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탐욕이 빚은 종이 매체의 대참살
  • 표정훈 (출판 평론가)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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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책] <사라진 책의 역사>/수난 낱낱이 기록

 
 ‘프놈펜에서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미친 듯이 끌어냈다. 1차 목표는 국립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안마당에 불타버린 종이 산이 만들어졌다. 그 더미에는 미처 다 연소되지 않은 붉은색, 초록색, 흰색 표지들이 보였다. 찢어진 종이쪼가리가 계단과 바닥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세계 곳곳에서 학자들이 일부러 찾아와 참고하던 귀한 책들이 구둣발에 밟히고 전날부터 내린 비로 축축해진 땅에 떨어져 젖거나 진흙을 뒤집어쓴 채 찢어졌다. 그런 책들이 정원과 도서관 건물 앞 거리에까지 마구 떨어져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폴포트 정권이 저지른 만행은 인간을 대량 학살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이처럼 책도 대량 학살했다. 불교 관련 연구소 한 곳에서만 크메르어와 팔리어 불교 문헌 7만 점을 불태우기도 했다니, 가히 책의 대참살이라 할 만하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인 저자는 인류 역사를 통해 책이 당한 수난의 사례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되짚어 본다. 물론 자연 재해나 인간의 실수로 인한 책의 파괴도 있었지만, 종교적 대립이나 정치적·군사적 갈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고, 특히 권력자의 탐욕에 책이 희생당한 때도 많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파괴해 성서 원본 등 소실

이를테면 파라오 시대의 고대 이집트 문명이 파피루스에 기록한 문헌 가운데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왕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고(古)왕국 시대의 책들을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캄비세스는 이집트 신상을 부수고 신전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이집트 기록 문화의 성취를 불을 질러 파괴했다. 저자가 인류 최대의 손실로 지목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는,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자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로아스터교에 관한 문헌, 바빌론의 역사 문헌,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성서의 원본 등이 남아 있었다면 인류 기록 문화의 소중한 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이 문헌들이 모두 재로 변했다.

캄보디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책의 파괴가 고대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를테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를 침공한 나치 독일군은 톨스토이 박물관에서 책을 불태우려 했다. 러시아의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한 조치, 그러니까 난방용으로 책을 불태우려 했던 것이다. 박물관 직원은 나무를 해서 땔감으로 쓰자고 했지만 독일군의 반응인즉 이러했다. “나무로 불을 땔 필요는 없소. 우리는 당신 네 톨스토이의 이름과 관련이 있는 건 뭐든지 다 땔감으로 쓸 생각이오.” 이 정도면 파괴 그 자체를 위한 파괴, 악랄하기 짝이 없는 파괴에 가깝다.

전란이 많았던 우리 역사에서도 책은 수난을 피할 길이 없었다. 저자는 한국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일종의 보론으로 추가되어 있는 글에서, 이춘희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고려 시대 거란의 침공을 가장 큰 수난사로 지목한다. ‘가장 큰 피해는 현종 2년인 1011년 거란군이 수도 개경에 침입했을 때였다. 궁궐과 인가가 모조리 파괴됐다. 당시 개경에는 헌종 이전부터 책을 다루는 문덕전(文德殿) 등과 같은 왕실 문고들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그 태반이 이 전란 중에 파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서관의 탄생과 함께 책의 약탈 시작

저자는 도서관의 탄생에 관해 사뭇 독특한 견해를 내놓는다. 세상의 지식을 한 곳에 모아 모두 소유하겠다는 인간의 욕망은 신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원초적인 욕망이며, 그 욕망 때문에 도서관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도서관의 탄생과 함께 책의 약탈과 파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책을 가능한 한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과, 내가 정복하려는 적이 소유한 책은 모두 파괴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갈마드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린다면 에로스와 타나토스, 요컨대 책에 대한 사랑과 책의 죽음과 파괴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인가?

저자가 걱정하는 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책의 대량 파괴 못지않은 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디지털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종이 책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이유 있는’ 걱정이다. 종이 책이 사라지고 모든 책이 디지털화한다면, 그래서 모든 도서관이 이른바 디지털 도서관이 되어버린다면, 책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열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종이 책을 계속 보전하려는 노력도 디지털화가 빨라질수록 더 늘어나지 않을까? 비록 그 노력이 결국 헛된 것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페이지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이 가득한 책, 그래서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심심파적으로 들춰 읽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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