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종의 시대’를 깨뜨리다
  • 金東鉄 기자 ()
  • 승인 1989.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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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서울대생 첫 維新 반대데모 주도자 羅炳湜씨

1973년 10월 2일 오전 10시. 동숭동 서울 문리대 4⋅19혁명기념탑 앞에 갑자기 5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1) 유신헌법 철폐 (2) 정보파쇼통치의 즉각 중지 (3) 대일 예속화 중지 (4) 중앙정보부 해체 및 김대중납치시건의 즉각 진상해명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후 스크럼을 짜고 중앙도 서관을 세 번 돈 뒤 닫혀진 교문 앞에서 연좌 시위를 시작했다. 그들은 선구자를 합창하며 가끔 “유신헌법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결연한 의지보다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공포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교수들도 질려 있었고, 취재기자들도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교수들 중에는 ‘역시 믿을 건 학생들뿐’이라고 생각하는 표정도 있었고, 이미 히틀러에 비유하여 ‘박틀러’라는 별명을 가진 朴正熙대통령의 카리스마에 도전한 댓가가 엄청날 것이라고 걱정하는 교수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착잡했다.
  이러는 동안 종로 5가 쪽에서 택시들이 몰려와 문리대 앞에 소속 도착했고, 그 속에서 사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내렸다. 그들은 마치 구경꾼들처럼 슬슬 교문 옆을 돌아 학교 안으로 들어가 시위대 뒤쪽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표정은 갈수록 겁을 더 먹는 것처럼 보였다. 사복차림들이 시위대 주변을 거의 포위했을 때 교문이 갑자기 열리며 교문 밖에 있던 사복들이 시위대를 덮쳤다.
  시위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 했지만 그들 뒤에 포진해 있던 사복들에게 거의 모두가 다 붙잡혔다. 어떤 사복은 학생 두 명을 나꿔채 끌고 가기도 했다. 체포된 시위대는 학교앞에 와 있던 경찰버스를 태워졌다.
  체포된 학생들 중 누군가가 애국가를 선창하자 체포된 시위대 모두가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여학생들은 그들이 부르는 애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다 체포되자 경찰버스는 학교 앞을 떠났다. 시위대가 부르는 애국가는 점점 작게들렸고, 버스가 종로 5개 쪽으로 사라졌을 때는 체포된 학생들이 영영 불귀의 객이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교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위의 주도자들은 시위대가 중앙도서관을 세 번도는 도중 이미 피신해버렸기 때문에 체포된 학생들은 대부분 단순가답자뿐이었다.
  시위 다음날인 10월 3일은 개천절이어서 학생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본부는 각 정보기관에서 나온 기관원들이 설치는 가운데 붐비고 있었다. 주동자가 누구냐? 그러나 기관원들은 유신에 대한 반대데모가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던지 시위주도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80년대의 학생시위에 비하면 외형상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데모사건은 朴正熙대통령이 1972년 10월17일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종신집권체제를 구축한 ‘10월유신’에 정면 도전하는 최초의 학생시위였다.
  이 시위의 주도자 羅炳湜씨(당시 문리대 국사학과 4년, 현풀빛출판사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71년 10월 15일 朴正熙대통령이 위수령을 발동함과 동시에 학원질서확립 특명 9개항을 발표하면서 전국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거의 구속되거나 강제징집 당해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학내활동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것은 종신집권 정지작업의 일환이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도 반성이 많았지요. 주로 학외인 전국기독학생연맹이나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모여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됐는데, 여기에서 기존의 학생운동이 정권과 대치 차원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는 반성이 나왔어요.” 羅炳湜씨에 의하면 이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모색 과정에서 민중개념이 최초로 등장했고, 10월유신 이후에는 학외에서 형성된 새로운 학생운동 세력이 73년 신학기부터 학내에 진입하여 그동안 폐지되었거나 불법화되었던 학생회 조직과 문화서클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들은 7월까지 학내조직을 완비한뒤 8월부터 교회조직을 중심으로 10월의 ‘大會戰’에 대비했다고 한다.
  “유신 이후 일부 국민들은 자포자기에 빠져 탄압을 당연시하거나 침묵과 자기기만의 굴종이 사회에서 하나의 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것을 깨기 위해 거의 목숨을 걸고 朴正熙대통령의 카리스마에 도전했다. 그들의 거사는 곧바로 전국 대학으로 확산됐고, 유신의 기만성을 일반 국민들이 인식하게 돼 朴정권은 긴급조치에 의존하여 통치할 수밖에 없게 됐다가 10⋅26으로 종말을 맞게 되었다.
  아무튼 유신의 공포분위기 속에서 시위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유신헌법을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중앙도서관을 세 번 돌때 방관했던 학생들도 10월4일 등교하면서는 어떤 감동을 감추지 않았다. 그 시위는 굴종을 강요당한 유신의 껍질을 깨뜨린 쾌거였기 때문에 교정은 조용한 가운데 흥분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교정의 벤치나 다방에 모여 10월2일의 ‘거사’에 대해서 소곤거렸다. 그 소곤거림 속에는 “콘크리트 바닥에서 민주주의 싹이 나왔다‘는 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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