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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미국정책 ‘실리주의’로

경제난ㆍ고립 벗어나려…외교ㆍ경제 분야 신세대 관료가 주도

한종호 기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1992.05.07(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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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대미정책은 실리ㆍ실용주의 노선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느낌이다.

 민족통일연구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해방 이후의 북한-미국 관계는 미소냉전과 함께 시작된 적대관계기(48~69년)를 거쳐 70년대에 인민외교추진기(69~74년)가 시작됐다. 미국 공산당 프레드만 의원이 평양을 방문하는 등 상호 접촉도 많아졌다. 74년 12월 미-중국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양측은 정부간 접근교섭기(74~80년)에 들어섰다. 북한은 북미평화협정을 내놓았고 하비브 국무차관은 남북 유엔가입 및 4강 교차승인을 제안했다.

 80년대 들어 솔라즈 하원의원과 레스턴 국무성대변인의 방북에 이어 83년 미국무부는 북한 외교관에 대한 비공식접촉을 허용했다. 85년에는 김영남 외교부장이 마침내 미국 땅을 밟았다. 88년 7.7선언 이후 레이건 행정부는 획기적인 대북제재완화 조처를 발표하고 그해 말부터 북경에서 참사관급 접촉이 시작됐다. 그 ‘북경 밀회’는 지금까지 21회에 걸쳐 계속되고 있다.

 사실 그간의 숱한 접촉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또 그동안에는 이것이 북ㆍ미관계의 의미있는 변화로까지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도 않았다. 북한 대외정책의 변화가 관심의 초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91년 5월27일 북한이 돌연 유엔가입 방침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무렵부터 북ㆍ미 접촉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수교가 임박한 게 아니냐는 성급한 해석도 나돌았다.

 북한이 이처럼 미국에 대한 공격적 태세를 누그러뜨리고 화해분위기 조성으로 돌아선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경제난해소△외교적 고립 돌파△평화ㆍ군축 공세로 주한미군 철수 유도△후계체제 강화 등을 꼽는다.

 북한의 대미정책 변화는 외교정책 결정과정 자체의 변화와 함께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柳吉在(34) 책임연구원은 이를 한마디로 ‘당 기능의 축소ㆍ국가기구의 역할증대’로 요약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은 정치ㆍ사상 분야를, 국가기구는 운영ㆍ집행을 각각 맡는다. 사회주의 건설의 초기 단계에서 당은 모든 것을 새롭게 결정해야 하고 전체 인민대중에게 이를 전파해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그런데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혹은 기존 방식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힘을 발휘하는 곳은 전문인력이 모여있는 국가 기구이다. 이같은 현상이 북한에서도 나타나 80년대 들어 당ㆍ정의 기능분화가 뚜렷해졌다. 특히 경제ㆍ외교 분야처럼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고 한다. 실제로 북한이 미국과의 본격접촉을 시작한 때도 80년대 초반이다.

 현재 북한에서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곳은 당 국제부와 정무원 외교부인데 대외정책 결정과정에 관한 한 정무원 외교부가 당 국제부의 장악 하에 있지는 않다고 한다. 이는 외교부장 金永南이 당서열 7위인 반면 국제부장 金容淳이 30위에 머물러 있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 망명한 북한외교관 高永煥씨에 따르면 외교부에 대한 金正日의 신임이 대단하다고 한다. 중국 사회과학원 李相文 부연구원은 “당과 정부가 정책 결정과 집행을 맡는 원칙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金正日이 직접 틀어쥐고 있다면 상황은 다르다”고 말했다. 외교ㆍ경제 분야를 담당하는 실무관료들은 주로 70년대 이후 왕성하게 활동하며 성장한 엘리트이다. 이들은 金부자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체계적 교육을 받아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어떤 학자는 이를 김정일식 정형적인 독재체제의 특징으로 평가했다. 즉 金日成이 국정을 운영할 때는 모든 분야에서 위원회 형식의 집단지도원리가 관철됐지만 김정일이 등장하면서 이런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국 내부에 3인 상무위원회를 따로 두어 정치국을 유명무실하게 한 것이라든지, 북한의 최고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에 지방관료를 대거 들여앉혀 그 지위를 격하시킨 것 등이 좋은 사례이다. 이를 강력한 지도자와 전문관료가 결합된 ‘북한식 개발독재 모형’으로 부를 수도 있다. 명칭이야 어떻든 북한이 체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대미ㆍ일 외교에 주력하고 있으며, 이는 김정일의 진두지휘 아래 충성심과 전문성을 겸비한 신세대 관료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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