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은 사라져도 화학무기는 건재하다
  • 모스크바 · 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5.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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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라크 전쟁 때 사용…러시아는 관리 소홀

 
지금 국제사회의 이목은 가공할 화학무기에 쏠려  다. 지난 11월7일 이탈리아 국영·텔레비전·채널 RAI는 미군과 영국군이 이라크 전쟁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했음을 폭로하는 다큐  름을 방영해 충격을 주었다. 한편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의 화학무기 폐기 상황을 보도했다. 유엔은 화학무기의 치명적이고 비인간적 특성 때문에 지난 1980년 화학무기·금지협약(CWC)을 제정해서 엄격히 규제·통제하고 있다.

FT 기사는 3년 전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체첸 반군이 모스크바 뮤지컬 극장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였던 사건이다. 이때 러시아 정부는 정체불명의 가스를 극장에 투입해서 반군을 진압했다. 가스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빗발치자, 러시아 당국은 의료용 마취제로 쓰이는 ‘클로르포름’이라 해명했다. 그러나 문제의 가스가 1997년 러시아가 서명한 화학무기·금지협약에 명시된 신경가스의 일종일 것이란 관측이 나왔었다.

지난 8월말 미 국무부는 ‘무기 통제’에 관한 일련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미국은 러시아가 화학무기협정을 위반하고 정보를 은닉했다고 강도 높여 비난했다. 특히 화학무기 제조·가공 시설과 저장량, 또 보관 장소에 관한 사항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이와 더불어 화학무기를 폐기·완료하는 시점을 분명히 하라고 러시아 측에 촉구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외무부는 2012년까지 화학무기 전량을 폐기할 예정이라고 응답했다. 화학무기는 독성이 제거된 후 바이투만(역청)으로 봉해져 매설된다.

한 곳에만 폭탄 2백만개 만들 분량

러시아가 보유한 화학무기는 4만t 정도로 일곱 지역에 골고루 분산·보관되어 있다. 고르니·시추치예·키르네즈 등 저장고 대부분은 모스크바 남동쪽, 카자흐스탄 접경 지역에 있고, 포체프 저장고만 벨로루시 접경에 있다. 화학무기 4만t은 엄청난 분량이다. 일례로 시추치예 저장고의 화학물질(5천4백t)로 대략 2백만 개의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데, 이는 인류를 수 차례 전멸시킬 수 있다.

러시아가 개발한 화학물질은 사린, 소만, VX 등의 신경가스가 주종이다. 이외에 제1차 세계대전 때 병사들을 경악케 했던 포스겐(질식가스), 겨자·루이사이트(미란(微爛)성가스) 등도 있다.

사린은 일본 열도를 공포로 몰아갔던 독극물로 유명하다. 1995년 일본의 오옴 진리교는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또 이란-이라크 전쟁 때 이라크군이 사린을 사용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무색 액체인 사린에 중독된 사람은, 즉각 근육 마비를 일으키고, 구토·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면서 죽는다. 건장한 사람도 사린 농도 0.2mg(/L)에 1분만 노출되면 생명을 잃고 만다. 방독면 착용으로 방어가 가능하다.

소만은 사린보다 백 배나 독성이 강한 무서운 물질이다. 냉전시대인 1980년대, 구 소련은 소만가스를 충전(充塡)한 폭탄과 포탄·로켓탄을 대량 생산해 이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사용했다. 또 미국은 60억~70억 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이에 상응하는 생·화학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는 정보가 있다. 약(弱)휘발성 무색 액체인 소만에 중독되면 즉시 근육 마비와 경련을 일으키며 죽는다. 건장한 사람도 소만 농도 0.02mg(/L)에 1분만 노출되면 생명을 잃는다. 방독면과 방독의를 착용해야 방어가 가능하다.

1952년 영국인 포톤-다운이 제조에 성공한 VX 신경가스는 포스겐 가스보다 독성이 3백 배나 강하다. 무색무취의 약휘발성 액체인 이 가스는 빙점이 낮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전시에는 분산성이 좋은 에어로졸 상태로 사용되는데, 바람을 타고 5~20km의 폭으로 퍼지면서 적을 무력화한다. 이 가스는 호흡기·피부·군복을 뚫고 들어가 생명체를 파괴하고 토양·군장비·저수지 등을 오염시킨다. 독성이 강해서 저수지가 오염될 경우 6개월간 독성이 가시질 않는다. 가스에 중독된 즉시 아드로핀과 같은 항독제를 투여해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 방독면과 피부보호구 착용이 최상의 방책이다.

 
러시아의 화학무기 폐기에 미국을 비롯한 영국·캐나다·이탈리아·스위스 등의 선진국이 앞장서고 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2007년까지 화학무기 전량을 폐기하겠다고 약속했던 러시아가 계획을 진척시키지 못한 주된 이유는 자금 부족 때문이다. 이에 선진국은 2억6천3백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1억8천4백만 달러를 우선 지급했다. 지원에 힘입어 화학무기 폐기 작업이 탄력을 받고 있다. 일부지역에서는 조만간 폐기 작업이 시작될 예정이며, 또 폐기공장 건설도 활기를 찾고 있다.

나아가 미국 등 선진국은 러시아의 화학무기가 테러조직에 유출될 것을 우려하고 감시하고 있다. 3년전 러시아 유명 주간지 ‘오가뇩’은 모스크바 주요거리에 화학무기가 매장되어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관리가 소홀하다는 말이다. 미국은 시추치예를 요주의 저장고로 판단하고 있다. 이 곳 화학물질은 와인통만한 용기에 담겨 있어 유출에 용이하고, 카자흐스탄 접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시추치예 저장고 경비에 쏟아 부은 돈은 자그마치 천만 달러에 이른다.

팔루자 공격 때 ‘백린’ 무차별 살포

그런데 미국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탈리아 ‘RAI’ 텔레비전 채널이 방영한 ‘팔루자-숨겨진 대량학살’ 뉴스24에 따르면, 대량살상무기(WMD)의 확산 금지 및 폐기에 앞장서온 미국이 이라크 공격에 치명적인 화학무기 ‘백린’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해 팔루자 공격에서 미군은 ‘Willy Pete’(군사·은어)라는 작전명령을 은밀하게 하달하고 작전에 돌입했다. 미국과 영국은 “야간전투 때 적군의 위치 파악을 위한 조명용으로 백린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합법적인 사용이었단 얘기. 하지만 백린이 무차별적이고 대규모로 공격에 사용되었으며,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다수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백린은 산소와의 접촉 즉시 발화해서 높은 열과 흰색 연기를 내며 타는 치명적인 인화성 화학물질이다. 피부에 접촉되면 산소가 없어질 때까지 살을 태워 녹여낸다. 또 RAI 방송은 미군이 백린 이외에 MK77 소이탄도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MK77 소이탄은 베트남 전쟁 내내 악명을 떨쳤던 화학무기다. ‘1997년 미국이 서명한 화학무기·금지협약에 따르면 백린과 MK77 소이탄은 무기로 사용할 수 없다.

이라크 전쟁 명분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 불량국 이라크에 대한 응징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미국의 화학무기 공격은 적반하장인 셈. 아랍권은 “백린을 무기로 사용한 군인들을 전범 재판에 회부하라”며 격앙했다.

지구촌 공존의 시대 21세기에도 화학무기의 공포는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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