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큼’ 샘의 밀 수출 변명
  • 길정우 (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 ()
  • 승인 199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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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對북한 무역 파동…‘이중정책’ 아닌 부서간 협의 부족 탓


 미국이 북한에 대하여 작년말까지 15만t 규모의 밀을 수출하였다는 보도는 핵무기개발과 관련하여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 오던 미국정부의 태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의혹을 갖게 했다. 과연 이 사안에 대해 한국정부가 미국정부의 통보를 받아 사전에 알고 있었는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문제삼는 것이 남북관계의 진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인가, 아니면 미국정부가 파장을 예상하고도 한국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인 대북정책으로 일을 추진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주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우선 우려되는 점은 미국의 대북한정책을 수립하고 수행하는 국무부 관리들이 이 사안이 갖는 의미에 대해 큰 뜻을 부여하지 않고 처리하였다는 것이다. 두번째 우려되는 점은 우리 정부가 사안의 진행 자체를 최근까지 알지도 못했거나, 사전에 통보 받고도 입장정리가 안된 까닭에 미국의 대북관계 진전상황에 대한 사태파악을 제대로 못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한국정부는 몰랐나, 알면서 그대로 두었나

 미국의 대북한 밀수출의 대강을 종합하면 이러하다. 1990년 12월 미국 뉴저지주 소재 곡물수출업체인 니코사가 북한과 12억달러 상당의 밀수출계약을 체결하고 제3국을 통해 1991년말까지 두차례에 걸쳐 15만t(1천만~2천만달러 상당)을 인도하였다. 북한측은 이에 대한 대금이 대부분을 달러대신 아연으로 지급했고, 니코사는 이를 제3국에서 처분하였다. 이같은 거래는 지난 4월14일 미국무부 정례브리핑에서 한국 기자의 질문을 통해 일반에게 알려졌다. 문제의 한국 기자는 워싱턴 주재 한국공관의 실무자로부터 이같은 사실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질문을 받은 터트와일러 국무부 대변인은 이 사안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소 의아한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무부 동아시아담당 대변인실은 뒤늦게 “비록 미국이 북한에 상당량의 밀을 수출하였다고 해도 미국내법상 하자가 없다는 판단하에 승인한 것이며, 특히 북한의 핵무기개발 계획을 둘러싼 미국의 강경한 입장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즉 핵무기개발 계획과 인도적 차원의 교역은 별개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던 것이다.

 신문지상을 통해 보도된 바를 종합해 보면, 한국정부는 1990년 12월 이 문제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통보를 받았으며 이 거래가 미국내 적법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까닭에 별도의 항의나 수출중단 요청이 필요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보도는 미정부가 대북수출을 극비리에 추진한 데 대하여 한국 정부는 유감의 뜻을 전달하였다고 엇갈리게 전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보도가 나오게 된 것은 서울과 워싱턴 한국공관이 미국정보를 엄청나게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기술할 수는 없으나 이같은 결과는 한국내 여론을 의식한 현지 공관의 과잉반응과, 현지에서 전개되는 정황에 대한 본부의 이해 부족에서 나온 일로써 비슷한 일이 과거에도 종종 있었다. 같은 문제를 둘러싼 한ㆍ미 양국 정부의 엇갈린 반응을 보면서, 한국정부는 미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역할하는가를 숙고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사건은 미국의 이중정책의 한 예라고 비판받았다. 미행정부의 정책수립과정을 한번 살펴보다. 미국은 북한을 교역금지 대상국가로 분류하여 북한으로부터의 수입을 금지하고 수출도 인도적 차원에서만 허용했다. 이 같은 방침은 1988년 한국정부가 ‘7ㆍ7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우방국과 북한 간의 비군사물자 교역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변했다. 같은 해 10월 미행정부의 대적성국 통상규제법이 완화됐고 이듬해인 89년 4월과 7월 두차례에 걸쳐 상무부와 재무부는 내부지침을 개정했다. 상무부가 개정한 새 수출관리법은 통제품목에 속하지 않는 품목의 수출은 미국내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되어있다. 밀은 통제품목에 들어있지 않으므로 밀 수출은 재무부가 관장하는 대적성국 통상규제법과 상충되지 않는다. 따라서 90년 9월 상무부가 밀수출을 승인하기 위해 재무부ㆍ국무부와 협의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밟아 결정한 사안이므로 담당 관리들이 안보문제와 연결지을 정도로 주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미행정부서들이 내부에서 서로 충분한 협의를 하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사안이 중요하며 미국 관리들의 관심을 끌자면 관련국의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해 9월 중순 ≪니혼 게이지 신문≫은 미국의 대북한 밀수출 기사를 보도하였다. 당시 한국정부는 미ㆍ북한 간의 계약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남북한 쌀 직교역에 대해 미행정부가 문제를 제기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북경제교류협력의 눈에 보이는 성과를 추구하던 정부이므로 자가당착적인 반응을 자제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북한정책 실무자와 긴밀해져야

 미행정부서 간의 갈등은 핵부기개발을 둘러싼 미국의 대북정책 결정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의 대북 핵정책은 동북아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인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 미사일 및 기술의 확산억제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개발 실상에 대해 완벽한 정보를 못가진 상황에서는 국제원자력기구에 의한 핵사찰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라크의 경우에서처럼 의혹은 계속 남게 될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개발 진전상황에 대한 미행정부 간의 인식의 차이점은 국무부의 솔로몬 동아ㆍ태담당 차관보, 게이츠 중앙정보국장, 월포비츠 국방부 차관보 등 고위관리들의 의회증언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또한 의회의 온건ㆍ강경파 의원들과 학계, 언론계 및 연구소의 보수ㆍ진보적 인사의 견해도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탈냉전시대에 재조정되고 있는 미국의 동북아정책과 관련,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전혀 새로운 전략환경속에서 추진되는 미국의 대북한 정책이 관련부서 간에 충분한 협의와 의견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편적으로 개진되고 있는 현실은 큰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남북관계 당사자인 한국정부의 우려와 이해관계에 둔감한 채로 미국의 대북한정책이 결정된다면 한ㆍ미 양국 정부가 상당기간 공토의 협상대상으로 삼아야 할 북한지도부에 일치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장애가 된다.

 미행정부의 대북한정책 수립과정에서 나타나는 실무자들의 둔감성을 보완해 주는 일은 우리 정부가 해야 할 몫이다. 주요 사안에 대한 우리 부서간 합의와 일관된 대북정책은 남북관계 진전 뿐 아니라 미국의 정책수립에 중요한 요소가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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