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所不爲의 독재 下手 중정-안기부 28년 功過
  • 이상우(저널리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1989.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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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는 결국 대통령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이 기관을 부리느냐에 따라 그 기능이 좌우된다.”
  6공화국에 들어와 가장 심하게 그 실세적 위상이 폭락한 권력기구는 아마도 국가안전기획부일 것이다. 설문조사결과 안기부가 재벌이나 언론, 행정부보다도 뒤처져 여섯번째의 위상에 머문 것은 오랫동안 無所不爲의 위세를 떨쳐오던 안기부의 위상이 오늘날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안기부(前身인 중앙정보부 포함)는 4반세기에 걸친 군출신 독재정치 과정에서 그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굵은 권력 기둥의 역할을 해왔다. 안기부는 독재체제 아래서 그 자체가 권력의 핵이자 통치권의 도구였다.


其和黨 창당에 모체 역할 :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소장과 김종필중령에 의해 서둘러 창설된 중앙정보부는 애당초 그 목적이 ‘반혁명세력’의 저지에 있었다. 아직 기반이 취약한 쿠데타 정권에 대해 도전해올 것으로 예상되는 반대세력에 관한 정보수집과 사전저지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정권기반이 뿌리를 내리면서부터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對共관계로 정립된 것이다.
  중앙정보부 내지는 안기부가 지니는 고유의 기능, 즉 국가안정보장과 관련되는 국내외 정보수집 및 대공수사기증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구가 그러한 고유기능을 수행한 것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가 걸핏하면 비난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많은 경우 이 기구가 본래의 역할보다는 해서는 안 될 월권적 행위를 꾸준히 감행해왔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는 초창기부터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5⋅16세력의 장기 집권기반인 공화당 창당을 위해 그 모체로서 역할을 했고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저질렀다.
  63년 7월부터 69년 10월까지 6년반 동안이나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은 무한대로 정치에 개입, 국가사회의 구석구석에 중앙정보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정치, 경제, 사법부, 언론, 학원, 종교계, 문화, 사회단체 등 사실상 그 모든 것에 이중 삼중의 정보망이 쳐져 빠져나갈 수 없는 감시하에 들어갔다.
  고유의 기능에 속하는 대공업무에 있어서도 중앙정보부는 곧잘 잡음을 불러 일으켰다.
 
對共업무에서도 곧잘 물의 일으켜 : 67년에 있었던 ‘동백림사건’같은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 사건에서 중앙정보부는 세련되지 못한 거친 수사방식과 외교관례를 초월한 월권적 작태로 말미암아 세계여론으로부터 비판이 표적이 되었으며 국가적 위신과 이익에 큰 손상을 초래했다.
  이후락씨가 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70년대 초반에는 김대중납치사건을 일으켜 중앙정보부의 어두운 얼굴을 또 한번 세계에 드러냈다.
  그 후 한⋅미간에 일대 마찰을 빚게 했던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추문도 중앙정보부의 작품이었다. 이 무렵 KCIA라고 하면 전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았다.
  유신체제하에서 정보부의 기능은 극도의 역작용으로 나타난다.
  언론탄압과 각종 인권유린사태, 야당에 대한 공작정치와 사법부의 시녀화, 재야세력 뿐만 아니라 여권과 심지어는 행정부에 대한 감시, 정치사찰, 정보조작 등 정보부는 공산당을 떨게 하기보다는 국민을 떨게 했으며 국민의 정보기관이 아닌 사실상 정권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한 끝에 정보부장이 최고 통치권자를 살해하는 10⋅26사건이 터진 것이다.
  12⋅12 숙군쿠데타를 정권장악의 계기로 잡은 전두환소장은 80년 4월 국군보안사령관직과 함께 중앙정보부장서리직을 겸직함으로써 대권에의 발판을 마련한다.
  중정부장서리에 취임하면서 전두환씨는 정보부를 과감히 정비 축소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전씨는 그때 “앞으로 중앙정보부는 업무면에서 국내외 대공정보 수집활동 및 정책자료 수집 등을 주로 하되 철저한 비노출 활동을 관철, 모든 기관 부서를 드나들며 간섭하던 일은 일체 없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정보부는 한동안 기구와 인원이 축소되는 등 상당한 수준으로 그 실세가 감축되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전두환시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출을 통해 대통령이 되고 나서부터 정보부는 다시 과거와 같은 무소불위의 위세를 되찾았다.


安企部 改名 후에도 정치사찰 계속 : 81년 3월 안기부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그 하는 일은 박정희 시대의 정보부와 똑같았다. 모든 정보기관의 상위에서 아무런 간섭없이 정치사찰을 계속했고, 야당을 상대로 거침없는 공작정치를 자행했다. 안기부이 ‘담당관’은 행정부처, 각기관, 대학, 언론사 등을 무시로 드나들었으며, 특히 정부 각부처에 파견된 정보관은 사실상 행정조정기능까지 맡아 했다. 아직까지도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안기부가 주도한 행정부내 屋上屋의 권력核이었다. 국가의 모든 주요 시책은 반드시 이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거쳐야했다.
  5공치하 안기부의 위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의 중추였다. 그만큼 월권행위가 많았고 국민의 원성도 컸다.
  지난해 말 정부 산하기관인 행정개혁위 마저 이렇게 지적할 정도였다.
  “안기부는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되는 국내외 정보의 수집 및 국가보안법 등에 규정한 범죄수사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나 그 과정에 있어서 수사권을 남용, 인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많고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등 국민들로부터 지탄이 되고 있다.”
  이러한 안기부가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화를 자임하고 나선 6공화국 치하에서 개혁차원의 수술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盧泰愚대통령은 이미 선거과정에서 안기부의 기능축소를 공약했으며 집권 이후 실제로 이와 관련된 조치를 취했다.
 
작년에 기구 및 기능 축소 : 지난 해 여름에 있었던 안기부 기구 축소와 종래에 안기부장이 주관하던 고위시국대책회의를 폐지한 것 등이다. 각 부처와 기관을 상대로한 정보부원의 파견이나 출입이 폐지된 것도 그같은 조치의 일환이다. 안기부장이 야당당사를 방문하고 정치인과 언론인을 초청하여 브리핑을 한 사실도 안기부의 새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 실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노대통령 집권후 긍정적 방향으로 변신해 있던 안기부가 최근에 이르러 또 다시 구태로 되돌아가는 듯한 낌새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른바 공안기류를 타고 안기부가 정치와 관련된 전통적 위상을 되찾아 가는듯한 징후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여객기 강제체공 지시도 : 지난 7월 한야당의원을 공안사건과 관련, 연행하기 위해 승객 1백4명이 탄 여객기를 수십분간이나 체공시킨 어처구니 없는 작태에서 그같은 불길한 징후를 느끼게 된다.
  현재 안기부는 盧대통령에 의해 효과적으로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7월 박세직 부장을 경질하고 TK진영이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며 자신의 경북고등학교 후배인 서동권씨를 후임 부장직에 임명함으로써 盧대통령은 국가최고정보기관이자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통치수단으로 가장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안기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고 관측통들은 분석하고 있다.
  盧정권이 집권 중반기에 접어드는 현시점에서 앞으로 안기부가 어떤 위상으로 정착될지는 정확히 내다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한가지는 뚜렷하다. 정보당국의 한 관계자가 “안기부는 결국 대통령이 어떤 철학에 따라 이 기관을 부리느냐에 따라 그 기능이 좌우된다”고 말한 것처럼 앞으로 안기부의 위상은 전적으로 盧대통령의 의지 여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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