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대통령도 울었다고?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5.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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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차관’을 들여오는 조건으로 간호사를 파견했다는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40년 전 일이다. 꽃다운 나이의 간호사 누이들이 이역만리 독일 땅으로 떠났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낯선 곳. 말이 통하지 않아 갑갑했다. 커피를 된장국이라고 부를 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설움도 많았다. 누이들은 열심히 일했다. 번 돈 거의 전부를 고국에 보냈다. 그 돈으로 빚을 갚고 동생을 가르쳤다. 이는 보릿고개를 넘는 큰 힘이었다. 이들의 송금액은 한때 GNP의 2%대에 달했다.

1967년 독일에 온 간호사 최숙녀씨(67)는 “한국에서 부잣집 큰며느리가 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독일까지 오게 됐다. 평범하게 한국에서 살았으면 하는 후회가 든다”라고 말했다. 독일 마인츠 대학 병원에서 이비인후과 수술 병동 수간호사로 있는 강은자씨(58)는 “우리 나라가 조금만 잘살았더라면 독일까지 와서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독 간호사 이야기는 현대사의 아픈 대목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이야기가 왜곡되었다고 파독 간호사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참여정부 들어서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파독 간호사의 산파 역할을 한 이수길 박사(77)는 “가난한 조국이 차관을 얻기 위해 볼모나 노예로 팔았다는 식으로 파독 간호사를 포장했다. 파독 간호사들의 피와 땀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뤼프케 대통령은 행사에 참석도 안해

지난 10월까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광복 60주년 특별 기획 전시회의 한 부분이다.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은 1억5천만 마르크의 상업 차관을 들여오는 조건으로 파견되었다.

파독 간호사와 관련해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 한 토막이다. 2004년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어 전 언론에 소개된 김충배 전 육사 교장의 글이다.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 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프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프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주겠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2003년 9월3일자 <조선일보> ‘눈물 젖은 역사를 가르치라’는 칼럼의 일부분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 순간 함보른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차츰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 목멘 소리로 변해갔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 버렸다. …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광부들에게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돌아갈 차에 올랐다.

 
차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애쓰는 박정희를 보고, 곁에 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정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 루르 탄광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과 40년 전의 이 ‘사건’을 지금 이 나라에서 아직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쥐고 흔드는 단병호 민노총 위원장이 그때 열네 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배우 문성근과 명계남이 각각 열 살, 열한 살 무렵이다. 그러니 386들이야 이 ‘눈물 젖은 역사’를 알 턱이 없다.…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코올 묻힌 거즈로 사망한 사람의 몸을 닦는 작업이었다.

파독 간호사와 관련된 일화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당시 행사에 참여했던 한 교민에 의하면 “광부 악단이 <애국가>를 연주하자 눈물을 보인 간호사들이 좀 있었다. 박대통령은 연설을 마치고 담배를 나눠주고 떠났을 뿐이다. 뤼프케 대통령은 그 자리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독일 대사관이 제공한 박대통령 독일 방문 일정표에도 함보른 탄광회사에서 광부와 간호원을 만난 그 자리에 뤼프케 대통령은 없었다. 독일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당시 박대총령과 뤼프케 대통령과는 공식 만찬이 한 번 있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시대 향수 자극하는 소재로 둔갑

김충배 전 육사교장은 “서독 대통령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신·구 세대가 같이 가자는 의미이지 박정희 미화는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주간은 “당시 박대통령의 통역을 맡은 백영훈 교수의 회고록을 읽고 자료를 모아 글을 썼다. 나중에 백교수가 전화를 걸어와 뤼프케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은 “뤼프케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지 않았고 의전실장이 있었다”라고 말해 자신의 저서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의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

1961년 12월, 독일은 한국에 차관 1억5천만 마르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은 당시 제3세계 30여 개국에 개발 지원을 하고 있었다. 1963년과 1966년 광부와 간호사의 파독이 시작되었다. 때문에 상업 차관을 들여오는 조건으로 파견되었다는 이야기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간호사가 본국에 송금하는 수수료를 담보로 은행에서 지급보증을 받는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간호사들은 한 은행만을 이용하지 않았다.
처음 도착한 간호사들이 시체를 닦는 일을 했다고 하는 부분도 부풀려져 있다. 파독 간호사 하민자씨는 “허드렛일을 하고,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동료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체를 닦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간호사들이 정신병으로 자살했다, 돈이 없어 고국에도 오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화가 치민다”라고 말했다.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의 박태견 논설주간은 “일부에서 광부·간호사 들이 한국 경제에 기여한 성과를 박정희의 전지전능한 리더십으로 연결했다. 경제 환경이 나빠져 반노 정서가 극에 달하자 경제적으로 양적 팽창을 했던 박정희 정권 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진보·민주 세력을 공격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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