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얼굴의 북한 일상, 길 밖으로 나오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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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동포 함께 뛴 평양-남포 마라톤 대회 현장 취재

 
북한이 남북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호흡을 조절하고 있다.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날 것을 의식하는 신중한 태도는 여전하지만, 한적한 농촌 마을의 빈곤에 잔뜩 찌들린 주민 모습 등 그동안 보여주기를 한사코 꺼려했던 치부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6·15 공동 선언’ 5주년을 맞는 올해, 북한 관광을 원하는 남측 일반인에게 문호를 대폭 연 것 또한 의미 있는 변화다. 그동안의 남북 왕래가 양적인 측면에 치중했다면, 최근에는 질적인 전환이 감지되고 있다.

양적인 측면의 변화는 우선 남북한 왕래 인원의 증가 수치가 말해준다. 최근 몇 년 사이 남북한 왕래 인원은 해마다 기록적으로 늘고 있다. 2003년 1만6천여명이었던 왕래 인원은 지난해 2만6천5백명을 넘어섰고, 올해 들어와서는 지난 8월 말 이미 5만명을 돌파했다. 이것도 북한 금강산을 찾은 남한 관광객들은 뺀 수치다.

진짜 의미 있는 변화는 남측 방문자들에 대한 손님맞이 방식이 달라지는 등 질적인 면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징후는 최근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대표 오연호)가 주최한 평양-남포 간 마라톤 대회 기간(11월 23일~26일) 때에도 확인되었다. 11월24일 오전 10시부터 평양 서남쪽 교외에 자리 잡은 서산축구장에서 시작된 ‘평양-남포 마라톤’ 대회는 코스 길이가 정규 코스의 절반짜리인 하프 마라톤 대회였다. 전체 코스 또한 평양 한복판(이른바 ‘본평양’)을 피해 교외 지역으로 잡았다.

하지만 이번 마라톤은 북한 체제의 심장부라 할 평양에서 남북한 일반인이 함께 뛰는 첫 마라톤을 북한 당국이 받아들였다는 데에서 하나의 ‘진일보’로 평가할 만하다. 이 날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씨 등 남측 참가자 1백50여명은, 북측의 일반인 참가자 50여 명과 함께 ‘평양의 강남’이라 할 광복거리와 왕복 10차선 청년영웅도로를 달렸다.
 
김일성 유적지 방문 강요도 없어

연도 곳곳에는 평양 시민들이 일상복 차림 그대로 나와 남측 참가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성원했다. 대회 참가자들 다수는 달리는 도중 연도에 줄지어 선 평양 시민들과 손바닥을 마주치거나 손을 맞잡기도 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약 2시간30분 동안 남측 참가자와 평양 주민이 북측 관계 당국의 특별한 제지 없이 상호간 ‘직접 노출과 접촉’의 기회를 가진 것이다.

 
북한 당국의 태도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 단초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마라톤을 위해 북한을 찾은 남측 참가자들은 대회 당일을 전후로 평양 시내와 평양 교외의 김일성 주석 생가인 만경대·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동명왕릉 등을 방문하거나 관람했다. 이 중 만경대는 북한으로서는 ‘하늘처럼’ 떠받들어온 혁명 사적지이자, 지난 2001년 6월 남측을 들끓게 했던 이른바 ‘방명록 파문’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북한 당국이 워낙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라 방문객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꽃다발을 바치고 방명록 기록을 ‘강제’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근 그런 모습은 사라졌다.

단체로 만경대를 방문할 경우, 단체 대표만 헌화하고 방명록을 남길 수 있게 격식을 간소화했다. 북한 체제를 바라보는 남측의 ‘현실’과 적절히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북한 당국이 타협을 이룬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북한 방문이 초행길인 방북자들은 방북길에 오르기 하루 전인 11월22일 서울 우이동의 통일교육원에서 방북 교육을 받았다. 이 날 교육에 나선 국정원 관계자는 평양 방문 때 문제가 될 곳으로,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 역시 지난 2001년 ‘민족 통일 대축전’ 때 크게 문제가 되었던 ‘3대 헌장 기념탑’ 등을 일일이 지목하며 주의를 당부했다. 

이들 장소 또한 과거 북측 안내원들이 남측 방문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던  장소들이다. 하지만 이번 마라톤 참가단의 방북 과정에서 남북 관계자들은 이 장소들을 방문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고, 이 합의는 3박4일 체류 기간 내내 정확하게 지켜졌다.

 적절한 타협은 묘향산 입구에 지은 국제친선전람관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생전의 김일성 주석이나 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외국의 국가 원수나 지도자급 인사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곳이다. 북한 당국은 이 전시관에 박정희 대통령 등 남측 지도자와 인사들이 보낸 선물을 모아 전시실을 따로 마련했다.

 
하지만 국제친선관람관에서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점은 김일성 주석 관련 선물을 전시하고 있는 본관에, 방 하나를 통째로 비워 김일성 주석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납형만을 따로 세운 방을 마련해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방의 주된 용도는 관람관을 찾은 방문객은 누구나 ‘김일성 주석 납형’을 향해 묵념과 경의로서 예를 갖추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측 방문객들은 북측 안내원이 묵념하고 경례를 하는 동안, 부동자세만을 취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좀더 극적인 일은 남측 참가단이 묘향산 입구의 향산호텔에서 점심을 먹은 뒤, 다음 목적지인 ‘룡문대굴’(평안북도 구장군 소재)을 향해 출발한 뒤 일어났다. 용문대굴은 지난 1996년 3월 김정일 위원장의 직접 지시로 개발되어 1998년 1차 완공을 본 석회암 동굴로, 규모나 아름다움 면에서 북한 최고의 동굴로 손꼽힌다.

용문대굴을 방문하려면 향산고속도로를 타고 평양으로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져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 길을 30분 이상 달려야 한다. 그 시간 동안 남측 참가자들은 비록 달리는 차 안에서이기는 하지만, 북한의 평균적인 농촌 마을과 주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직접 관찰할 수 있다.

낙후한 농촌 모습 그대로 보여줘

차창 밖으로 내다본 평안북도 구장군의 후미진 농촌 풍경은 평양 시내와는 또 딴판이다. 평양의 시계가 1980년대에서 멎었다면, 구장군의 시계 바늘은 남한 농촌에 견주어 30~40년 전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길거리에서는 소달구지는 물론, 소의 등에 길마(말굽쇠 모양의 구부러진 나무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안쪽 양편에 두 개의 막대를 대어 고정시킨 물건)를 얹고, 옹구(새끼로 짠 망태나 가마니 두 짝을 대어 길마에 대어 사용·두엄이나 채소·모래 실어 나름)를 바쳐 짐을 실어 나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바소거리(싸리나 대오리를 둥글게 엮어 지게에 얹는 도구) 하나 가득 뗄감을 장만해 힘겹게 지게에 지고 가는 모습도 자주 목격되었다. 길마나 옹구는 말할 것도 없고, 바소거리나 지게 따위도 남한에서는 농기구 관련 책자와 민속 박물관에서나 겨우 찾아볼 수 있는 물건이다.

 
촌락의 모습도 현재 북한 농촌의 가파른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과거 남한에서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주택을 개량했듯이, 북한도 1960년대 농촌 주택을 표준 설계해 전국에 보급했다. 개중에는 방 두 개에 부엌·창고가 딸린 단독 주택도 있고, 방 3개에 헛간·툇마루를 들인 ‘2가구 1개 동’ 형의 주택도 있다.
 
구장군 용문대굴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드문드문 형성된 촌락은 바로 그 1960년대식 주택들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구장군의 계절은 청천강 물이 얼어붙는 등 벌써 겨울로 접어들었지만,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은 목격되지 않았다. 더러 연탄을 길거리에 깔아놓은 모습도 목격되었지만, 대부분의 가구가 기본적인 난방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사저널>은 입구에서 동행한 북한측 안내원에게 ‘이번처럼 1백명이 넘는 대규모로 남측의 일반 관광객들을 대굴로 안내한 예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지난 8월에 시작해 10월에 끝난 ‘아리랑 축전 때가 처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사저널>은 전력난으로 해가 떨어지자마자 칠흑으로 빨려들고 있는 평양 귀환 차량 안에서 또 다른 북측 안내원에게 ‘구장군 주민의 생활 수준이 북측 주민들의 전체 평균과 비교해 어느 정도인가’를 물었다. 이번에는 ‘평균 수준에 비해 좀 떨어지는 편’이라고 답했다. 이날 용문대굴 관광을 통해 분명해진 한 가지 사실은, 북한 당국이 ‘피폐한 농촌 현실’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은 자기네 현실에 대한 남측 방문객의 자유로운 ‘체험’에 대해서는 여전히 엄격한 제한과 통제를 가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마라톤 행사를 동행 취재하러 간 기자를 막론하고 마라톤 참가자들 전원의 숙소(고려호텔) 밖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호텔 현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기미가 보이면 호텔 관계자가 즉각 뛰어나와 ‘들어오시라요’ 또는 ‘안내원과 함께 가시라요’라고 외쳤다. 연락받은 안내원이 곧이어 나타났지만 이는 ‘동행’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평양이나 북한 농촌의 일상을 담으려는 사진 촬영도 여전히 엄격히 통제되었다. 남루한 생활상이 배경 설명 없이 대량으로 퍼지는 사태는 막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특히 차창 밖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동행한 남측 기자에게도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사진 촬영·호텔 밖 이탈은 엄격히 제한

11월25일 송별 만찬 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여흥이 무르익자 남측 참가자 사이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자는 즉석 제안이 나왔으나 북측은 이마저 거절했다. 좌중이 대부분 술이 취해 자제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한번 노래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 다음 상황은 누구도 장담 못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 상황을 북측 행사 관계자들은 우려했고, 남측 손님들도 결국 이같은 북측 판단을 ‘이해’해 술자리는 노래 없이 파했다. 남한의 일반인에게 필수품인 휴대 전화는 북한에서는 여전히 ‘반입 금지 목록 1호’이다.

 
하지만 이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변하고 있었다. 3박4일 북한 체류 기간 내내 남측 방문객을 동행했던 안내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북한 최고의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이었다. 이들이 차량 이동 중 관심을 보인 것은 정치 선전보다는 남한의 아이티 산업 현황과 에이펙 회의의 결과 등 주로 산업과 경제 동향에 관련된 것이었다.

평양이 요란한 ‘선전 구호’의 도시인 것은 여전했지만, ‘반미 구호’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북측 안내원들은 차량 이동 중 간간히 남쪽 보수 언론을 비판하는 발언도 했지만 직접적인 비판은 삼가며 ‘남측 인민들은 보수 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떠보는 정도였고, 용어를 고르는 데에도 신중을 기했다.

북한의 남측 손님맞이 방식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당장 한 푼이 아쉬운 북한 경제 실정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를 테면 마라톤 참가단의 북한 체류 기간 내내 북한 당국은 가는 곳마다 임시 좌판을 펼쳐 자수품·술·그림 등 북한 토산품을 남측 손님에게 팔았다. 현장에서는 물건 값을 놓고 남측 손님과 즉석에서 흥정하는 장면도 나왔다.

하지만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해온 북한의 오랜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이같은 태도 변화를 당장 ‘한 푼의 아쉬움’에 따른 것으로만 치부해버리기 어려운 측면 또한 있다.

11월25일 평양 마라톤 참가단이 용문대굴을 찾았을 때에는, 전기가 갑자기 나가 무려 길게는 5분 이상 동굴 안이 암흑 천지가 되는 일이 세 번 이상 되풀이되었다. 남측 손님들은 그 이유가 동굴 내부의 전등을 밝혀줄 기름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또한 동굴 관리 당국이 전깃불을 다시 밝히기 위해 급한 대로 남측 손님을 태우고 간 버스에 실었던 예비 기름을 쓰는 등 동굴 바깥에서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입소문을 타고 널리 남측에 널리 알려질 것이다.

평양 마라톤이 열렸던 11월 말 평양의 분위기는 북한 최대의 명절인 조선노동당 창건 60돌(10월10일)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호텔에서 시청한 조선중앙TV에서도 연일 관련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하지만 북측 안내원들은 남측 일행이 떠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이를 선전하지 않았다.

북측 민화협 소속 김삼수 안내원은, 남측 손님이 귀경길에 오르던 11월26일 평양 순안공항에 접어드는 차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남측 손님에게 ‘작별 인사’를 자청했다. 그의 특별한 주문은 ‘평양 체류 기간 보고 느낀 그대로를 다른 남녘 동포들에게 잘 설명해 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6·15 공동 선언이 있은 지 5년, 북은 그렇게 남측 일반인에게 노출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 노출 범위 안에 북한 체제의 치부까지 일부 포함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최근의 변화는 근본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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