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모호한 대상
  • 김형석 (월간 <스크린> 기자) ()
  • 승인 2005.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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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여성의 몸:<연애> <애인>

 
영화가 여성의 몸을 ‘다루는’ 방식은 남자의 몸과는 사뭇 다르다. 흔히 얘기하는 ‘벗기는 영화’의 단순 미학은 한국 영화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1990년대 초 팬시 스타일의 이른바 ‘기획 영화’가 등장하면서, 그녀들의 촉촉한 육체는 에로 비디오 속에 갇혀 버렸다. 대신 이제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정치경제학과 정신분석학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온갖 문화 이론이 동원되기도 했다.

제목을 혼동하기 쉬운 두 영화 <연애>와 <애인>에서 만나는 여성의 몸은 페미니스트라면 꽤나 흥미를 가질 육체들이며 정치경제학의 화두다. <노랑머리> 이후 6년 만에 ‘스리썸(threesome)’ 형태의 섹스가 등장하는 <연애>는 여성의 육체가 어떻게, 그리고 왜 멍드는가를 보여준다. 어진(전미선)이 가진 것은 무능한 남편과 두 아들이고, 그녀에게 없는 것은 돈이다.

어진의 ‘육체 역정’은 <영자의 전성시대>를 연상시킨다. 1970년대에 무작정 상경한 영자가 식모와 버스 안내양을 거쳐 창녀로 전락했듯, 어진은 전화방 아르바이트와 노래방 도우미를 거쳐 1 대 2 섹스(여자 1명과 남자 2명)의 콜걸이 된다. 이 영화엔 어진말고도 ‘직업 여성 3명’이 더 등장하는데, 그녀들 또한 모두 경제적 이유로 몸을 팔고, 취객에게 얻어맞고, 출소한 남편에게 잔인하게 구타당한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 되어가는 여성의 몸

<연애>에 비교한다면 <애인>은 일종의 판타지에 가깝다. 결혼을 앞둔 한 여성(성현아)은 우연히 만난 한 남자(조동혁)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일부일처제라는 자본주의적 계약관계의 틈새인 ‘약혼식에서 결혼식 사이의 시간’에서 갈등하는 여자의 하룻밤 꿈. 그녀의 육체는 순간적으로 욕망을 좇지만 그녀의 몸을 뒤덮는 것은 결국은 웨딩드레스다.

‘결혼’이라는 테마에 대해 <너는 내 운명>과 <나의 결혼원정기>는 독특한 풍경을 제공한다. 한국 농촌에 시집 와 만삭의 몸이 된 외국인 여성의 몸을 이 두 영화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그들은 영화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듯하지만 중심부 못지않은 울림을 준다. 사랑보다는 좀더 나은 경제적 삶을 위해 결혼을 매개로 한국에 온 여인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외국으로 건너가는 남자들. 어쩌면 이것은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국제 경제 지형도에서 생겨난 새로운 거래 관계일 것이다.

과거에는 영화에서 그저 시각적 쾌락의 대상이었던 여성의 몸이 이제는 점점 다양한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 되어간다. <광식이 동생 광태>의 바람둥이 광태(봉태규)는 한 여자와 절대로 열두 번 이상 섹스하지 않는 자신만의 ‘욕망의 법칙’ 안에서 경재(김아중)을 만난다. <연애의 목적>의 유림(박해일)은 여성을 어패류에 비유하면서 한 번만 자자고 칭얼댄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홍상수 영화와 맞닥뜨리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극장전>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남자들은 자신의 추억과 판타지 속에 존재하는 여성과 기어코 섹스하려는 집요한 성욕의 소유자들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살해당한 한 여성의 몸을 가운데 놓고 그녀의 몸을 거쳐간 수많은 욕망의 흔적을 추적하는데, 근친상간과 불륜과 순간적 욕정과 질투가 그 인덱스다.

영화계는 '마초들의 밀림'인가?

 
최근에는 욕망의 대상이 조금씩 연령대를 낮추고 있는, 이른바 ‘롤리타의 시대’이기도 하다. 문근영의 이미지가 이데올로기를 무장 해제하는 힘이 워낙 강하긴 하지만, <어린 신부>를 꼼꼼히 보면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여성 육체에 대한 음험한 시선이 곳곳에 존재한다. 어떨 땐 아주 노골적인 카메라 워크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하는데, ‘노골성’이라는 관점에서 아직까지 <몽정기 2>를 능가하는 영화는 없다.

소녀들의 욕망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는 좋았으나,  <몽정기 2>는 영화는 결국 소녀들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욕망을 대변했다. 재미있는 것은, 관객은 교사(교생)라는 근엄한 존재의 시선으로 그녀들을 은밀히 관찰하게 된다는 아이러니다. <제니, 주노>는 아예 중학생까지 내려가는데, 나름으로 진지하려고 노력했으나 개봉 당시 주변의 시선은 너무나 따가웠다. 롤리타 콤플렉스를 뒤집어버린 영화는 <녹색 의자>. 유부녀가 남고생과 질퍽한 사랑에 빠지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다.

지금까지 예로 들었던 영화들이 여성의 몸에 대해 은근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겼다면, 뭔가 긍정적인 영화는 없을까?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 하나가 있다. 과연 여성의 몸을 긍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친절한 금자씨>처럼 눈 붉게 칠하고 복수의 화신으로 만드는 것? <얼굴 없는 미녀>처럼 괴물 같은 여성을 등장시키는 것? 있는 그대로의 여성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것은, 영화계라는 마초들의 밀림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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