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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안경 쓰니 ‘음란 작가’

[시네마키워드] 한석규의 안경:<음란서생>

김형석 (월간 <스크린> 기자) ㅣ 승인 2006.02.20(Mon)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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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규(위 가운데)가 출연한 영화 중에서 <음란서생>(위)만큼 안경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은 없다.  
배우에게는 트레이드마크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특유의 표정이나 목소리 같은 육체적 요소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입에 물었던 시가나 찰리 채플린의 분신과도 같았던 지팡이처럼, 어떠한 소도구일 경우도 있다. 한석규에게 그런 트레이드마크적인 소도구가 있다면 바로 안경일 것이다.

그에게 안경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신호와도 같다. 거칠게 말하면 한석규의 영화는 ‘안경 쓰고 나오는 영화’와 ‘안경 벗고 나오는 영화’로 나눌 수 있다(그는 이미 텔레비전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와 같은 부드러운 이미지에서는 안경을 쓰고, 그 반대 이미지였던 <서울의 달>에서는 안경을 벗었는데, 이 공식은 영화에서도 적용된다).

안경을 기준으로 한석규에겐 두 개의 얼굴이 있는 셈이다. 먼저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드라마에서, 그는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금테안경을 쓴다. 그의 ‘안경 경력’은 영화 데뷔작이었던 <닥터 봉>(1995)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아들 하나가 있는 홀아비(이며 바람둥이) 치과 의사인 봉준수라는 캐릭터였다.

그 뒤 <은행나무 침대>(1996) <접속>(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로 이어지는 라인업은, 안경 쓴 배우가 엄청난 흥행력을 발휘하며 박스오피스에 오를 수 있다는 걸 증명한 드문 예였다(안성기 박중훈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등 그 누구도 안경 쓴 얼굴을 자신의 대표 이미지로 내세우지 않는다). 특히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심야 라디오 DJ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푸근한 미소, 그리고 안경이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진 완벽한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냉혹한 세계에서 서성이는 한석규의 맨얼굴이 있다. 그는 <초록 물고기>(1997)에서 처음으로 안경을 벗는다. 군대에서 갓 제대한 막둥이. 그는 기차에서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고, 그녀는 한석규를 어두운 밤의 세계로 이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맨얼굴의 한석규가 선글라스를 쓰는 순간이다. 순수한 청년이 암흑가에 젖어들어 범죄를 결심할 때, 그는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쓴다(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한석규·문성근·심혜진이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이후 한동안, 그는 안경을 벗고 누아르와 스릴러와 거친 액션의 세계에 뛰어든다. <넘버 3>(1997)에선 ‘쌈마이’ 조폭이 되었고, <쉬리>(99)에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진동하는 현장을 뛰어다녔다.

한석규에게 안경은 영화 성격 규정하는 신호

이후 한동안 그는 절대로 안경을 쓰지 않았다. <텔 미 썸딩>(1999)에서는 사나흘은 면도를 안 한 것 같은 까칠한 얼굴로 잔혹한 현장을 야수처럼 찾아다니던 형사였다. <이중간첩>(2002)에서는 제목 그대로 이중간첩이었고 <주홍글씨>(2004)에서는 야비하고 부정으로 얼룩진 경찰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 사람들>(2005)에서는 대통령이 살해되는 역사적 현장에 자의 반 타의 반 엮여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나이였다.

왜 그는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약 7년 동안 안경을 쓰지 않았을까? 그가 ‘안경 벗는 장르’에 전념한 것은, 어쩌면 그 장르가 주는 비장미와 고독한 영웅상 때문이었을지도 모르며, 이것은 말랑말랑했던 전작들과 CF 등으로 인해 자신에게 굳어진 부드러운 이미지를 깨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안경 쓴 한석규를 그리워하기 시작했고, <미스터 주부퀴즈왕>(2006)은 그러한 관객들의 요구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었다. 실직 후, 아내를 내조하며 가사에 전념하는 남편. 하지만 대중은 안경 쓴 한석규의 귀환에 냉랭한 반응을 보였으니, 아마도 관객들이 원하는 건 다른 느낌의 안경이었던 것 같다.

안경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음란서생>(2006)은 선글라스를 상징으로 사용했던 <초록 물고기>만큼이나 인상적인 영화다.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유약한 남자 김윤서. 우연히 항간에 떠도는 음란 소설을 접하게 된 그는 그 매력에 단숨에 빠져들고, 어느새 작가가 되어 밤낮을 불태우며 집필에 몰두한다. 이때, 유통업자인 황가 놈이 윤서에게 선물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색안경이다.

역시 조선 땅에 밀려들어오던 외국 문물 중 하나인 색안경을 집어든 윤서는 이리저리 보다가 조심스레 써보는데, 이 순간부터 그는 한낱 서생에서 본격적인 음란 작가가 된다. 그가 <음란서생>에서 색안경을 쓰는 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동안 출연했던 모든 영화에서 이 영화만큼 안경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은 없다. 윤서라는 이름을 지우고 ‘추월색’이라는 음란한 필명을 얻을 수 있는 보호막으로서의 색안경인 셈이다.

한석규의 다음 작품은 <구타유발자들>. 이번에는 경찰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안경을 벗은 그는 다시 거친 남자들의 정글로 뛰어든 것일까? 제목 자체가 이미, 그런 냄새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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