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린 배 움켜쥐고 내일 향 해 뛴다
  • 송재우 (메이저 리그 전문가) ()
  • 승인 2006.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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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선수들의 메이저 리그 ‘3대 성공 비결’/기량 탁월· 헝그리 정신·히스패닉 급증
 
지난 3월3일부터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이 한국과 타이완의 경기를 시작으로 막을 올렸다. 이번 대회는 메이저 리그 사무국이 3년 전부터 야구의 세계화를 위해 야심차게 기획한 작품으로, 한국·일본·타이완과 멕시코 등 중남미의 메이저 리그를 포함한 최고 선수들이 출전하는 ‘야구 월드컵’의 효시로 보면 정확할 것이다.

대한민국 팀도 박찬호, 이승엽 등 주요 해외파 선수들과 국내 최고의 프로 선수들이 출전하여 다른 15개국과 18일간 기량을 겨룬다. 한국은 예상을 뒤엎고 일본에 대역전승을 거두며 3전 전승으로 이미 2라운드에 진출한 상황인데, 어느 정도까지 성적을 올릴지가 관심사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선수들이 자국 국기를 가슴에 달고 뛴다는 것은 야구 팬들에게 꿈의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선수 개개인에게는 자신의 조국에 뭔가를 기여할 수 있다는 동기 부여는 물론 몰려드는 스카우터들에게 기량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승엽과 같이 내년 시즌 메이저 리그 진출을 노리는 선수 혹은 무명 선수들도 최고 선수들이 경합하는 메이저 리그에서 부와 명예를 한번에 얻을 수 있는 찬스가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회가 결국 중남미 선수들의 독무대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16개 참가국 중 멕시코, 쿠바, 도미니카공화국, 푸에르토리코, 파나마, 베네수엘라 여섯 나라가 중남미 국가로 간주된다. 이들 중 파나마를 제외한 다섯 나라는 모두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다.

특히 어느새 메이저 리그 스타들의 산실이 되어버린 도미니카와 최근 몇 년 사이 신흥 강호로 급부상하고 있는 베네수엘라는 미국과 더불어 전문가들이 인정한 우승 0순위 후보들이다. 공산주의 국가로 프로 구단은 없지만 세 번의 올림픽 금메달을 포함해 지난 60여 년간 참가한 40개 세계 대회에서 무려 34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던 쿠바 역시 야구계의 영원한 강자이다. 근래 약간 주춤한 감은 있지만 푸에르토리코 또한 쟁쟁한 스타들의 보고이다.

도미니카, 메이저 리거 4백10명 배출

이렇게 중남미 출신 선수들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미 검증된 자원들이란 점이다. 도미니카의 경우 이미 메이저 리거 4백10명을 배출했고 마이너 리거까지 합치면 무려 1천5백명이 넘는다. 푸에르토리코는 2백15명, 쿠바 출신은 1백50명, 베네수엘라 출신은 1백81명에 달한다. 이들 중 이미 메이저 리그에서 최고 스타로 인정받는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선발 라인업 아홉 명 중 메이저 리그 올스타에 뽑히지 못한 선수는 단 한 명에 불과하다.

도미니카의 경우에는 사이영상(Cy Young Award·미국 프로 야구 투수로 맹활약한 사이 영을 기념해 1956년부터 시작된 상으로,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별로 그 해의 최우수 투수에게 수여함) 수상자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거포 매니 라미레즈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빠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홈런 48개를 친 시애틀 매리너스의 애드리안 벨트레 같은 선수가 6번 내지 7번 타순에 들어갈 정도니 어느 정도 파괴력을 갖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둘째는 이들 국가의 열악한 경제 상황이다. 이는 선수들의 헝그리 정신을 자극한다. 한마디로 야구를 잘해서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는 것은 이들에게 신분 상승을 뜻하고 자국에서 꿈도 꿀 수 없는 부를 가져다 준다. 지금은 은퇴 기로에 서 있지만 한때 메이저 리그를 대표했던 홈런 타자 새미 소사는 다섯 살 때부터 길거리 행상과 담배를 팔며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열 번이나 골드 글러브상(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포지션별 최고의 수비 선수들에게 주는데 1957년 첫 수상자를 냄)을 차지했던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고 수비율의 유격수 오마 비스켈은 자신의 맨손 타구 처리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한다. 야구공을 구할 수 없어 일반 자갈이나 심지어 병뚜껑으로 어린 시절 야구를 했다면 이들에게 글러브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자연스럽게 맨손 수비가 몸에 배었다는 것이다.

거의 대다수 중남미 출신 선수들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얼룩진 시간이었고 이들에게 야구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이자 최고의 기회인 것이다. 최근에는 상황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이같은 상황과 맞물려 미국 본토 유망주와 비슷한 급으로 평가받는 중남미 유망주들은 보통 훨씬 낮은 계약금으로도 계약이 가능하다는 것도 메이저 리그 팀들에게는 큰 매력 거리다.

선수들이 만약 메이저 리그에서 인정받는 스타로 성장했을 때 자신의 조국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경우도 흔하다. 1980년대 초반 돌풍을 몰고 왔던 멕시코의 투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지금도 멕시코 대통령과 같은 급으로 환대받는다. 결국 어린 선수들은 이같은 선수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구슬땀을 흘리며 내일을 향해 뛴다.

쿠바 선수, 목숨 걸고 ‘미국 상륙 작전’ 감행

반면 쿠바는 색다른 경우이다. 공식적으로 선수 계약을 할 수 없는 입장이라 거의 전적으로 망명 선수들의 영입에 의존한다. 말이 쉬워 망명이지 선수들은 목숨을 걸고 조각배에 몸을 싣고 험한 파도와 상어들과 싸워 이긴 자들이 얻는 달콤한 보상이다. 뉴욕 양키스에서 화려한 선수 생활을 영위했던 올랜도 에르난데스와 지난해 시카고 화이트삭스 우승의 주역 호세 콘트라레스 등이 이런 ‘보트 피플’ 출신이다. 이들 모두 쿠바 국가 대표팀 에이스 출신으로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각종 국제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숙소에서 도망쳐 망명을 신청하는 경우도 있다. 올랜도의 이복 동생 리반 에르난데스는 쿠바 청소년 대표 출신으로 청소년 세계 대회 기간 중 과감히 도주하였고 1997년 플로리다 우승의 견인차가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미국 내 급증하는 히스패닉, 즉 중남미 계통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팬 확보이다. 히스패닉은 코케이전, 즉 백인을 제외하고 두 번째로 많은 인구였던 아프리칸 아메리칸(흑인)의 인구를 이미 수년 전에 제치면서 막강 유권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이들을 더 이상 과거의 불법 이민자로만 치부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이미 미국에 오기 전부터 야구 팬이었으며 새로운 터전에서 이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자국 출신 선수들의 모습에 자연스레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중남미 출신 선수들의 활약은 새로운 이민자에게 활력소가 되고 구장으로 몰려들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결국 메이저 리그 구단이 중남미 선수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 메이저 리거의 25%가량이 해외 출신 선수들이다. 이들 중 60%가 도미니카 출신 선수들이다. 그 뒤를 베네수엘라·푸에르토리코 선수들이 차지하고 있다. 동양권 선수로는 1990년대 중반 박찬호와 노모의 뒤를 이어 한국과 일본 선수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최근에는 타이완 출신 선수들의 진출이 부쩍 잦아졌다. 하지만 아직 중남미권 출신 선수들의 비율에는 한참 못미친다. 가까운 미래에 동양권 선수들이 이들을 앞지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체격 조건, 헝그리 정신, 값싼 몸값 등 구단에서 원하는 요소를 두루 갖춘 중남미 선수들이 이번 WBC에서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기존 스타의 화려한 기량이 펼쳐지는 가운데 아직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새로운 중남미 출신 스타들의 탄생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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