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으로 읽는 라틴 역사
  • 표정훈(출판 평론가) ()
  • 승인 2005.12.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주일의 책] <불의 기억>/남미의 역사와 문화 녹여낸 이색 소설

 
우루과이 태생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1940~ )는 소설, 정치 및 시사 분석, 역사, 다큐멘터리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거나 혼합해 왔고, 첫 책을 낸 1963년 이후 2004년까지 40종 가까운 책을 냈다. 여기에 많은 시사 잡지와 문예지에 칼럼을 기고해 왔으니 명실상부한 프로페셔널 글쟁이다. 더구나 주요 저서 대부분이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어판은 <불의 기억> 외에 <거꾸로 된 세상의 작은 학교>, <축구, 그 빛과 그림자>, <수탈된 대지: 라틴 아메리카 5백년사>, <사랑과 전쟁의 낮과 밤> 등이 있다.

가로지르기와 넘나들기의 명수인 갈레아노는 그러나 글쟁이로서의 일관된 자의식을 갖고 있다. ‘나는 기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글쟁이이다. 그 기억이란 아메리카 대륙의 과거, 무엇보다도 기억상실증을 선고받은 내 정든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기억이다.’ 이런 자의식에 걸맞게 <불의 기억>은 라틴아메리카의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역사를 담고 있지만,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역사 서술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소설인지, 다큐멘터리인지, 언론 매체 기사인지, 에세이인지, 전설인지 분간하기 힘든, 아니 그렇게 분간하려는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역사가 바로 <불의 기억>이다. ‘나는 객관적인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 글은 원하지 않았고, 또 불가능했다. 냉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편을 들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이야기 하나하나는 확실한 문헌 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비록 이야기는 내 방식대로 풀어냈지만,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다.’

이 책을 교보문고는 ‘소설>기타 나라 소설>스페인(라틴) 소설’, 예스24는 ‘역사와 문화>아프리카사/중동사/중남미사/문화’로 분류했다. 이런 분류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첫째, <불의 기억>을 ‘소설로만’ 분류한 서점의 무신경 혹은 일종의 의도된(?) 조처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 요컨대 <불의 기억>은 소설 아닌 소설이다. 소설 <불의 기억>의 한 장면.

 
원주민 둘이 감독의 공물을 나누어 자루에 넣고 리마로 떠났다. 감독은 주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멜론을 하나라도 먹으면, 이 편지가 주인 나리께 이를 거야.
리마에서 2레구아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심부름꾼들은 절벽에 앉아서 잠시 쉰다.
-이 이상한 과일은 무슨 맛일까?
-기가 막힐 거야.
-그럼 먹어볼까? 하나만, 딱 하나만.
-편지가 고자질할 거야.
 그들은 밉살스러운 편지를 감출 곳을 찾는다. 그들을 가려줄 만큼 큰 바위 뒤에 편지를 갖다놓고 허겁지겁 멜론을 먹는다. 살은 사근사근하고,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맛이 있다. 그들은 짝을 맞추기 위해 하나를 더 먹는다. 그리고 편지를 옷 속에 챙겨 넣은 뒤 자루를 메고 다시 길을 간다. (1565년 페루-리마로 가는 길)

둘째, 스페인(라틴) 소설이 ‘기타 나라’ 소설의 하위 분야라는 사실. ‘기타 나라’가 아닌 나라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 일단의 ‘주류 국가’들일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아프리카사/중동사/중남미사/문화’라는 엄청난(!) 분류 방식은 아프리카·중동·중남미의 역사를 한 묶음으로 분류해도 될 만큼 그 역사를 다룬 우리말 책들이 드물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현실이 <불의 기억> 한국어판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

소설과 다큐, 기사와 에세이 경계 넘나들어

<불의 기억>을 읽다보면 지적인 갈증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갈레아노는 정치 및 사회 구조, 문화적 성취,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경과와 결과 등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앞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있었음직한, 혹은 있었다고 기록된 사건들을 현장감 있게, 때로는 서사시적으로, 때로는 신문 기사처럼 보여주는 데 충실하다. 때문에 필자처럼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 어두운 독자라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통사(通史) 한 권을 곁에 두고 <불의 기억>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

필자는 적어도 라틴아메리카라는 주제에 관한 한, 유아들이 갖고 단순한 조각 그림 퍼즐 수준에 머물러 있다. <불의 기억>은 작은 조각 수백 개로 이루어진 복잡한 조각 그림 퍼즐이다. 그래서 조각들을 맞추어 가는 수고를 생략하고 완성된 그림을 빨리 보고 싶은 조급증에 빠지기 쉽다. 그렇다면 <불의 기억>을 읽는 마음가짐을 바꾸어 보아도 좋을 듯싶다. 앞서 언급한 어느 서점의 분류대로 그냥 소설로 읽으면서 라틴아메리카를 ‘느껴보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