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눈이 멀어 양심 팔아먹다니…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6.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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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명 두뇌집단 전문가와 언론사 논객들, 로비스트·행정부의 ‘나팔수 노릇’ 하다 쫓겨나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미국 내 유수한 두뇌집단의 하나인 카토(Cato) 연구소의 한반도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던 더그 밴도. 오랫동안 주한 미군 철수론과 한·미 동맹 재정립론을 주창해온 그는 미국 조야는 물론 한국에서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최근 한 거물 로비스트의 고객을 위해 수년간 ‘대가성 칼럼’을 써준 일이 들통 나 카토 연구소와 작별했다.

지난 수년간 워싱턴 조야에는 두뇌집단의 일부 연구원들이 돈을 받고 로비스트나 특정 이권 단체를 위해 청탁성 칼럼을 써주고 있다는 구린 소문이 자자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소문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비록 밴도 경우와 다르지만 남몰래 부시 행정부의 ‘홍보맨’ 노릇을 하다 뒤늦게 매문 행각이 드러나 망신을 톡톡히 당한 사람이 여럿 있다. 미국 흑인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논객 암스트롱 윌리엄스와 신디케이트 칼럼니스트인 매기 갤러거가 좋은 예다.

비록 이같은 ‘매문’ 행위가 일부 지각 없는 인사에 국한되었다고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여론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온 유명 논객들마저 돈 때문에 양심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많은 미국인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런 논객들을 통해 종종 사태의 흐름을 파악하고 자신들의 견해를 정립하는 데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밴도, 칼럼 1편당 ‘사례비’ 최고 2천 달러 받아

사실 미국처럼 언론사 논객이나 두뇌집단의 전문가들이 활개 치는 나라도 드물다. 이런 미국을 두고 이른바 ‘사상의 시장(idea market)이 만개한 나라’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특히 뉴욕타임스 같은 주요 신문에서 사설 반대 쪽에 마련된 의견난에는 내로라 하는 논객들의 글이 실려 여론의 흐름을 종종 바꿔놓는다. 뉴욕타임스의 외교 전문가인 토머스 프리드먼이나 워싱턴포스트의 보수 논객인 조지 윌이 대표적인 경우다. 때문에 유명 논객들을 많이 확보한 신디케이트 사가 보기 드문 호황을 누리는 곳이 미국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시카고에 있는 트리뷴 미디어 사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 같은 쟁쟁한 외교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필진을 자랑하고 있고, 로스앤젤레스에 본부가 있는 크리에이터스 신디케이트는 워싱턴 정가의 저명한 논객인 로버트 노박을 포함해 팻 뷰캐넌, 사회학자인 토머스 소웰 등을 포함해 분야별 전문 칼럼니스트 수십 명을 거느리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더그 밴도는 지난 1955년에 설립된 이후 현재 미국 내 일간 신문, 주간 신문, 인터넷 매체 등을 포함해 1천5백여 개의 고객에게 칼럼을 공급하고 있는 코플리 뉴스 서비스 소속이었다. 코플리측은 문제가 터지자 즉각 밴도와 계약을 철회했다.

밴도는 스탠퍼드 대학 법학 박사 출신답지 않게 법조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과거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에서 일하기도 했고 정치 전문 잡지 <인콰이어러>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보수적 색채의 카토 연구소에 둥지를 틀고 미국 외교 정책에서부터 환경 보호, 종교, 마약과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안에 대해 지난 20년간 주요 방송은 물론 신문·잡지 따위에 폭넓게 자신의 주장을 펴왔다.

특히 그는 일찍이 지난 1996년 <인계 철선:달라진 세계에서의 한국과 미국의 외교 정책>이란 저서에서 주한 미군 철군을 역설해 내외의 큰 관심을 끌었다. 지난 2004년에는 헤리티지 재단의 테드 카펜터 박사와 <한국의 수수께끼>란 공저를 낼 정도로 지한파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일생일대의 오명을 남기며 카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최근 경제 전문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에 난 한 토막 기사 때문이다. 이 잡지는 온라인 기사에서, 워싱턴 거물 로비스트로 현재 미국 조야를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잭 아브라모프의 고객들을 위해 밴도가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12~24편에 달하는 대가성 칼럼을 썼다고 폭로했다. 밴도는 칼럼당 사례비로 최고 2천 달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파문이 커지자 그는 “내 쪽의 판단 실수였으며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지겠다”라며 <비즈니스 위크>의 기사가 사실임을 시인했다. 현재 로비스트인 아브라모프는 카지노 요트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무려 20여 명의 전·현직 미 연방 의원과 보좌관들에게 향응을 제공했는가 하면,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들로부터 불법 로비 자금을 챙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 1월3일 현재 그는 혐의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유죄 확정 시 그는 최고 30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밴도는 이런 아브라모프를 위해 칼럼을 써준 것은 물론, 심지어 일부 칼럼은 아브라모프가 제공한 정보와 토픽에 의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정 로비스트와 뒷거래를 통해 대가성 칼럼을 써준 밴도와 달리 또다른 유명 칼럼니스트 윌리엄 암스트롱과 매기 갤러거는 부시 행정부가 내던진 미끼를 너무 쉽게 물었다가 몰락을 자초한 경우다. 행정부와 거리를 유지하며 비판 기능에 충실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행정부와 유착 관계를 맺으려다 화를 입은 것이다.

 
암스트롱은 미국 내에서는 잘 알려진 흑인 보수 논객. 그는 교육부가 흑인 자녀들을 겨냥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뒤처지는 학생 없애기 운동’과 관련해 이를 적극 옹호하는 주장을 텔레비전 혹은 라디오를 통해 펼쳐왔다. 물론 ‘공짜’는 없었다. 미국 교육부로부터 24만 달러라는 거액의 대가가 뒤따랐던 것이다. 과거 클래런스 토머스 연방대법관의 보좌관을 지냈고, 현재는 홍보 회사를 운영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암스트롱은 “관련 컬럼은 내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라고 해명했지만, 교육부의 ‘나팔수’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트리뷴 미디어 서비스는 물론이고 텔레비전 회사로부터 계약을 취소당했다.

부시 행정부, 국내·외 언론인 매수해 ‘구설’

유력지인 월스트리트저널과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해 미 전역의 여러 신문에 칼럼을 기고해온 매기 갤러거는 부시 행정부 출범 초기인 지난 2002년 대가성 칼럼을 써준 일로 필화에 휘말렸다. 그는 보건부와 2만1천5백 달러짜리 계약을 맺고, 당시 부시 행정부가 역점을 두고 펼치던 결혼의 중요성에 관한 캠페인을 자신의 칼럼을 통해 지지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구설에 오르자 “정부에서 돈 받은 것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기자 윤리를 위반했다고는 보지 않는다”라며 강변하다가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고 독자들에게 사과했다. 그는 당초 부시 행정부의 결혼 캠페인을 평가절하하다가 계약을 맺은 뒤 ‘적극 옹호’로 돌변하는 등 모순된 행동을 보여 더 큰 구설에 올랐다. 자신의 매문 행위가 밝혀진 뒤 그녀도 소속사인 트리뷴 미디어 서비스측으로부터 계약을 취소당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미 국방부가 이라크 내 미군의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해 비밀리에 이라크 현지 신문사들에게 돈을 주고 친미 기사를 싣도록 한 일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이처럼 국내·외에서 정부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납세자들의 돈을 낭비하는 것은 위법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보는 전문가들은 논객들을 돈으로 회유한 부시 행정부의 태도 못지않게 돈에 눈이 멀어 행정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일부 논객이나 로비스트의 유혹에 빠진 일부 두뇌집단 인사들에게 더욱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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