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 레지던트 “우리는 잡역부”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5.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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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하고 하찮은 일 하는 ‘싸구려 노동력’ 대접… ‘졸업후 현장 교육’은 공염불

지난 3월4일 새벽 1시께 서울 세브란스병원 일반외과 당직실. 사방에 불이 꺼진 꽤 늦은 시각인데도 젊은 의사 6~7명이 꽉 들어 찬 실내는 초저녁처럼 부산했다. 그들 중 두어 명은 수술기록표와 마취기록표로 보이는 서류철을 들고 연신 방문을 들락거렸다. 책상에 앉은 또 다른 몇몇은 담배 연기를 뿜어대며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나머지 몇몇은 당직실 한구석에 놓인 탁자에 둘러앉아 통닭집에서 사온 밤참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 했다. “이 고달픈 생활도 몇 개월 뒤면 땡이군.” 그는 레지던트 4년차였다. 함께 밤참을 먹던 사람이 부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너는 몇년 차냐’고 물었다. ‘1년차 좀 넘었다’는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뼈있는 농담 한마디가건네졌다. “아마 이 생활 끝내려면 밤참으로 통닭을 만 마리 정도 먹어야 할 걸!"
 병원에서는 그들을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른다. 새벽 1시30분쯤 수술을 막 끝내고 당직실에 잠깐 들른 의대 교수도 그들을 보자 대뜸 ‘아무개 선생’ 이라며 선생 호칭을 붙였다. 의료계에서 그들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전공의’이다, 일반 사회에 그들은 인턴 또는 레지던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병원 일반외과 당직실에서 밤샘하던 사람들은 인턴을 끝내고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 의사들이다
 인턴과 레지던트 사이에는 공통점이 여럿 있다. 먼저 모두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시험에 합격한 의사라는 점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의사이면서도 독자적인 판단으로 환자를 진단하고 그에 맞춰 처방을 하기에는 아직 능력이 모자란다는 점이다. 그들은 의술을 베푸는 것 이 아니라 ‘수련’ 한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인턴은 1년동안 내과 ․ 외과 등을돌며 의대에서 배운 지식을 진료를 할 수 있는 산 체험으로 끌어 올린다. 레지던트는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보건복지부가 지정 ․ 고시한 진료 과목 26개가운데 하나를 4년에 걸쳐 전문적으로 수련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차이가 있음에도 그들 모두 피교육자 신분이라는 것이다.
 국내 의료계에 전공의 과정이 등장한 것은 60년대 초반이다. 초창기에 인턴 ․ 레지던트는 병원에서 숙식을 제공 받는 것 외에는 아무런 직위나 보수도 받지 못했다. ‘졸업후 교육’이라는 의학 교육 과정 대상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부터 전공의 과정의 성격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병원이나 교육 받는 당사자나 인턴과 레지던트를 피교육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를 ‘잡부’라고 낮춰 부른다. 병원에 고용돼 값싼 인력을 제공하는 일이 주된 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월 말 ‘서울 지역 전공의 모임’(전공의모임)이 서울 ․ 경기 지역 15개 병원을대상으로 조사한 ‘인턴 업무 실태 조사’ 보고서를 보면, 인턴이 처한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매일 새벽에 출근하고 밤 늦게 퇴근한다. 서울 동대문에 있는 이대부속병원의 경우, 인턴의 출근 시간은 산부인과가 새벽 4시30분, 내과가 새벽 5시30분이다. 이보다 좀 늦게 출근하는 병원도 대개는 아침 7시를 넘기지 않는다. 반면 퇴근 시간은 가능한 한 늦춰진다. 서울대병원 ․ 세브란스병원(신촌) 등 주요 병원은 대부분 밤10시가 퇴근 시간이다. 물론 한양대병원 내과나 이대부속병원(동대문) 산부인과처럼 저녁 6시가 퇴근시간인 병원도 있다.

대소변 받고 커피 십부름하는 ‘의사’들
 당직 일수를 살펴보면 더 놀랍다. 대부분의 병원에서 인턴은 한달 평균 10일 이상 당직을 선다. 심한 경우 한달 내내 병원에서 살아야 한 인턴도 있다. 인천기독병원 산부인과의 한달 평균 당직 일수는 무려 30일이다. 조건이 훨씬 나은 병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한양대병원 내과 인턴의 한달 평균 당직 일수는 20일을 넘었다. 아주 대병원 일반외과에 근무하는 인턴은 한달 평균 3일 동안 병원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처럼 당직을 밥먹듯 하면서 인턴이 하는 일은 그야말로 막노동에 가깝다. 서울대병원 내과에서 근무하는 한 레지던트는 ‘전공의들이 병원에서 하는 일이 도대체 뭐냐’라는 질문에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모든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실제로 인턴들은 진료에 필요한 기계를 옮기고, 수술하기 전 환자의 신체 부위를 소독하거나 ‘스킨 프리퍼레이션’(수술 부위에 있는 환자의 털을 제거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 내는 일도 인턴 몫이다. 원래 간호사가 담당해야 할 정맥주사 놓기나 혈액 배양을 위한 피 뽑기도 몇몇 병원을 제외하고는 인턴이 처리한다. 말 그대로 ‘똥 푸고, 오줌푸고, 주사 바늘 찌르고, 피 뽑는 일’은 모두 인턴이 한다는 것이다.
 집일은 진료와 직접 관련된 분야에만 그치지 갚는다, 전공의모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턴은 의학 관계 논문을 복사하고, 대학원 과정을 밟는 선배들의 출석도 대신한다. 커피 ․ 담배 사오기 같은 잔심부름은 물론 우편물 부치기, 은행 다녀오기, 슬라이드 필름 찾기, 고지서 납부, 심지어는 선배들의 집안일 심부름까지도 인턴 몫이다. 반면 전공의의 보수는, 병원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전문의’ 보수 수준의 20~25% 수준이다. 예컨대 서울대병원 전공의들은 인턴 연봉 1천3백만원, 레지던트 연봉 1천5백만원 정도이다. 명색이 의사 자격증까지 갖고 전문의가 되기 위해 병원에 들어온 의사들로서는 간호사나 의료 기사보다 못한 ‘값싼 인력’으로 홀대받는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전공의들이 병원에서 이처럼 중노동을 강요당하는 사이 양질의 의사를 길러 내겠다는 취지로 시행되는  ‘졸업후 교육’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전공의를 수련시키는 병원은 강의와 집담회(보통 컨퍼런스로 부름). 회진 그리고 실제 진료 업무를 통해 전공의를 ‘수련’ 시키도록 되어 있다. 정부는 전공의에 대한 수련 기간과 방법에 대해 상세한 규정을 대통령령으로 정해 놓았다. 하지만 수련 병원으로 지정된 병원 가운데 그같은 법적 의무를 충실히 지키는 곳은 없는 상황이다. 인턴들이 공통으로 호소하는 불만 기운데 하나는, 수련 병원에 자기네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국내 의학 교육을 선도한다는 서울대병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2월 서울대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친 의사들은 병원측에 인턴 수련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교육 프로그램 내용을 대폭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호소문을 보낸 적이 있다. 각 과별로 주 1회 이상 강의를 실시하고, 인턴을 대상으로 한 회진을 빠뜨리지 않으며, 자기네가 맡은 환자에 대해 발표하거나 토의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특히 응급실 업무와 관련하여 ‘환자에 대한 검사 ․ 수액 등의 업무에 대해서는 주치의의 서명 없이도 시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환자에 대한 이른바 ‘오더권’ 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전공의가 ‘값싼 인력’으로 전락한 이유는 간단하다. 병원이 교육자가 아니라 경영자 처지에서 전공의를 대하기 때문이다. 인턴들은 웬만한 병원에서 10개가 넘는 병상을 책임진다. 그런데도 전공의를 ‘고용한’ 병원들은 이들을 위해 잠자리 하나 제대로 마련해 주는 데에도 인색하다. 전공의모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대 병원을 비롯해 서울백병원 ․ 서울중앙병원 ․ 국립의료원의 경우 평균적인 당직자 수만큼만 침실을 갖추고 있어 인턴들이 잘 곳마저 부족하다. 서울대병원 전공의협의회 부회장 정융기씨(레지던트 4년차)는 “부실한 교육에서는 부실한 의사가 탄생할 수밖에 없다. 전공의 교육을 정상화하려면 먼저 수련 병원을 지정하는 기준부터 현실화해야 한다. 현행 기준에 따르면, 내과의 경우 심전도기만 있어도 전공의를 뽑을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전공의들은 의사와 피교육자, 그리고 병원의 고용인이라는 ‘3중 구조’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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