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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년 올해의 인물' 할리우드 콤프렉스 극복하다

점유율 50% 수출고 천만 달러 시대 열어....

이문재 편집위원 ㅣ | 승인 2005.12.19(Mon)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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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한국 영화'다. 태어난 지 80여 년 만에 자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아직 정확한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1919년 〈의리적 구투(토)〉를 생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1923년 〈국경〉을 탄생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나운규를 생부로 하는 한국 영화는 1960년대 전성 시대를 맞았다가 30년 가까이 암흑 시대를 통과해야 했다. 그 긴 터널의 시절, 한국 영화는 '방화'나 '국산 영화'로 불렸다. 국산 문학이나 국산 미술이라는 표현이 없었다는 사실을 환기해 보자. 몇년 전까지 '충무로'는 질 나쁜 국산품이나 한국 정치처럼 낙후한 분야의 은유였다.

"우리가 할리우드를 이겼다"

2001년 흥행 순위
(11월 말 서울 기준)

친구

257만9000

엽기적인 그녀

176만1000

신라의 달밤 :

160만5000

조폭 마누라 :

146만2000

슈렉 :

112만3000

진주만 :

108만1000

달마야 놀자 :

103만4000

미이라2 :

95만4000

킬러들의 수다 :

89만3000

버티칼 리미트 :

87만3900

하지만 1999년 〈쉬리〉 이후 한국 영화는 대중 문화의 권좌에 올라섰을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거쳐 올해 초 〈친구〉에 이르자 할리우드가 한국 영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관객 점유율 50%대에 다가섰고, 관객 천만명 시대(〈친구〉 전국 관객 약 8백60만명)를 눈앞에 두었으며, 한국 영화 수출고가 천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정식 이름으로 불리게 된 한국 영화는 명함 뒤쪽에다 아시안우드 혹은 코리안우드라는 국제적 이름을 새로 박아야 했다.

지난 12월12일 저녁,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 22회 청룡영화제 시상식은 한국 영화의 자신감을 새삼 확인하는 잔치였다. 시상식에서 사회자는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를 이겼다'고 선언했다. 굳이 청룡영화제가 아니더라도 한국 영화는 요즘 낯빛이 좋다. 어디 가서 손을 내밀지 않는다. 투자하겠다는 '큰손'들이 줄을 서고 있으며, 젊은 인력들이 영화계로 뛰어들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한국 영화는 멀티플렉스와 초고속 인터넷망을 타고 젊은 관객들과 끈끈한 연대감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 영화는 나운규의 증손자뻘이 되지만, 한국 영화는 21세기 초입에서 스스로 아버지(제1 세대)가 되고 있다. 한국 영화가 방화·국산 영화·충무로 그리고 할리우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이른바 '펀딩'이었다. 물론 한국 영화의 피땀 어린 터닦기 작업이 있었다. 〈쉬리〉 이전에 〈서편제〉(1993년)가 있었고, 그보다 앞서 스크린 쿼터제를 사수하기 위한 영화인들의 줄기찬 저항이 있었다. 기획 영화를 정착시킨 젊은 영화인들의 도전이 있었고, 영화 정책도 차츰 개선되었다.

이 시기는 문학으로 대표되는 활자 문화 시대가 스크린과 모니터가 선도하는 영상 이미지 시대로 이동하는 시기와 겹쳤다. 인터넷 보급 속도와 그 영향력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그리하여 김지하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끼고 다니던 문학 청년들은 골방으로 사라지고, 타르코프스키와 〈영화의 이해〉를 들고다니는 영화 청년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은 대기업(투자자)이었다. 〈서편제〉가 사상 처음으로 서울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이듬해인 1994년, 영화 평론가 강한섭씨(서울예대 영화과 교수)가 '한국 영화가 25년의 장기 불황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고 예언했지만, 당시 그 말에 대한 반향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영상산업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한국 영화가 성공한 다섯 가지 이유

기업들은 한국의 영화산업을 새로운 엘도라도라고 선언했다. 투자 대상이자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벤처 열풍의 후폭풍을 맞은 '갈데 없는 돈'들이 시나리오와 기획서를 검토하며 이른바 '대박'을 점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평론가와 영화 기자들이 '어불성설인' 〈조폭 마누라〉의 대성공 앞에서 당혹해 하고 있을 무렵,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 영화의 도전과 성공 전략〉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에 이어 〈엽기적인 그녀〉 〈신라의 달밤〉에 이르는 '대박 행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다섯 가지 관점에서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영화가 성공한 다섯 가지 요인은 △영화인들의 벼랑 끝 위기감 △협업·공조 시스템 구축 △젊고 창의적인 인력 흡수 △대중 문화 코드와 접목하는 마케팅 △시장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한국 영화 점율(단위 : %)
1991 : 21.2 1996 : 23.1
1992 : 18.5 1997 : 25.5
1993 : 15.9 1998 : 25.1
1994 : 20.5 1999 : 39.7
1995 : 20.9 2000 : 35.5
2001.11.30 : 46.0

첫 번째 요인은 영화인들이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다. 1988년 스크린 쿼터제를 수호하기 위해 벼랑 끝에 몰리면서, 그 위기감을 도약의 에너지로 삼았다. 이 위기감이 시나리오의 완성도와 제작 과정의 치밀성을 가능케 했고, 밖으로는 자금을 끌어모으게 했다. 위기감은, 제작·투자·유통 및 마케팅사의 협업과 공조 시스템을 도입하게 했다. 여기에 지방자치단체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이 가세했다.

   
  한국 영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올해의 영화'들. <친구>,<엽기적인 그녀>,<신라의 달밤>  
네티즌의 투자(영화 지분 공모)는 규모는 작지만 한국 영화에 대한 애정의 척도이며 그 자체가 홍보라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도입한 이 제도는 지난 9월 〈킬러들의 수다〉 공모에서 불과 5초 만에 1억원이 모집될 정도로 반응이 엄청났다. 최근에는 감독이나 배우를 대상으로 하는 '인물 펀드'까지 선보였다.

대중 문화의 흐름에 올라타는 '코드 마케팅'도 한국 영화의 엔진이었다. 엽기·조폭·코믹·과장·노스탤지어 같은 코드를 포착하는 한편 할리우드 영화와 차별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 것'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친구〉와 〈신라의 달밤〉 은 조폭과 노스탤지어 코드를 결합해 지방과 소외된 관객층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멀티플렉스 증가와 함께 인터넷이 가져온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12월12일 청룡영화제 시상식은 '네티즌 팬들의 위력'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번사모(〈번지점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고사모(〈고양이를 부탁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파사모(〈파이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객석에서 영화인 이름을 연호했다. 〈파이란〉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최민식씨는 수상 소감에서 '파사모 회원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제 인터넷과 영화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개봉되는 영화는 저마다 홈페이지를 개설해, 홍보와 예매는 물론 네티즌들의 '열화와 같은 관람평'을 올려놓는다.

이쯤에서 돌아보면 한국 영화라는 이름은 '풀 네임'이 아니다. 정확한 이름은 '한국 영화 산업'일지도 모른다. 한국 영화의 한 해를 돌아보는 언론 지면도 거개가 그렇거니와, 한국 영화는 점유율·관객 수·평균 제작비·수출고 등 예술이 아니라 대부분 문화산업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다.

예술로서의 새로움과 상품으로서의 새로움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예술로서의 영화가 당대 현실과 길항하며 인간을 주어로 내세운다면, 상품으로서의 영화는 인간을 수단화한다. 작가로서의 감독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고민한다면, 펀드 매니저로서의 기획자는 소비자의 새로운 기호에만 비중을 두는 것이다.

흔들리는 한국 영화의 정체성

   
  한국 영화가 점유율 50%대에 육박하게 된 데에는 영화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서편제는 처음으로 서울 관객 100만 시대를 열었다.〈공동경비구역 JSA〉와〈쉬리〉는 분단 상황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며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최근의 한국 영화 열기를 거품 현상으로 보고 있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예견한 강한섭 교수는, 한국 영화산업의 활황이 '김대중 정부의 포퓰리즘적인 영화산업 정책과 이에 편승한 금융 자본의 투기 속에 자칫 성장의 동력을 상실하고 다시 악순환 구조에 빠질 수도 있다'며 한국 영화의 현단계를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파악했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조종국씨(조우필름 대표)는 한 영화 주간지에서 한국 영화의 양적 팽창이 김대중 정부의 포퓰리즘적 정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강교수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며, 현재 영화계에 유입된 자본은 분명한 민간 자본이라고 밝혔다. 조씨는 한국 영화의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한국 영화 내부로 눈을 돌려보자.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영화산업의 규모를 늘려놓았지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1998년 편당 평균 제작비가 15억원이었는데, 올해에는 27억5천만원 수준으로 상승했다. 내년 상반기에 개봉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제작비 100억원 시대를 열었다. 영화 쪽에도 '묻지마 투자'가 몰리고 있다고 우려하는 소리도 들린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위협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기획되었다고는 하지만, 조폭 영화들이 꼬리를 물고 있는 반면, 저예산·작가주의 영화들은 극장을 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관객은 8천5백만 명으로 지난해에 견주어 30% 늘었지만, 개봉 편수는 오히려 20% 줄었다. 연기자 확보와 스태프 처우 문제도 한국 영화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다. 최민식 송강호 전도연 설경구 유오성 같은 연기자들이 자기 세계를 넓혀가고 있지만, 전체 연기자층은 여전히 얇기만 하다. 영화계에 중견층이 없다는 것도 큰 약점이다.

나운규의 증손자들은, 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한국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곧 한국 영화가 축적해온 노하우와 단절하는 것이기도 했다. 50대 전후 영화인에게 최근 한국 영화의 축제는 '그들만의 잔치'로 보일 것이다. 현장 스태프들도 소외되어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영화 스태프들의 연평균 수입이 3백37만원에 불과했다. 연간 천만원 이상 버는 스태프는 고작 전체의 4%였다.

2001년은 한국 영화의 원년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품으로서의 원년이지 작품으로서의 원년은 아닌 것 같다. 한국 영화산업이 아니라 '한국 영화'의 원년을 기대해 보자. 1990년대 중반, 이란 영화가 세계 영화계에 던진 충격에 견주어 볼 때, 최근 한국 영화의 신기록 행진, 특히 '울리거나 웃기거나, 아니면 때리거나' 하는 영화들의 행진은 불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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