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種泌은 왜 金泳三 선택했나
  • 김재일 정치부 차장 ()
  • 승인 1992.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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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대선 승리위한 ‘차선의 결론’…“막판에 밀어야 효과 크다”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은 지난 8일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서울 청구동 자택에서 측근 5명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김최고위원은 이날로 총선 후 2주 동안의 칩거를 끝냈다. 그는 그날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단 둘이 저녁식사를 했고, 그 길로 하얏트 호텔로 가 김영삼 대표와 회동했다. 다음날 김최고위원은 당사에 나와 “참된 자유경선 지지·결과에 절대 승복·경선 불출마” 등을 내용으로 한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고 업무를 재개했다.

  김최고위원의 본심에 대해 해석이 엇갈리는 상태에서 그가 측근들과 나눈 대화 내용은 그의 선택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판단자료가 될 것이다. 8일 낮 5시간 동안 그 자리에 있던 한 측근에 따르면 김최고위원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공화계가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 것은 첫째 내 잘못이고, 둘째 지구당 위원장들의 책임이다. 지구당 관리를 하지 못했는데도 나를 계속 지지해준 부여 지역구민들이 고맙다. 은혜를 꼭 갚겠다.” “김만제씨는 괜찮은 사람인데 안기부가 버려놨다.”

  그리고 ‘5·16 거사’를 준비할 때의 비밀회동 장소는 청계천 소재 술집 ‘상수’였으며 그때 사용한 암호가 ‘흐루시초프’였다는 등 과거 얘기를 한동안 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화제는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왔다. 그는 청와대 참모, 그중에서도 특히 손주환 정무수석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현안에 대한 심중을 드러냈다. 김최고위원은 김영삼 대표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자신을 제외시키고 노대통령과 김대표가 전당대회에 관해 내린 결정에 대해 심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는 또 “집권당에서 무슨 경선이냐, 대통령후보는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7공화국 창출 주도하겠다”

  김최고위원이 김영삼 대표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할 것으로 판단한 한 측근이 “박태준 최고위원이나 이종찬 의원이 김최고위원의 지원을 기대하는 것 같은데 어느 쪽을 지지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김최고위원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 두사람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박최고위원이 기업을 좀 운영했다고 정주영씨와 다를 것이 뭐 있나. 이종찬 의원은 김대중 대표를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이의원을 밀면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많은 사람이 나와 당이 사분오열된다.”

  그는 “모두에게 줄 것처럼 해야 많이 찾아오는 것 아니냐”고 농담처럼 말하고 “물을 주더라도 막판에 주겠다. 정치란 최선 아니면 차선을 택하는 것이다. 대의원을 똘똘 말아 준비했다가 차선을 선택하더라도 따라 달라”고 측근들에게 요청했다. 이상이 그 자리에 있던 한 측근이 전한 내용이다. 그는 김최고위원이 김대표에 강한 불만을 가졌으면서도 김대표 지지를 결심한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고 말했다.

  김최고위원이 노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난 직후 김대표와 회동한 사실과 당무를 재개하면서 “비판과 반대는 다르다”고 말하며 예전의 반김영삼 입장을 외형적으로나마 중립으로 수정한 사실을 놓고 전당대회 때까지 ‘김대표 발목잡기’라는 시각도 있다. 적지않은 민주계 의원들은 김최고위원이 노대통령과의 묵계 아래 김대표와 민주계를 전당대회장까지 끌어들이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김최고위원이 측근들과 나눈 대화를 감안하면 그의 변화된 입장은 바로 그의 심중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결심이 섰다”면 바로 전날 청구동 분위기와 연관시켜볼 수 있다. 그는 이미 김대표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김최고위원은 원래 5월에 전당대화를 열더라도 총재만 뽑고 대선 몇달 전에 임시 전당대회를 열어 대통령후보를 선출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과 만난 후 전당대회 시기뿐 아니라 경선에 의한 대통령후보 선출까지 승복했다.

  여권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이렇게 추측한다. 청와대 회동에서 노대통령은 이미 몇번씩이나 ‘완전 자유경선’을 선언한 마당에 김대표를 명시적으로 지지 할 수 없음을 밝히고 김최고위원에게 거중 조정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김최고위원이 김대표 지지를 이미 결심했으나 “마지막에 물을 주어” 선택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 한다고 분석한다. 또 한가지 김최고위원은 그의 섣부른 김대표 지지가 반김대표 진영의 결속을 가속화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입장표명을 늦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청와대 회동 후 김최고위원의 행보는 빨라졌다. 일요일인 12일에는 노대통령·김대표·박최고위원·이원경 전당대회 의장등과 골프를 친 후 박최고위원과 다시 회동했다. 그는 대권경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민자당 계파간의 첨예한 갈등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김영삼에 초점을 맞춘 대세몰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최고위원은 선거 후 장기간 칩거하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서 제7공화국 창출에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고 측근에 밝힌 바 있다. 김최고위원의 행보와 더불어 혼미한 양상을 보이던 경선 정국의 가닥이 웬만큼 잡혀간다는 것이 정가의 어느 정도 일치된 시각이다. 정치감각이 뛰어난 김최고위원은 총선 결과 ‘분대장’으로 전락했으나 복잡하고 미묘한 당내 역학구도를 활용해 자신의 주가를 최대한 높이고 역할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종필, 총선 직후 폭탄선언 준비

  이와 함께 김대표와 김최고위원 사이에 권력분점, 즉 후보와 당권 분리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을 것으로 보는 관측도 있다. 이에 대해 김최고위원의 한 측근은 “김최고위원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당의장·총리 등 안해본 것이 뭐 있는가. 그는 이제 역사적 평가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 측근은 김최고위원이 권력분점 자체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자리를 제안받고 움직일 그가 아니라는 것이다. 총선 후 김최고위원은 “백의종군하면서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처럼 JP학교를 만들어 후배 양성에 진력하겠다”는 폭탄선언을 준비했었다고 전한다.

  그 측근은 김대표가 김최고위원의 지원을 얻어려면 자리를 제의하지 말고 근본적인 매듭을 풀어줘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김대표가 김최고위원에 실수한 것이 많다고 지적한다. 그는 “총선 결과 공화계의 세가 현격하게 줄어들자 김대표가 김최고위원을 무시했다가 이제 다급하니까 사정한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3당 합당 전만 해도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는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과 합당을 시도하면서 영원한 우정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김대표의 내각제 합의 파기 이후 두사람의 관계는 극도로 냉각됐고 김최고위원은 민정계 대다수과 함께 반김영삼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측근은 김최고위원이 김대표에 대해 반감은 가지고 있으나 “그는 정치인”이라고 말한다. 원칙만 합의되면 차선도 선택하며 적과도 제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김최고위원이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철저한 과정론자임을 강조한다.

  권력분점에 관한 김대표측의 입장은 어떤가. 총선 전에도 김덕룡 최형우 황병태 강삼재 의원 등 김대표의 측근들은 권력분점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인 입장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표가 대통령후보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함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황병태 의원은 김대표가 권력분점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지금 김대표는 대통령후보가 되기 위해 김최고위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권력분점에 관한 논의는 매우 현실적인 사안이다.

  김최고위원의 당권 담당 카드를 비현실적으로 보는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자당 사무처의 한 민정계 직원은 “김최고위원에게 당권을 주면 최대 계파인 민정계는 뭐냐. 가장 작은 계보를 거느린 김최고위원은 당권을 잡아봐야 당을 통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한 공화계 직원은 “최대 계보인 민정계는 결속력이 없다. 그들은 어차피 권력을 가진 쪽으로 쏠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실 민주계나 공화계는 민정계를 우습게 본다”고 반박한다.

 

‘단일지도체제·당 2역 경선‘ 추진

  만약 권력분점이 이뤄진다면 김최고위원이 어떤 위상으로 어느 정도까지 당권을 관장할 것인가 하는 점이 관심거리다. 총재를 맡느냐, 아니면 지금의 김대표와 같은 역할을 맡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이와 함께 현재 작업중인 민자당의 당헌·당규 재정 방향을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한 민자당 소식통에 따르면 ‘당헌·당규 개정 소위원회’는 현재의 최고위원 제도를 단일지도체제로 바꾸는 방향으로 작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4공화국 때의 민주공화당처럼 당의장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이밖에 원내총무와 정책위의장을 경선으로 선출하는 방법도 검토되고 있다. 따라서 만약 김최고위원이 당권을 쥔다면 당의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김대표가 실수를 자인하고 사과했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설득했든지 간에 현 시점에서 김최고위원은 김대표쪽으로 기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민정계의 후보 단일화가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대통령선거에서의 승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측근은 설명한다.

  지금까지 그가 내세운 명분과 논리대로라면 그는 이종찬 의원을 밀 것처럼 보였다. 김최고위원은 ‘중부권 역할론’을 내세우면서 영호남 지역감정으로 인한 정치 양극화 현상의 극복을 주장해 왔으며 ‘세대교체론’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1백80도 방향을 바꿔 김대표 지지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측근들은 김최고위원의 방향 선회는 그의 정치 스타일에 비추어볼 때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른 정치인이 ‘너 죽고 나 살자’식이라면 김최고위원은 ‘너 살고 나 살자’식으로 공존의 원리에 철저하다는 것이다. 그는 10월 유신 때도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나중에는 “국가 안전과 민생 혼란을 막기 위해” 유신을 지지했다. 이번에도 김최고위원은 “국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면서 종전의 입장에서 돌아섰다. 김최고위원은 근본적으로 대세에 순응하는 정치인이라고 측근은 말한다.

  김최고위원이 김대표를 밀면 어떻게 될까. 그의 김대표 선택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녀 많은 관망파 의원들을 김대표쪽으로 쏠리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선택에는 노대통령의 의중이 실린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선택은 ‘김영삼 대세론’을 그야말로 대세화시킨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행사할 ‘김종필 카드’는 그 무게가 어느 때보다도 묵직하다고 할 수 있다. 민정계의 한 사무처 직원은 김최고위원이 김대표를 민다면 1차경선에서 상황이 끝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김최고위원의 빠른 발걸음과 중재 노력으로 경선 정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그의 선택은 실제로 반김영삼 진영을 흔들어 지리멸렬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더욱 결속시킬 것인가. 민자당 대권경쟁 드라마가 종막을 향해 치닫는 지금 김최고위원의 행보는 정국의 초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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