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숫자를 잡아라”웃돈 붙은 번호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3.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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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기 쉬운 전화번호 사업자에 각광∙∙∙‘권위형’차번호는 사정 여파로 ‘퇴물’

 올해초 홍콩 재무장관은 자기 관용차를 9백50만 홍콩달러(약9억5천만원)를 받고 한 실업가에게 넘겼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판 것은 그의 차에 붙은 차량번호 ‘2’이다.  1번 번호판은 경찰청장이 타는 관용차에 붙어 있다.  홍콩에서는 이 번호의 값이 적어도 1천만 홍콩달러가 넘을 것으로 본다.  최근에는 경찰 관용차에 붙은 이 값비싼 번호를 팔아서 그 돈으로 공공사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과, 경찰 총수로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에게 팔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출생신고 때 붙는 주민등록번호에서부터 죽어 묻히고 나서 무덤에 붙는 묘지 번호까지 사람은 번호와 평생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번호는 종종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미신적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단순한 기호에서 특별한 의미로 격상된 번호의 위상은 국회 의원회관 주차장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의원들의 차 번호판마다 거의 ‘눈에 띄는’ 번호를 확보하려고 애쓴 흔적이 남아 있다.  외기 쉬운 3000이나 5656 5060, 좋은 번호로 꼽히는 구구단형 8756이나 9545들이 그것이다.  의원들은 차량번호뿐 아니라 전화번호도 특별한 것을 선호한다.  숫자가 중복되어 기억하기 쉬운 것이 주류를 이루는데, ㄱ 의원의 6666, ㅂ 의원의 9090, 다른 ㄱ 의원의 0505, ㅈ 의원의 3131, 6161, o 의원의 1234가 여기에 든다. 국회의원중 이처럼 특별한 전화번호를 갖고 있는 사람은 50여 명에 이른다.

전산 처리 차량번호 “권위 개입 못한다”
 한 국회의원 비서관은 이처럼 국회의원들이 특별한 숫자에 집착하는 현상에 대해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듯 4년마다 있는 선거에 이겨야만 하는 의원들은 자기가 쓰는 차량과 전화의 번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이 특수번호는 군위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외우기 쉬운 번호가 권위로 격상하는 것은, 이러한 번호에 대한 수요가 많고 공급이 적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을 행사해 이를 취득했다는 점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자동차번호는 각 시.군.구에서 발급하고 있다.  원래는 자동차관리사업소에서 하던 일인데, 작년부터 몇 번에 걸쳐 이관됐다.  자동차번호는 ‘서울1 가 1234’와 같은 형식인데, 관할 시도명 뒤에 붙는 숫자는 승용차(1,2,3,4) 승합차 (5,6) 화물차 (7,8) 특수자동차(9)등 차의 종류를 나타내는 차종 기호이다.  한글 가나다로 나타내는 용도 기호는 현재 비사업용에 ‘가-마’ ‘거-머’ ‘고-호’ ‘구-후’ ‘그-흐', 시내버스나 택시 등 사업용에는 ’바-하‘가 붙는다.  대여사업용 자동차(렌트카)는 모두 ’허‘기호를 달게 되어 있다.
 그 외 군사용 차량은 ‘육’ ‘공’등의 기호를 다는데, 이는 국방부에서 관리한다.  또 ‘외’(외교관) ‘영’(영사) ‘준’ (준외교관)‘협’(협정국) ‘국’(국제가구) 같은 기호를 다는 차량은 외무부 소관이다. 

 뒤의 숫자 네자리는 각 시. 군. 구에서 지정한다.  현재는 번호 발급 과정이 완전히 전산 처리되고 있다.  자동차를 새로 사서 등록하는 경우 차주의 주소 성명과 차량의 제원 형식번호를 입력한 후 무작위로 번호를 전산 추출하여 나오는 번호를 달게 된다. 

 차량번호를 발부하는 실무자들은 이처럼 차종 기호나 용도기호가 정해져있고 숫자도 전산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권위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고 말한다.  교통부의 담당자는 “시도 단위로 전산망이 완비된 90년 9월 이전에는 일부 특혜나 청탁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관용차까지 완전히 전산 처리하기 때문에 아예 그럴 가능성이 없게 되었다”라고 강조했다.  권위를 과시하며 굴러다니는 특수 번호차량은 몇해 전에 발부된 번호를 활용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요즘과 같은 ‘사정 정국’에서는 특혜를 받았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이같은 좋은 번호를 오히려 피하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인기 전화번호 ‘부르는 게 값’
 전화번호의 경우는 좀 다르다.  좋은 번호를 가지는 것이 영업과 직접 연결이 되기 때문에 많은 ‘특혜’신청이 각 전화국으로 몰린다.  전화국에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해 전화번호를 발부한다.  서울 혜화전화국의 한 직원은 “기억하기 좋은 전화번호가 무작위적으로 가정집으로 배당되기보다 번호를 희망하는 업체에 배당되기보다 번호를 희망하는 업체에 배당되는 것이 전화의 활용가치를 높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특별한 번호를 원하는 신청이 있으면 이를 감안해 번호를 배당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통신에서는 신청자가 폭주하는 2424번호 하나만을 추첨으로 배당하고 있다.  주로 이삿짐 센터나 운송업체가 이 번호를 적극 희망하는데, 번호가 나오면 운송업 단체에 공문을 보내 원하는 업체가 신청하도록 알린다.  신청이 들어오면 경찰관이 입회한 가운데 은행알로 추첨해 배당한다.  워낙 신청하는 사람이 많아 경쟁도 치열한데, 매회 경쟁률은 20대 1에서부터 높게는 1백 대 1까지 된다. 

 다른 전화번호는 이같은 공식 경쟁 통로가 없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입수하러 나선다.  주로 이미 발급된 전화번호를 입수하러 나선다.  주로 이미 발급된 전화번호를 사는 수가 많은데, 이 경우는 부르는게 값이다. 

 한 자동차 업체는 애프터서비스 센터 전화번호를 외우기 쉬운 것으로 정했다.  새로 나오는 전화번호만으로 충분치 않아 이미 가정집에 개설된 번호를 사려고 섭외했으나 값이 맞지 않아 몇 지역은 개설하지 못한 상태다.  xxx-7777번 전화를 갖고 있는 서울 성북구의 한 시민은 가전 업체에서 서비스 번호로 쓴다고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와 팔라고 졸랐다고 한다.  그는 어렵게 얻은 번호를 팔 수 없어 거절했다.  어떻게 그 전화번호를 얻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xxx-3000번 전화를 가진 ㅈ 씨는 몇해전에 전화국에 근무하는 친척을 통해이 전화번호를 얻었다. 3000번 전화는 주로 서울시내 각 수도사업소 민원실이나 당직실 전화로 많이 나갔는데, 이 때문에 이 집에는겨울이면 한밤중에 수도관이 얼어 터졌다는 신고가 종종 들어오기도 한다. 인근에 어떤 은행의 지점이 개업할 때는 전화를 팔라는 부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는 “직접 거래하지 않아 모르지만 적어도 1백만원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화번호나 차량번호 모두 좋은 번호란 외우기 쉽고 상징성이 있는 것들이다.  1234나 6789처럼 나열형인 것, 6666처럼 똑같은 숫자인 것, 2918 5840과 같은 구구단형인 것, 3737처럼 중복형인 것,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지만 자기의 생년월일이나 주민등록번호와 일치하는 것은 누구나 대체로 선호하는 번호이다.  4444처럼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번호도 장의업체에서는 구하지 못해 안달이다.

쉬운 번호는 장난전화 표적되기도
 그런가 하면 좋은 번호를 기피하는 사례도 많다.  자동차번호는 남의 눈에 쉽게 띈다는 점을 오히려 꺼림칙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외우기 쉬운 전화번호는 장난 전화의 목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자동차관리사업소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제작하는 이창기업의 김용원 부장은“자동차번호가 권위의 상징이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좋은 번호를 갖고 있다고 누가 우러러봐 주지도 않는다.  좋은 번호를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대착오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개인의 삶에 1대 1로 대응되는 번호 속에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속성과 자신을 감추려는 속성이 함께 담겨 있다.  게다가 숫자에 자신의 운을 맡기려는 ‘주술’까지 들어 있다.  한갓 기호에 불과한 아라비아 숫자에 깃든 허영과 기복 심리는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욕망과 허세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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