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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러시아 음악 잔혹사’

3류·짝퉁 연주단 공연 탓에 ‘진품’도 홀대…음악 박사 학위 받은 한국인 없어

유혁준 (음악 칼럼리스트) ㅣ 승인 2006.03.24(Fri)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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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고 수준인 러시아 음악이 외면당하고 있다. 위는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전용 콘서트홀인 모스크바 음악원 그레이트홀.  
4년 만에 한국에 온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었던 지난 3월19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모스크바 필은 차이코프스키에 관한 한 역시 세계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며 러시아 음악의 진수를 펼쳐보였다. 하지만 객석은 이상하리만큼 한산했다. 바로 전 날 런던 심포니의 연주회 때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최초로 한국을 찾아 선풍을 일으켰던 모스크바 필의 인기가 시들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구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 동구권 연주자의 내한 공연은 봇물을 이루었다. 이 중에는 마린스키 극장이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도 있었으나, 2·3류급 연주 단체가 ‘저품질 연주’를 해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

언론도 한몫 거들었다.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고 해당 기획사가 건네준 보도 자료만을 토대로 ‘세계적’이니 ‘정상급’이라는 수식어를 남발했다. 대부분의 연주자와 악단이 ‘인민 예술가’ ‘공훈 예술가’ 칭호를 달아야 인정받는 분위기였고 ‘국립’ 단체는 필수였다.

3년 전에는 이른바 ‘가짜 모스크바 필’ 사건이 터졌다. 엉뚱한 오케스트라를 초청해 놓고 영문 이름이 비슷하다고 해서 모스크바 필하모닉이 내한했다며 버젓이 홍보 자료를 돌리고 표를 팔았다. 이런 경우 필연적으로 국내 협연자는 주최측에 돈을 내고 ‘프로필 부풀리기용’ 연주회를 하고 해당 기획사는 부족한 예산을 채운다. 이듬해에는 러시아의 한 음악원 오페라단이 한국에서 그 도시의 ‘국립 오페라단’으로 둔갑해 공연을 진행하다 들통 나 홈페이지가 폐쇄되고 예약한 표를 전액 환불해주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03년 ‘운동장 오페라’가 정점을 이루던 시기에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오페라 ‘아이다’ 공연의 경우, 이 무대의 오케스트라는 다름 아닌 우크라이나 국립 오케스트라였다. 호세 쿠라 등 최고의 이탈리아 출신 가수를 모아놓고 정작 반주는 러시아 쪽의 생소한 오케스트라에게 맡긴, 그야말로 쌩뚱 맞기 짝이 없는 촌극이었다. 필요 없는 곳에 돈을 쏟아붓다보니 정작 중요한 오케스트라는 싼값에 쓴 것이었다. 결국 연주력에 문제를 보였고 이 오페라를 기점으로 야외 오페라는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나라 러시아는 세계 음악계의 당당한 한 축이다. 유럽에서 세 번째로 생긴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차이코프스키가 1회 졸업생이었고,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므라빈스키 등 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최고의 명문이다. 모스크바 음악원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국내의 일부 몰지각한 기획사와 사설 음악학원이 가짜 러시아 음악 학위를 사고 판 것은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어렵게 된 상황을 틈타 ‘음악 강국’을 철저히 돈벌이에 이용한 경우이다. 하기야 여름방학에 마스터클래스에 초청된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가 모텔에서 잠을 자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을 정도이니(대부분 거장급 연주자인 이들은 러시아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러시아의 교육 체계를 알고 있다면 이번 사기 사건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러시아는 음악원 위주의 고등음악 교육체계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 학생은 전액 국비 교육이므로 입학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개방 후 외국 학생이 돈을 내고 입학하고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볼쇼이’만 붙으면 최고인 줄 아니…

러시아 고등음악 교육 체계는 5년간의 엄격한 수업을 받으면 ‘마기스트라(석사)’ 학위가 수여된다. 그리고 2년 간의 ‘아스피란트(Aspirant)’라 불리는 연주박사 과정이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콘체르트엑사멘(Konzertexamen)’과 비슷한 전문 연주자 양성 과정이다. 다만 논문 제출이 추가된다. 학술적 박사학위(Ph.D)는 최소 3년 이상을 열심히 공부해야 취득할 수 있는 난코스로 소문 나 있다. 공식적으로 아직 한국 유학생은 이 학위를 받은 적이 없고, 러시아 학생도 극소수만이 도전한다. 미국쪽 박사학위보다 훨씬 따기가 어렵고 까다롭다.

2001년 필자가 만난 블라디슬라브 체르누센코 전 상트 페테르부르크 총장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돈만 있으면 우리 학교 졸업장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한국에 퍼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유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기 실력과 기본 소양보다는 디플롬(학위)에 목적을 두고 있는 한국 학생들이 있다.”

이번에 불거진 러시아 ‘가짜 박사 학위’ 사건은 재정적으로 힘든 러시아의 음악원을 돈으로 이용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는 현재 유학생도 엄격한 졸업 심사를 거치게 되어 있지만 지방의 경우 아직 시스템이 느슨하다. 이들이 돈으로 산 학위는 사실 박사 학위도 아닌 ‘아스피란트’ 과정이었다. 그것도 2년 이상 현지에서 공부하고 받은 것이 아니라 방학을 이용해 편법적으로 사들인 것이었다. 차제에 정부는 석사와 박사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연주 박사’에 대한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음악의 도시 빈에는 빈 국립음대에 60명이 채 안 되는 한국 유학생이 있다. 하지만 이 수치의 10배에 해당하는 예비 유학생이 입학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국내 음대의 실패한 교육이 낳은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석·박사 학위 인정을 위한 법안이 다른 음학대학의 반대로 아직 계류 중이라 한다. 제대로 된 교육을 인정하지 않고 학벌과 학위 위주의 관행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음대가 있는 한 제2의 ‘가짜박사’는 얼마든지 나타날 것이다.

그 사이 러시아 연주단체의 공연은 가짜가 많고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모스크바 필과 같은 ‘진품’까지 외면당하고 있다. ‘볼쇼이’만 붙으면 최고인 줄 아는 우리 공연계도 잘못이다. 사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카펠라 합창단과 모스크바 챔버 콰이어가 거의 매년 내한하는 ‘볼쇼이 합창단’보다 러시아와 세계 무대에서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제대로 된 1급 러시아의 공연물이 이제라도 국내에 소개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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