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 외교’ 얻은 것과 잃은 것
  • 徐明淑 차장대우 ()
  • 승인 199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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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외교 중간평가/정․경 역할 분담 ‘성공적’

지난 2일 유럽 6개국 방문길에 오른 김대통령의 정상 외교는 프랑스․체코․독일․영국 일정에 거쳐 순방 외교의 정점인 ‘유엔 사회개발 정상 회의’(11일 덴마크 코펜하겐)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내 신문․방송 들은 대통령의 순방 일정에 관련된 속보들을 숨가쁘게 토해 내고 있다.

 취임 이후 다섯 번째 해외 순방길인 이번 유럽 방문을 마치면, 김대통령은 미국․일본․중국․러시아․필리핀․인도네시아․호주에 이어 유럽 대륙까지 밟음으로써 지구의 절반을 돌아본 대통령이 된다. 재임 기간으로 보든, 순방한 거리로 보든 방문 외교에 대해 중간 평가를 받을 만한 지점에 와 있는 셈이다.

 대통령 취임후 지난 2년 남짓 변화의 궤적을 그려온 김대통령의 해외 나들이 외교는 어떤 측면에서 빛과 그림자를 안고 있는데, 그 평점은 어떻게 매겨질 것인가.

“세몰이 외교는 세계화 역행”

 네 번의 방문 외교에서 가장 변화가 두드러진 대목은 기업가들의 수행이다. 취임한 지 9개월 만에 미국 방문을 추진하면서, 김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외유에 으레 동행했던 재계 인사를 수행단에 일절 끼우지 말도록 지시했다. 재벌 총수의 동행이 자칫 정경유착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전임 대통령의 외국 방문 때에는 반드시 내로라 하는 재벌 총수들이 동행했는데, 이런 동반 외유가 많은 구설에 올랐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 특별 전세기에 동승한 기업들의 민원을 전해 듣고 귀국 후 관계자들에게 처리를 지시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기업가들도 이를 적절히 활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대통령은 지난해 3월 두 번째 방문 외교인 일본․중국에 갈 때도 첫 번째 방문국인 일본에는 기업가들을 동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진출 문제가 초미의 관심으로 떠오른 중국 방문에는 30명의 기업가가 현지에서 합류했다. 네 번째 나들이인 필리핀․인도네시아․호주 순방에는 기업인이 60명 수행했고, 이번 유럽 순방에는 64명으로 늘어났다.
 기업인 수행단의 면면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을 비롯해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윤영석 대우중공업 회장, 구자홍 LG전자 사장,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 등 내로라 하는 기업 총수가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기업인들은 대통령 전세기에 동행하는 ‘직접 수행’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출발해 현지에서 합류하고 있지만, 기업인 수행자체를 아예 불허했던 취임 초기에 비하면 현격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이 취임 초기 기업인 수행을 놓고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태 경제 협력체 정상 회담에 두 번 참석해 국제 무대에서 차지하는 통상 외교의 비중과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되면서 기업인 수행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된 것 같다”라고 말한다.

 외교 전문가이자 국회 상공위원장인 조순승 의원은 “수행 기업인단이 지나치게 대규모인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동안 유럽과의 통상 관계로 등한히 해온 만큼 뉴 프런티어를 개척하는 차원에서 분위기를 조성해온 효과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고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세일즈 외교’에서 대통령은 기업인들의 엄호 사격 아래 통상 외교의 돌파구를 열고, 기업인들은 정상 외교의 성과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거래를 진행할 힘을 얻었다. 이른바 역할 분담이다. 특히 경제 요인 못지 않게 정치적 후광이나 인맥이 크게 작용하는 중국 방문에 수행했던 기업인들은 톡톡히 덕을 봤다는 후문이다. 투자건이나 교역 상담이 예전보다 훨씬 매끄럽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재계는 대통령 해외 순방 수행을 통해 또 다른 ‘경제 외적인 성과’를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초기에 비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오랜 야당 시절을 거치면서 형성된 부정적인 기업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유럽을 순방하면서 한국 기업을 바라보는 국제 사회의 시각을 실제로 경험하고 수행 기업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면 기업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본다”라고 기대 섞인 전망을 내린다. 재계는 굵직굵직한 재계 인사들이 총동원된 이번 수행단을 통해 나라 밖에서 ‘대통령과 기업의 거리 좁히기’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한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군과 대통령이 상호 인식의 격차를 줄이며 국익을 위해 공동전선을 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인 수행에 대한 김대통령의 인식 전환은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세일즈 외교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는 형태에 대한 비판론도 없지 않다.

 민주당 손세일 의원은 “대통령이 지나치게 세일즈 외교를 내세우는 것은 품위 없는 일이다. 개도국과 선진국의 중간에 서 있는 한국으로서는 오히려 공생공영이 가능한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모색하는 것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몫이다”이라며 세일즈 외교 비판론을 펼치고 있다.

 한편 대통령의 정상 외교가 목표를 잘못 설정하는가 하면, 초반에 내걸었던 실속있는 실무 외교보다는 세몰이식 외교 형태로 퇴행하고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게 제기된다. ‘세계화’를 구호로 외치면서도 정작 가장 세계화한 감각을 갖고 접근해야 할 외교 분야에서 뒤떨어진 시대 감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번 유럽 순방에서 설정된 외교 목표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다. 김대통령은 이번 순방에서 ‘세일즈 외교’와 함께 ‘월드컵 유치와 유엔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국제 여론 조성을 중점 외교 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덴마크 ‘유엔 사회개발 정상 회의’에 모여든 정상들을 최대한 접촉해 협력을 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대기업 총수들이 대거 동원된 데에는 이런 배경도 작용했다.

“실무급 외교 통한 설득이 바람직”

 그러나 외교 전문가들은 오는 11월 유엔에서 결정되는 비상임이사국의 경우, 정상외교 테이블에서 한번에 돌파하는 것보다는 실무급 관계자들을 통해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이 훨씬 유효하고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지적한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외무부 관계자는 “비상임이사국 선출에는 각 나라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매우 민감하게 반영해 투표권을 행사한다. 따라서 각 나라 관계자들에게 한국의 비상임이사국 진출이 자국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구체적으로 끈질기게 설득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간의 짧은 대화보다는 현지 대사나 순회 대사를 동원한 긴 설득이 훨씬 바람직하다”라고 지적했다.

 월드컵 유치 문제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나설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유치 경쟁국인 일본의 경우 87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민간 체육 단체와 관련 기업인, 문화 언론계 인사를 총동원해서 결정권을 가진 각 나라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을 설득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그 범주는 철저하게 민간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조순승 의원은 “월드컵 문제는 민간 차원에서 조용히 경작해야 할 문제다. 대통령까지 나섰다가 대회를 유치하지 못했을 때의 반작용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정치․외교․안보․경제․사회․복지 분야는 물론이고 이렇듯 체육 행사 유치까지 정상 외교 과제로 삼다 보니 이번 유럽 순방 수행단 규모는 전례 없이 커졌다. 기업인은 별도로 치더라도, 공로명 외무부장관․박재윤 통상산업부장관․서성목 보건복지부장관․정근모 과학기술처장관․김동진 합참의장․김한규 민자당총재비서실장․김광석 대통령 경호실장․한이헌 경제수석․유종하 외교안보수석․윤여준 공보수석․문동석 외무부 의전국장․김석우 의전비서관․한태규 외무부 구주국장 등 다수의 국무위원과 청와대 비서진이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김대통령은 취임 이후 첫 미국 방문에 앞서서 일정과 프로그램을 실무 중심으로 짜고 불필요한 수행원을 최대한 줄이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미국 방문 당시 보기 드물게 12명의 단촐한 수행단이 따라 나선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호소카와 일본 총리가 내한했을 때에도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 실무 정상 외교를 강조하면서 단독 정상 회담 자리에 양국의 아주국장만을 배석시켰다. 그러던 김대통령이 해외 순방 횟수를 거듭 할수록 수행단 규모를 늘리는 추세다. 김대통령의 순방 외교 행태를 두고 ‘밴드 웨곤 효과를 노리는 세몰이 외교’라는 비판이 슬슬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흔히 외교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어 내는 기술’로 일컬어진다. 김대통령은 이번 유럽 순방에서 13박14일 동안 6개국 7개 도시를 순방하는 강행군을 했다. 그러나 최대 비용을 투자해 최소 효과를 거둔다면,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좋은 학점을 못 받는 학생이나 다를 바 없다. 이제 한국 외교도 무조건 정상 외교에만 매달리는 촌스러움에서 벗어나, 적절한 외교전략 지도를 만들고 그 위에 적절한 무기와 병사를 배치하는 세련된 방식을 추구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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