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깊이 있는 잡지는 없다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6.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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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백50주년 맞는 <애틀랜틱 먼슬리>

 
한국인들 가운데 미국의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잡지 이름은 들어보았어도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ly)>라는 잡지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애틀랜틱 먼슬리>는 <타임>이나 <뉴스위크>처럼 미국 내는 물론 전세계에 수백만부씩 팔리는 대중적 잡지라기보다는 깊이 있는 시사 문제 해설은 물론 소설과 시, 문예평론 등에 관심 있는 미국 내 소수·고급 독자를 겨냥한 종합 월간 교양지이기 때문이다.

구독자는 37만 명에 불과하지만 이 잡지에 실리는 장문의 심층 분석 기사는 종종 미국 대통령의 사고에 영향을 줄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하다. 실례로 이 잡지의 외교 전문 기자인 로버트 D. 카플란이 지난 1997년 12월호에 기고한 ‘민주주의는 한순간에 불과했었나?’라는 장문의 글은,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 글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행정부 내에 카플란이 제기한 민주주의의 쇠락 문제를 다룰 실무팀을 구성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처럼 미국 여론 주도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온 <애틀랜틱 먼슬리>가 오는 11월 창간 1백50주년을 맞이한다. 1857년 봄 보스턴의 한 호텔 찻집에서 자주 회동하던 당대의 문필가 랄프 에머슨과 시인 헨리 롱펠로우 등은 미국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문학을 일반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는 잡지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 결실이 바로 <애틀랜틱 먼슬리>였다.

이 잡지는 출범 당시만 해도 문예지 성격이 강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정치·사회·경제 각 분야의 탁월한 글이 소개되어 미국 사회의 조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작가 마크 트웨인과 헬렌 켈러는 이 잡지를 통해 주요 작품을 발표했다. 유명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초기에 이 잡지에 시를 투고했다가 거절당한 일도 있다.

헬렌 켈러·루스벨트·케네디도 기고

또 마틴 루터 킹은 1963년 시민 불복종 운동의 당위성을 옹호한 글을 이 잡지에 기고해 흑백 차별이라는 민권 운동의 불을 지폈다. 그뿐 아니다. 우드로 윌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도 한때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이 잡지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애틀랜틱 먼슬리>의 지면 곳곳에 미국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고 해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 미국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애틀랜틱 먼슬리>가 요즘 한창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우선 지난해 산실이자 동부 지식인층의 요람이라 할 보스턴에 있던 본사를 수도인 워싱턴으로 옮겼다. 브래들리 사주는 본사를 워싱턴으로 옮기면서 편집 방향도 일부 수정했다. 종전까지 이 잡지의 문예지적 권위를 더해주던 단편 소설란을 없애고 대신 카플란의 기사처럼 장문의 분석 기사 지면을 대폭 늘렸다.

 
또 다른 변화는 새 편집장 발탁이다. 브래들리 사주는 본사 이전과 함께 최근 전임 마이클 켈리가 그만둔 뒤 약 3년간 공석으로 남아 있던 편집장 자리에 뉴욕 타임스의 중견 기자인 제임스 베네트(39)를 발탁했다. 예일 대학 출신으로 1991년 뉴욕 타임스에 입사한 베네트 기자는 정치부에서 오랫동안 활약했고 중동의 핵심 포스트인 예루살렘 지국장을 지내는 등 뉴욕 타임스 내 요직을 두루 거친 민완 기자이다. 브래들리는 켈리가 편집장 직을 박차고 일선 취재 무대로 복귀한 직후부터 후임자를 찾기 위해 미국 전역의 내노라 하는 언론인 80명을 직접 면담해 후임을 고른 것으로 알려졌다. 베네트는 “위대한 필진과 편집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이며 또한 진지한 장문 형태의 저널리즘을 계속 추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편집장 직을 받아들였다”라고 수락 소감을 밝혔다.

 사실 베네트의 지적처럼 미국에서 수만 자가 넘는 장문의 저널리즘을 추구할 수 있는 매체로 <애틀랜틱 먼슬리>처럼 좋은 잡지도 없다. 평균 1백50쪽에 달하는 이 잡지는 특정 이슈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독자들에게 사물을 새롭게 보는 안목을 제공하는 장문 기사를 자주 실어왔다. 2001년 9월11일 뉴욕에서 발생한 테러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무너진 직후 사건 현장(그라운드 제로)이 기자들에게 철저히 봉쇄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현역 기자로는 유일하게 사건 현장 취재가 허용된 이 잡지의 윌리엄 롱가비스 기자는, 폐허로 변한 현장에서 무려 5개월간 머물며 철거 작업을 벌이던 인부들과 피해자 가족 등을 취재해 이 잡지 사상 최대의 장문이라 할 7만 단어에 달하는 심층 기사를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02년 7월호부터 3회에 걸쳐 ‘미국의 밑바닥(American Ground)’이란 제목으로 실린 이 기사로 인해 <애틀랜틱 먼슬리>는 잡지계의 최고봉이라는 명성을 재확인한 것은 물론이요, 10년 만에 부수가 최대로 증가하기도 했다. 
<애틀랜틱 먼슬리>에는 롱가비스 같은 출중한 작가가 한 둘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카플란은 가장 최근의 저서인 <승자학(원제·Warrior Politics)>을 포함해 국제 문제 관련 저서 아홉 권을 펴낸 특급 외교통으로 꼽힌다. 뉴욕 타임스의 외교 전문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조차 그가 냉전 이후 가장 탐독하는 작가로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스 홉킨스 대학 교수, 새무얼 헌팅턴 하버드 대학 교수, 폴 케네디 예일 대학 교수와 함께 카플란을 꼽았을 정도다.

9·11 테러 현장 5개월간 단독 취재해 보도

또 1979년부터 1996년까지 이 잡지의 워싱턴 지국장을 지낸 데 이어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영향력 있는 시사 주간지 <뉴에스유스엔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한 제임스 팰로우즈도 장문 저널리즘의 독보적 존재로 꼽힌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4년간 지낸 경험을 근거로 그가 <애틀랜틱 먼슬리>에 기고한 뒤 훗날 책으로 펴낸 <우리보다 더 닮은(More Like Us)>은 당시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예리하게 분석한 명저로 꼽힌다.

 
지금까지 다섯 권의 저서를 펴낸 팰로우즈는 지금도 종종 사회적 논쟁 거리를 제공하는 장문의 기사로 유명하다. 가장 최근의 일례로는, 지난해 12월호 <애틀랜틱 먼슬리>에, 재건 작업이 한창인 이라크에서 왜 군대 창설이 험난한지, 이라크 주둔 미군의 철군이 왜 쉽지 않은지를 분석한 기사였다. 이 기사가 실리자마자 서점마다 매진 사태가 벌어졌는가 하면 공영 방송인 NPR과 세계적 뉴스 전문 채널인 CNN 등이 앞다투어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쟁쟁한 필진 덕분에 <애틀랜틱 먼슬리>는 매년 미국잡지협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잡지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문·잡지들과 마찬가지로 이 잡지 갈수록 신문·잡지 등 ‘종이 매체’ 시장이 좁아지고 있는 시대 조류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다. 1999년 부동산 거부인 모티머 주커먼으로부터 1천만 달러(약 97억원)에 이 잡지를 사들인 브래들리 사주는 잡지 인수 뒤 아직 적자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브래들리는 인수 후 지난 6년간 3천만 달러(약 2백90억원) 이상을 투입했지만 현재도 매년 4백만~8백만 달러(약 39억~78억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브래들리는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컨설팅 회사의 최고 자문진을 투입해 흑자 반전을 꾀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컨설턴트들은 광고주를 지금보다 더 끌어들이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런데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장문의 기사일 경우, 광고주의 스폰서 형태로 막대한 취재비의 일부를 충당하도록 하되 기사 내용에 관한 한 광고주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대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백50년 전통을 자랑해온 이 잡지가 어떻게 변신을 꾀할지에 대해 많은 미국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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