 직접 거명하지 않았다. 비난도 없었다. ‘현대의 원래 얼굴이 하나도 없는 현대는 현대가 아니다’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금강산 사업을 정상화할 여지를 활짝 열어놓았다. ‘현대에게도 앞날은 있고 길은 있다’며 ‘현대의 현 상층부가 민족의 지향과 대세를 똑바로 보고 바른 길에 들어서기를 기대한다’고 담화문을 끝맺은 것이다. 현대가 사과 등의 적절한 조처를 취하면 대화를 받아들이겠다는 거이다. 

지난 10월25일 리종혁 아태 부위원장이 현대측에 ‘만나자’는 통지문을 보내고 북측이 이 사실을 2~3시간 앞서 통일부에 알린 것은 예정된 순서로 보인다. 북측으로서는 김윤규 처리 사안에 대해 북측이 왜 그렇게 분노했는지를 안팎에 분명히 알려 정당한 행위였다는 명분을 얻는 동시에 실리도 꾀한 것으로 분석된다. 금강산 관광객 절반 축소는 북측으로서도 엄청난 손실이었던 것이다.

최용묵 사장 보직 사퇴시킨 두 가지 이유

 따지고 보면 김윤규 사안으로 북측이 얻은 것은 더 있다. 2000년 8월 체결한 ‘7대 협력사업 합의서’를 꺼내들며 ‘(당시) 합의 주체도 다 없어진 조건에서 구태여 그에 구속될 리유가 없게 됐다’며 독점권을 본격 흔든 것이다. 2000년 당시 현대는 도로와 철도, 전력, 통신, 수자원 개발 등 사실상 북한 전역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인 7대 사업을 수행할 역량이 있었지만, 2005년의 현대는 그럴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북이 흔들더라도 현대가 5억 달러를 들여 일구어낸 독점권을 남한이 흔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대북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독점권은 현대만이 아닌 남한의 몫이며, 북한 특수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그렇다는 것이다.

 
개성관광에 대해서도 ‘현대와는 이 사업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부득불 다른 대상들과 관광 협의를 추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며 현대를 압박했다. 개성 본관광 협상을 재개해야 하는 현대로서는 협상력 약화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북측은 1인당 관광 대가로 1백55 달러를 불렀지만, 이 수준으로는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된 북측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읍참마속의 결단이라며 이미 여러 차례 복귀 불가 원칙을 밝힌 현회장도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10월5일 이사회에서 결정한 김윤규씨 대표이사직 박탈 건을 11월22일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해 공식 의결한다는 계획도 예정대로 추진한다는 것이 현대그룹측의 설명이다. 10월22일 김씨가 중국 칭다오에서 귀국하며 몸을 한껏 낮추었지만 이 원칙은 불변이라는 것이다. 현회장이 고문 혹은 특보 등의 자격으로 김씨를 재기용하리라는, 그의 귀국 직후 무성했던 관측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회장이 김씨를 어떤 위치에서든 대북 라인에서 뺄 것이라는 데 설득력을 높여주는 것은 최용묵 사장의 보직 사퇴 건에서도 찾을 수 있다. 10월27일 현회장은 최사장을 현대엘리베이터 사장 직은 유지시키되, 다른 재벌의 구조조정본부장에 해당하는 경영전략팀장 보직은 거두어들였다. 감사보고서 유출에 따른 책임이 그 사유였고,  자진 사퇴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최사장 사퇴의 의미가 보고서 유출 건에 머무른다고 생각하는 이는 현대그룹에서도 거의 없다. 우선 11월 초 리종혁 아태 부위원장과 협상해야 하는 현회장으로서는 북측에 뭔가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북측도 내심 허용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김씨 복귀 결정을 절대 할 수 없는 현회장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해 제스처가 북측이 ‘현대 상층부에 기생하는 야심가‘라고 지목한 최사장 처리였다는 것이 현대그룹 안팎의 중론이다.

최사장 사퇴 건은 북측 다독거리기 용도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씨에 대한 감사 보고서는 유출되어 동아일보 10월1일자에 보도되었고 여기서 남북협력기금 유용 의혹이 제기되었다. 보도 직후 현대가 ‘관련 없다’에서 다음날 ‘관련 있다’로 뒤집으면서 통일부를 한껏 자극했다. 국민의 세금인 남북협력기금이 김씨 비자금으로 쓰였다는 것은 통일부로서는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이었다.

 
가뜩이나 통일부는 현대에 대한 불쾌감이 상당했다. 9월11일 정동영 장관과 현회장이 회동한 후 북한과 중재에 나서려던 통일부에 바로 다음날 현회장이 현대그룹 홈페이지에 대국민 편지를 띄워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이 사안은 현대가 감사보고서에 기술한 ‘비자금 조성액 중 남북협력기금 관련 금액이 약 50만 달러’라는 대목이 와전된 것으로 결론났다. 남북협력기금 자체를 손댄 것이 아니라 증빙이 안되는 돈을 협력기금이 들어간 공사에 연결해 회계 처리한 것으로 정리된 것이다. 하지만 통일부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 파동을 일으킨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으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현대는 감사 총책임자였던 최사장을 사퇴시킴으로써 성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김윤규 파동은 일단락된 듯하지만, 왜 개인 비리 건이 3개월에 걸쳐 남과 북을 요동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김씨가 아무리 대북사업에 상징적인 인물이라 해도 기업에서 문제 경영인이 경질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은 조용히 처리하려던 것이 문건이 유출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고 설명하지만, 문건 유출 경로부터 수상쩍다.

 누가 유출했는지는 규명되지 않았지만, 당초 현대는 국정원 현대 담당자에게 문건을 건넸다. 하지만 언론에 공개된 감사보고서는 국정원 문건과 달랐다. 이 사실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국정원에 대해 보안조사를 한 결과 드러났다. 결국 현대가 언론에 직접 흘렸거나 다른 곳에 흘린 것을 언론이 입수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다른 곳’으로 한나라당을 꼽는 이도 있다.

‘김윤규 의혹’ 감사보고서 일부러 흘렸다?

결국 김씨 건을 내부에서 조용히 처리하지 않고 드러내려 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김씨가 감사 결과에 반발하며 버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비리를 공개하는 방식으로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씨로서는 감사 결과가 부당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과잉 감사 논란도 불거졌지만, 감사보고서를 보았다는 한 현대그룹 관계자는 의혹 나열서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김부회장이 영수증 없는 돈을 많이 쓴 것은 분명하다. 공사비를 부풀리거나 허위로 꾸미는 것은 이런 증빙 없는 돈을 회계 처리하는 데 즐겨 쓰인다. 김부회장이 사적으로 유용한 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업 경영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지출도 있었을 텐데 비자금으로 통칭되었다. 김부회장 동선을 파악해 회계 처리 시점과 무리하게 연결했다는 인상도 받았다.”

감사가 시작된 시점은 지난 7월이다. 현대그룹 5개 계열사에 대한 정기 감사였다고 한다. 과연 일부의 관측처럼 ‘표적 감사’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엇갈린 증언이 나온다. 김씨와 오래 전부터 불편한 관계였던 현회장은 2003년 10월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김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탐문하며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7~8월께 현회장을 만났다는 지인이 전해준 말은 흥미롭다.  “대북 사업은 김사장에게 맡기면 되겠다고 하자 뭘 믿고 맡기냐고 현회장이 반응했다. 그래서 남편(고 정몽헌 회장)도 신뢰했던 사람 아니냐고 되묻자 현회장은 그런 사람이 가장 먼저 배신하더라고 말했다.”

반면 현회장이 김씨 축출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는 거의 정반대 증언도 나온다. 지난 3월 현회장은 당시 사장이던 김씨를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윤만준 고문을 사장으로 임명해 공동 대표이사 체제를 구축했다. 이것은 현회장이 김씨에게 견제구를 날린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때 현회장은 그의 대표이사 직은 유지시켰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의 한 임원은 “현회장은 적어도 3년(임기) 더 그를 쓰려고 했다. 감사를 벌인 것도 워낙 그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니까 조사해보라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으로 안다”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재벌 그룹의 생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감사를 걸고 넘어진다는 말도 했다. “오너가 특정 경영인을 경질하려면 나가라는 한마디만 하면 된다.”

처음부터 몰아내려 했다는 주장과 비리 건이 불거지면서 어쩔 수 없이 잘라냈다는 주장이 맞서지만, 일치하는 견해가 있다. 10월22일 김씨가 귀국하면서 언급한 ‘오너가 아니면서 오너처럼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지겠다’는 바로 그 대목이다. 고 정몽헌 회장의 유서에서 언급된 ‘진실한 자식’이라는 표현과 ‘대북 사업을 맡아달라’는 당부에 너무나 고무된 나머지 그가 마치 '정윤규'가 된 양 처신했다는 것이다. ‘대북사업 유일 창구론’을 공공연히 내세우며 근 1년여 독자 행보를 보인 것도 현회장을 몹시 자극했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의 한 임원은 “이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는데 김부회장은 완전히 망가졌다. 이런 결과가 빚어진 데에는 이 사안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 그룹측의 관리 책임이 크지만 그도 문제가 있었다. 대북 사업에 공이 큰 그로서는 억울하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오너가 사인을 보내 싫다는데 버티지 않았나. 그의 최대 패착이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김씨는 대북 사업에 너무나 미련이 많았던 것일까.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1998년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고 정몽헌 회장의 이른바 소떼몰이 방북을 보좌했고 그 열매인 금강산 관광 7주년(11월18일)을 코앞에 둔 지금 그는 대북사업과의 인연이 끊겼을 뿐더러 명예도 땅에 떨어졌다. 그와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다는 한 임원은 ‘이렇게 그를 보내는 것은 아닌데’ 하는 착잡한 정서가 현대아산을 짓누르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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