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령’은 국민이 우습다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6.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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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체니 부통령, 총기 오발 사고 일으키고도 ‘오만 불손’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59)이 주인으로 있는 백악관에는 부시 못지않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틀어쥔 사람이 있다. ‘백악관의 진짜 안주인’ 혹은 ‘부시를 수렴청정하는 장본인’ 심지어는 ‘미국의 진짜 대통령’이라는 별명이 스스럼없이 따라 다니는 딕 체니 부통령(65)이 그 주인공이다.

체니는 1970년대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 공직에 몸담은 이래 포드 행정부에 이어 1980년대 후반에는 현 부시 대통령의 부친인 조지 H.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베테랑 정치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텍사스 주지사 출신의 ‘애숭이’ 정치인이자 외교 문외한인 조지 W. 부시가 2001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워싱턴 정가에서는 부시가 체니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같은 예상은 지금도 한치의 오차없이 적중하고 있다.
  
체니는 요즘 여론의 도마에 올라 호된 시련을 겪고 있다. 최근 한 돈 많은 변호사 친구와 함께 메추리 사냥을 갔다가 오발 사고를 일으켜 그 친구가 부상을 당했는데도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 권리가 있는 국민들에게 나흘간이나 일부러 알리지 않은 것이다. 미국 언론은 이번 사건을 두고 백악관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한 채 ‘소통령’ 행세를 해오던 체니의 오만한 행태가 백일하에 다시 한번 드러났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체니는 2003년 1월에도 안토닌 스칼리아 연방 대법원 판사와 오리 사냥을 나간 일로 구설에 오른 바 있다. 당시는 스칼리아 판사는 체니가 주재하는 백악관 에너지 비공개 회의 기록의 공개 여부와 관련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던 민감한 상황이었다.

체니, 사건 발생 5일 만에 과오 인정

우선 이번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체니는 2월11일 미국 텍사스 주의 거부이자 부시 대통령에게 거액을 기부한 해리 위팅턴 변호사(78)과 그 일행 네 명과 함께 메추리 사냥을 나갔다. 장소는 텍사스 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거부 로비스트인 캐서린 암스트롱 여사가 소유한 광활한 별장. 부시 대통령 부자는 물론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 케이 허친슨 현 텍사스 주 연방 상원의원, 그리고 릭 페리 현 텍사스 주지사 등이 가끔 사냥을 즐기는 곳이었다.

체니 일행은 당일 바베큐 요리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쯤 메추리 사냥에 나섰다. 사냥에 나선 지 약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체니는 약 27m 앞 덤불 속에서 메추리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누군가 그쪽에서 퍽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체니가 달려가 보니 이미 위팅턴 변호사는 목과 턱 부위에 산탄을 맞고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오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은 저녁 7시가 넘어 이 소식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문제는 오발 사고 직후 체니의 행태다. 그는 오발 사고를 내고도 누구에게도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는 제일 먼저 진상을 파악해야 했을 백악관 대변인실도 이튿날 오전에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체니만 입 다물면 영원히 베일 속에 덮힐 뻔했던 이 사건은 별장 주인인 케서린 암스트롱 여사가 사건 다음 날 지역 신문인 코퍼스 크리스티 콜러타임스에 연락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신문이 즉각 자사 웹사이트에 체니의 오발 사고를 보도하자 백악관 출입 기자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진상 파악을 위해 파고들었다.

이런 가운데 휘팅턴 변호사가 심장 발작 증세를 보이면서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제서야 백악관 공보팀이 총동원되어 오발 사고 ‘은폐’ 기도에 따른 여론 악화를 수습하기에 나섰다. 그때까지 꿈쩍 않던 체니도 사건 발생 닷새째인 지난 2월15일에 가서야 공화당 우군 방송인 폭스 TV에 출연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사건을 즉각 일반 국민에 알리지 않은 데 대해 “우선은 국민들보다 휘팅턴 변호사 일가에 먼저 알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라면서 “비슷한 일이 다시 벌어져도 자신의 행동은 똑같았을 것이다”라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문제는 그가 마지못해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기까지 걸린 시간과 그 배경이다. 미국 주요 언론 보도에 따르면, 체니의 미적거리는 태도에 대해서는 부시 대통령도 꽤나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다. 시사주간지 <타임> 최근호에 따르면 체니의 텔레비전 출연에는 부시 대통령의 ‘강권’이 작용했다. 부시는 체니가 알아서 하루빨리 국민들에게 오발 사고의 진상을 밝혀주기 바랐지만 체니가 차일피일 미루자 백악관 공보 수석인 댄 바틀렛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렸다. 바틀렛은 이런 부시의 의중을 즉각 체니의 전직 고문이자 ‘고민 해결사’로 알려진 매리 마탈린 여사에게 알렸다.

 
부시 행정부의 우군인 폭스 TV측에 급히 연락해 인터뷰를 주선한 사람이 바로 마탈린 여사였다. 그녀는 사고 이튿날 오전 체니와 접촉한 뒤 곧바로 대국민 해명을 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체니가 ‘오발 사고로 친구가 다쳤다. 참 좋은 친구인데 말이다’ 며 자신의 사과보다는 휘팅턴 변호사 중심의 해명서를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런 해명서를 준비하느니 차라리 안하는 게 낫다”라며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일화는 체니가 미국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 정치 분석가는 이번 메추리 사냥 사건을 통해 미국민들은 체니가 백악관 내에 얼마나 견고하게 자신만의 성을 쌓았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꼬집었다.

대권에 관심 없어 마음 놓고 ‘배짱 행보’

그렇다면 체니가 소통령을 자처하며 오만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배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대다수 정치 분석가들은 그 원인을 체니가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찾는다.  역대 부통령과 달리 체니는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데 대해 일찌감치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따라서 체니는 국민 여론이나 자신의 인기도에 대해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언론에 자기가 어떤 식으로 비쳐지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력한 보수지인 월스트리트 저널이 NBC TV와 공동 여론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민 가운데 열 명중 일곱 명은 체니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체니는 이런 부정적 인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교 문외한인 부시를 움직여 부시 행정부의 국내·외 정책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실제로 집권 1기를 거쳐 2기에 들어선 부시 대통령이 지금까지 취해온 일련의 대내외 정책, 특히 국가 안보에 관한 정책은 체니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이라크 군사 공격, 인권 침해의 논란을 빚었던 애국법, 현재 한창 논란을 빚고 있는 국내 인사들에 대한 비밀 도청, 교토 의정서 등 주요 국제 조약에 대한 약속 파기 같은 미국의 오만함과 일방주의를 상징했던 사건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체니의 손길이 뻗쳐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저명한 대통령 사가인 캘리포니아 대학의 로버트 달렉 교수는 “미국 역사상 체니만큼 독자적이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책 집행가는 없었다”면서 “비록 권좌 뒤에 있지만 그는 미국의 진짜 대통령이다”라고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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