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영화홍수는 美 직배사 탓
  • 송 준 기자 ()
  • 승인 199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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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0여편 수입…할리우드영화 편식 탈피 기회



 할리우드영화가 판을 치는 국내 극장가에 프랑스영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퐁네프의 연인들> <그랑부루> <푸줏간 사람들> <눈과 불> <발몽>등 30여편에 달하는 프랑스영화들이 이미 개봉됐거나 여름 전 개봉을 벼르고 있다.

 아 가운데 10편 정도는 각기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성에서 인정받았거나 감독 및 배우의 이름값에 부응하는 것들이다. 이번 프랑스영화 바람이 단순한 물량공세만은 아님을 말해준다. <퐁네프의 연인들> <연인> <마틴 기어의 귀향>이 그 선두주자들이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은 숱한 화제를 뿌리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프랑스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1억9천만프랑ㆍ약 2백50억원)를 들여 완성하기까지 5년이 걸렸고, 그중 2년간 2만명이 달려들어 실제 센강과 같은 깊이와 크기로 운하를 파고 물을 끌어들인 다음 퐁네프다리와 똑같은 대리석 다리를 세우는 대 역사를 치렀다.

 <연인>은 프랑스의 대표적 여류작가 마그리트 뒤라스의 콩쿠르상 수상작을 장 자크아노 감독이 화면에 옮긴 사랑이야기이다. 장자크 아노 감독은 <불을 찾아서> <장미의 이름> <베어스>등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전체 필름의 3분의 1정도가 베드신인데다가, 여주인공 뒤라스 역을 맡은 제인 마치(17)가 촬영 당시 12세의 나이로 완벽한 性愛 연기를 해내 벌써부터 주목을 받았다.

 <마틴 기어의 귀향>은 1543년 프랑수아 1세 치하의 아르티가 지방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의 재판의 재판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현재 할리우드에서까지 성가를 높이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적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유의 연기를 바탕으로 14회 세자르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유럽영화제에서는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밖에도 소년과 돌고래의 우정과 성장을 그린 <그랑 부루>, ‘사이공 붉은 공주의 전설’을 형상화한 <인도차이나>,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침> <반 고흐> <눈과 불>등이 작품성과 재미에 있어 비교적 충실한 영화로 꼽힌다.

 일찍이 유례가 없는 프랑스 영화의 범람은 올해 초 호암아트홀에서 개봉된 <마농의 샘> 성공에 고무된 것인 듯하다. 지난해 후반 세상을 떠난 대배우 이브 몽탕의 회고 바람을 타기도 했지만, 남 프로방스 지방의 장엄한 풍광과 강렬한 색채를 바탕으로 프랑스영화의 서정적 체취를 마음껏 드러낸 작품이다. 이를 계기로 업자들은 “프랑스영화는 장사가 안된다.”는 이제까지의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현상을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하려면 할리우드영화의 한국 지배에 주목해야한다. 진ㄴ 88년 3월 UIP가 미국영화의 직배를 시작한 뒤로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콜롬비아’ ‘오라이온’등 다국적 미국회사들이 한국 영화시장에 상륙하여 할리우드 영화의 배급권을 거의 독점해버렸다. 한국 영화배급업자들이 수입할 만한 미국영화는 아예 씨가 말라버린 것이다.

 

‘최저보장금’ 건 ‘미니멈개런티’ 계약

 우리 수입업자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미니멈개런티’ 계약을 통해 직배회사와 손을 잡거나. 미국 이외의 곳에서 만든 영화를 물색하는 것이다. ‘미니멈개런티’란 직배회사가 들여온 영화를 국내 흥행업자가 ‘최저보장금’을 걸고 배급하는 계약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미니멈 개런티’ 계약은 제살깎아먹기이다. 결국 국내 영화수입업자는 제3세계의 영화나 홍콩영화, 또는 유럽의 영화들을 수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콩영화는 평소 저질문제가 제기돼 있던 차에, 국내업자들의 과열 수입경쟁으로 <황비홍 2>의 가격이 1백70만달러를 웃도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평소 홍콩영화 수입가격은 20~30만달러 정도이다). 이를 계기로 한때 국내업자들은 홍콩영화 수입 반대를 결의한 바 있다.

 제3세계의 영화는 작품수가 워낙 적어 정규 수입선으로 고려할 대상이 못된다. 결국 한국흥행업자들이 매달릴 곳은 유럽쪽인데, 프랑스가 그중 활발하게 영화를 만들어내는 편이다. 프랑스영화를 굳이 구분하자면 자연미와 서정성 예술성을 강조한 작품, 사실주의 표현주의에 입각한 영상미에 치중한 작품, 그리고 첩보ㆍ액션ㆍ코미디물 등 오락영화로 대별할 수 있다.

 <마농의 샘><발몽><마틴 기어의 귀향><세상의 모든 아침><반 고흐><피아니스트>등은 서정성을 살린 자연주의적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또 <퐁네프의 연인들><연인><인도차이나><눈과 불><그랑 부루><아틀란티스><푸줏간 사람들><깨어나는 파리>등은 현란한 영상미와 진지한 주제접근 등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영화’들이다.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팝콘과 스테이크><미용사의 남편><아빠는 멋쟁이><강아지를 타고 온 건달들><엘리베이터를 내려서 왼쪽으로>등 예술성과 작품성이 뒤처지는 것들을 제외하면 프랑스영화는 거개가 ‘누벨 이마주’의 영향을 받고 있다.

 ‘새 영상세대’ 또는 ‘神心像主義’로 불리는 누벨 이마주는 최근 레오스 카락스, 장 자크베네, 뤼크 베송,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 젊고 뛰어난 감독들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프랑스영화 기법의 새로운 사조이다. 이들은 현란한 색채 대비와 수준 높은 편집 기법 등을 통해 또다른 차원의 영상언어를 개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누벨 이마주는 ‘누벨 바그’에 대용한 신조어인 셈이다.

 누벨 바그란 ‘뉴 웨이브’, 즉 ‘새로운 물결’이란 뜻의 프랑스 말이다. 1950년대 중반 장 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퍼, 알랭 레네, 에릭 로메르 등 당시의 젊은 프랑스 감독들에 의해 주도된 누벨 바그는 기존의 전통적인 영상문법을 파괴하고 실험과 시도로 새로운 기법을 세워나간 이른바 영화혁명이었다. 누벨 바그가 영화의 총체적 변혁이자 그 사조였다면, 누벨 이마주는 단기 기법상의 작은 변화일 뿐, 영화예술 자체의 근본적 변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영화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누벨 바그든 누벨 이마주든 프랑스영화는 뚜렷한 개성과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우리 영화계는 산업으로서든 예술로서든 아직 이렇다할 철학도, 흥행방법론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직배사들이 프랑스영화 감상기회를 만들어주었다. 할리우드영화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관객들로서는 오랜 문화 편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영화제작사들도 프랑스영화의 해일을 맞아 이들의 영화적 상상력과 영상문법의 구조를 눈여겨보고, 한국영화 제작에 참고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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