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길 막힌 민주계 YS를 두려워하랴
  • 文正宇 기자 ()
  • 승인 199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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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불만 ․ 미래 불안 겹쳐 ‘폭발 임박’

민자당 지도부의 권위가 말씀이 아니다. 이춘구 대표․김덕룡 총장 체제가 출범한 뒤 당 지도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일부 의원이 이런 저런 이유로 당직 맡기를 고사했으며, 총무 경선도 후보지명자인 김영구 의원이 사퇴하는 바람에 불발했다. 기초 선거 후보에 대한 정당 공천 배제를 힘으로 밀어붙이며 야당과 일전을 벌이는 요즘에도 그런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일부 의원이 상임위 변경을 통보한 당 지도부에 탈당을 거론하며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당 지도부에 보고하지 않은 내용을 대정부 질의 때 포함해 계속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예전에도 이런 돌출 행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내 소외 그룹들의 한풀이성 촌극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당 지도부를 뒷받침해야 할 민주계가 오히려 당의 혼란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국회 대정부 질의 통해 김대통령 비판

 노재봉 의원의 탈당으로 당이 어수선했던 2월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민자당 지도부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민주계인 유성환 의원이 대정부 질의를 하면서 예상치도 못한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유의원은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임기의 불균형은 시정돼야 한다. 특히 여당의 경우 대통령이 직접 공천하지 않은 국회의원과 국정을 이끌어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면서 헌법을 개정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의원의 얘기는 당에 조금도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기초 선거 정당 공천 배제를 들고나와 민자당이 지방자치 선거를 연기하거나 그 이상의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혹을 받는 상황에서 유의원의 발언은 그런 의혹을 더욱 부채질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의원은 당 지도부를 향해서도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85년 국시론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그는 “10년 전 이 자리에서 추방됐던 사람이 다시 이 자리를 섰지만 그 때 나를 추방했던 사람이 다시 이 자리에 섰지만 그 때 나를 추방했던 사람들은 이 자리에 없다. 국무총리가 전직 대통령을 예방한 것은 어떤 자세로 간 것이냐”는 말을 했다. 국무총리에게 한 말이지만 동시에 이춘구 대표에게 한 얘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대표도 취임한 뒤 곧바로 노태우․전두환 씨를 찾아갔기 때문이다. 유의원이 이 날 얘기한 내용은 당 지도부의 결재를 받은 대정부 질의 원고에는 포함돼 있지 않은 것이었다. 유의원은 대정부 질의가 끝난 뒤 김대통령에게 직접 질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3월3일 역시 민주계인 강인섭 의원은 야당 의원 못지 않게 강도 높은 대정부 질의를 했다. 그 역시 사전에 원고 내용을 당 지도부에 상세하게 보고하지 않았다. “개혁과 세계화가 어떻게 다르냐. 개혁 의지가 실종되자 세계화 구상이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아니냐” “국정 운영의 난조는 인사의 난맥에서 비롯된다” “최근 대통령께 일반의 여론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의문이 일고 있다” 등등. 그의 대정부 질의 내용은 누가 보더라도 총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었다.

 물론 유의원이나 강의원의 돌출 행위는 그들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사적인 이해에서 비롯했다고도 볼 수 있다. 유의원과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흔히 ‘문학 청년’이라고 표현한다. 자기 생각이 옳다 싶으면 이것 저것 잴 것 없이 거침없이 털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기질 때문이다. 이번에도 유의원은 현행 대통령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얘기를 안하니까 참지 못해 입을 열었을 뿐일 것이라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강의원은 사실 감정이 상하게도 됐다. 그는 지난 정기국회 때 처음 지방 자치 선거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때는 김영삼 대통령이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하는 바람에 당 지도부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었다. 강의원은 그 뒤 지방 선거가 현행 법대로 치러질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지역구 기초 선거 공천 희망자들을 모아놓고 바른 공천을 위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당 지도부가 다시 기초 선거 후보의 정당 공천 배제를 강력히 추진하는 바람에 강의원은 쓸데없는 일만 한 꼴이 됐다. 더구나 강의원은 지난번 개각 때 입각을 강력히 희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야당 성향을 견지해온 그는 과거 정권에 협력했던 같은 언론인 출신들이 계속 중용되는 것을 보면서 짙은 회의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단순히 개인적인 기질이나 이해 때문에 이런 얘기를 꺼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의 얘기 속에는 민주계의 공통된 정서가 깔려 있다. 그것은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지난 당직 개편 때 민주계는 전면에서 일제히 퇴장했다. 현재 당 12역 가운데 민주계는 김덕룡 총장 한 사람뿐이다. 이는 3당 합당 당시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도대체 김대통령의 인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당의 화합과 선거를 겨냥한 것이라면 아예 민정계에게 모두 맡겨보든지….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김총장에게 무게 중심을 실어주는 형편이 아닌가. 그런데 당 12역 중 김총장을 받쳐줄 민주계는 한 명도 없고, 김총장이 항우 장사도 아니니 죽을 지경일 것이다. 감투는 썼지만 실권이 없는 민정계도 기분 좋을 리 없고.”

민주계 “더이상 밀리면 위험하다”

 민주계의 한 의원이 사석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그는 민자당이 기초 선거 후보를 정당 공천에서 배제하려는 과정에서 송천영․반형식 의원 등 초․재선 의원들의 실책이 잇따랐던 것은 당내에서 김총장을 뒷받침할 정치력 있는 민주계 중진 이 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그는 또 민주계 내에서도 외로운 처지인 김총장 하나만을 남겨놓고 민주계를 모두 2선으로 물러나게 했으니 당무가 제대로 돌아가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현재 민정계 중진들이 모두 냉소적 태도로 팔짱끼고 있는데 그런 것도 다수의 민정계 당직자들이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현재의 당내 역학구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는 “벼슬은 떼고 일만 맡기는 이런 인사는 민주계를 힘들게 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민주계의 또 다른 인사는 “김대통령이 변했다”는 얘기도 한다.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 민주계를 보던 눈과 지금 시선은 천양지차라는 것이다. 그는 “처세와 정책 수행에서 부러울 정도로 능수능란한 구여권 인사들에 대해 김대통령이 점차 높은 점수를 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반면 대통령 앞에서 듣기 싫은 소리도 잘하고 정책 수행 경험이 없어 실수가 잦으며, ‘영어도 못하는’ 민주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김대통령이 듣기 좋은 말을 골라 하는 사람들만 가까이 하면 정치적 고비 때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민주계는 “공석에서도 징그러울 정도로 윗 사람을 높이고 자기를 낮출 줄 아는” 구여권 인사들에게 자기들이 점차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동시에 더 이상 밀리면 위험하다는 의식을 공유하는 것 같다.

 민주계 내부에서는 자탄하는 소리도 나온다. 민주계의 지금 처지는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인사가 끝나면 몇몇 사람은 불만을 품게 마련이다. 민정계도 인사에서 아깝게 탈락한 사람들은 입이 부어서 다닌다. 그런데 민주계 얼토당토 않은 사람들까지 인사에 불만을 품는다. 객관적인 평가에 따라 서열 3번까지 승진했는데 14번이나 15번인 사람이 홧술을 마시고 결근하는 꼴이다. 내가 대통령이라도 넌덜머리가 나겠다.” 민주계 한 당직자의 말이다. 그는 “민주계 인사들이 저마다 자기가 대통령과 가장 가깝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는다.

 민주계 소장파들 사이에서는 중진들에 대한 원성도 높다. 중진 실세들이 서로 견제하느라고 구심점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민주계 소장파 의원들은 “중진 실세들은 이미 서로 등을 돌린 지 오래 됐다. 그들은 더 이상 동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민주계 인사들의 요즘 발언은 김대통령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넘어서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당이 야당의 저지를 뚫고 기초 선거 후보에 대한 정당 공천 배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잠시 잠복하겠지만, 멀지 않아 여권에 한바탕 회오리를 몰고올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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