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길, 멀고도 험하다
  • 南文熙 기자 ()
  • 승인 1989.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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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화 조짐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캄보디아 內戰
금년 2월15일은 10여년 동안 아프간 내전에 깊숙이 관여해 왔던 소련군이 마지막 철수를 단행한 날이다. 그리고 지난 달 26일은 1978년 이래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던 베트남군이 또 한 마지막으로 철수한 날이다.
  시차는 있지만 금년들어 이루어진 양국군이 철수는 동유럽⋅몽고 등지에서의 소련군의 감축 및 철수, 아프리카의 나미비아등지에서의 쿠바군 철수 등과 함께 최근의 국제정세의 새로운 화해분위기를 반영하는 상징적은 사건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 강대국간의 대결과 지역분쟁으로 점철되었던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국군의 철수가 이들 분쟁지역에 곧바로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님은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간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나. 베트남군 철수 이후 캄보디아의 심상치 않은 최근 동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캄보디아는 제2의 아프간인가? : 지난 2월 15일 소련군 철수이후 미국과 파키스탄이 지원을 받는 무자헤딘 반군은 파키스탄 접경지역인 잘랄라바드에 춘계 대공세를 폈다. 그러나 정부군의 완강한 저항 앞에 잘랄라바드 공격은 무위로 끝났고 이후 아프간 사태는 장기적인 교착국면에 빠져들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베트남군 철수 이후의 캄보디아에서도 비슷하게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베트남군의 마지막 철수이전부터 공격 준비를 갖춰오던 크메르 루즈군을 포함한 3개 반군 연합은 태국 접경지역인 파이린 지방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서서히 대공세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예로부터 루비와 기타 값비싼 보석이 많이 난다는 파이린, 그 파이린은 ‘캄보디아의 잘랄라바드’가 될 것이다. 아니, 캄보디아는 이제 제2의 아프간이 될 것인가? 여기에 세인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구상의 그 어떤 전쟁도 그것은 극소수의 수혜집단을 제외하고는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평만을 가져다 준다. 더구나 그 전쟁이 동족상잔의 형태를 띠고 거기에 주변국들 및 超強大國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그 시작과 끝이 당사자들의 손을 떠나버리게 되면 불행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게 된다.
  아프간 사태나 캄보디아 사태는 바로 동족 내부의 대립에 주변 諸國과 초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들어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불행을 증폭시킨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978년 4월 혁명으로 인민주주당 (PDPA)이 정권을 잡기까지만 해도 아프간 사태는-물론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주변 諸國의 입김이 전혀 작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일국내의 동족간 대립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정권내의 파벌투쟁에서 권력을 장악한 아민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이 실패로 돌아가, 정권의 위기감이 만연하게 되면서부터 그것은 일국적인 상황을 벗어나 버리고 말았다.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이 나라에 反蘇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 한 당시의 소련 지도부는 79년 12월 군대를 파견, 이 나라의 상황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아프간 사태는 이때부터 지역 분쟁의 차원을 넘는 국제적 분쟁으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강대국간 對立의 희생자들 : 캄보디아 사태의 발생 원인은 아프간 사태에 비해 상당히 外在的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웃 베트남에서 타오르고 있던 전쟁의 불길이 엉뚱하게 이 나라에 옮겨 붙으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트남에서 苦戰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이웃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정권이 지나치게 중립적이고 때로는 親베트남적 양상까지 보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 그들은 소수의 親美 세력들을 조종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였고, 그 결과 시아누크는 권좌에서 쫓겨나고 親美的인 론 놀정권이 세워졌다.
  한번 잘못 꼬이기 시작한 역사의 실타래는 여기에 다양한 세력의 이해 관계가 얽히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게 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론 놀 정권은 1975년 크메르 루즈의 도전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그 크메르 루즈 역시 3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1백만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하던 끝에 78년 베트남군의 침입으로 캄보디아 국경으로 내쫓기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입은 표면적으로는 크메르 루즈와의 국경 분쟁이 원인이 되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70년대 全般의 국제정세에 영향을 미쳤던 中⋅蘇 분쟁과 그에 따른 中⋅越 관계의 악화가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서 毛澤東노선의 급진적 추종자들인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권은 신생 베트남에 위협적인 존재였고 그들은 이러한 위기감을 캄보디아의 불안한 정세를 틈탄 침공과 親베트남 정권의 수립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캄보디아 사태는 베트남과 훈 센의 프놈펜 정권을 한편으로 하고, 미국과 주변 ASEAN(동남아국가연합) 국가들이 지원하는 노로돔 시아누크와 손 산 사糸의 非공산 叛軍, 그리고 중국과 태국이 지원하는 크메르 루즈 등 3개의 반군 연합을 한 축으로 하는 지역 분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반군 연합세력은 1982년 北京에서 ‘캄푸치아 민주 연정’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인 대항의 채비를 갖췄다.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았다 : 어찌됐건 서로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군사적 대결의 각축장에서 미래에 대한 별다른 보장없이 자신의 군대를 일방적으로 철수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소련과 베트남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각각의 심각한 경제난이 배경에 깔려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역 분쟁 해결을 위한 고르바초프의 ‘親思考’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85년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소련은 지역분쟁 해결을 위한 代案으로 외국군의 철수 및 지원 중단, 그리고 대립하고 있는 각 민족 분파간의 ‘화해’를 주창했다. 이후, 외국군 철수와 함께 나지불라 정권과 훈센 정권은 반군과의 연립정권 수립을 통한 ‘민족화해정책’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오랜 기간의 내전에서 지칠대로 지쳐있는 지역 주민 및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바라는 주변국가들이 광범위한 호응을 얻어가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오랜 기간동안 적대감과 상호불신을 키워왔던 아프간이나 캄보디아의 반군들, 그리고 그들의 국제적인 후원자들에게는 이러한 원칙적인 제안들은 부차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일 뿐이다. 당장 그들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외국군의 철수로 생긴 힘의 空白상태이며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가능하다면 현재의 정권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거나 아니면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를 바라고 있다. 즉, 미처 끝내지 못한 계산을 마저 하고 싶은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주변의 이해 당사국들 중 이란은 호메이니 死後 對蘇관계를 정상화 해가면서 최근에는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바라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고,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총리 역시 강경한 군부 세력들을 여러모로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자헤딘 반군을 통한 現 나지불라 정권의 붕괴와 새로운 정부의 수립이라는 점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반군에 대해 계속되는 미국의 무기 지원이 최근의 사태악화의 커다란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반군의 로켓트포 공경이 카불 등 주요 도시의 민간인 거주 지역에 집중되고 있어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는데. 지난 두달 사이에 카불에서만 약 6백여명의 시민이 반군의 로켓트포 공격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캄보디아 사태의 경우는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치적 해결의 전망이 매우 밝은 것처럼 보였었다. 더구나 지난 5월의 中⋅蘇 관계 정상화는 그러한 전망을 한층 더 밝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월의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과 서방 관계가 경색 되고 이런 여파로 7월 말부터 약 한달동안 계속되었던 파리국제회의가 무산되면서, 캄보디아 사태의 조기 해결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당시 파리회의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었던 것은 크메르 루즈군의 연립정부 참여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크메르 루즈와 직접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훈 센정부와 베트남은 그들의 연정 참여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고, 일부 서방국가들도 과거 집권기간 동안의 그들의 前歷을 들어 반대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현실론을 들어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고, 크메르 루크의 후원국인 중국은 연정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이나 미국의 경우에는 과거 베트남과의 악감정이 아직 채 청산되지 않아 훈 센 정부의 존속을 별로 달가와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에서 비교적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태국의 경우에는 표면적으로는 미국이나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 仲裁를 위한 조용한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부군과 반군사이의 접전이 새롭게 격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러한 중재 노력이 당장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상황으로 볼 때 앞으로 빠른 시일내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경우 캄보디아 사태는 아프간 사태의 再版이 될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
  최근의 국제관계는 점차 대결의 시대에서 화해와 타협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러나 全面的인 화해의 시대가 오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장애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최근의 두 사태는 웅변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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