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부활하고 있다.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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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 회고록 발간 등 연구 활발 "미래 공동체사회 버팀목 기대"



지난 4월29일 오후 3시, 尹奉吉 의사 의거 60주년기념사업회(회장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 안에 있는 윤의사 기념관에서 윤의사 동상 및 벽화 제막식을 가졌다. 식장에는 김영삼 대표, 박준규 국회 의장, 이강훈 광복회 회장 등 내외귀빈 5백여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아나키스트 이하 아나키)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아나키들은 며칠 전 발간된 정화암 회고록 《몸으로 쓴 근세사》(자유문고)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60년 전인 1932년 4월29일 아침, 중국 상해 홍구공원 이구에서는 남화한인청년연맹소속 아나키스트 白貞基와 鄭華岩이 비를 맞으며 중국인이 구해다 주기로한 천장절행사 출입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정기는 면밀하게 폭파계획을 짜왔다. 그러나 출입증은 오지 않았다. 이때 일본인 종군기자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지금 홍구공원이 수라장이 되었다"라고 소리쳤다. 임시정부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이 폭탄투척에 성공한 것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동상제막식과, 한국 아니키 제1세대에 속하는 정화암(1896~1981)의 회고록 발간은 지금 여기에서 선뜻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화암, 즉 한국아나키 운동사는 윤봉길과 임시정부의 역사에 견주어볼 때 '그늘'이고,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역사와 비교할 때도 음지인 것이다.

 

자주적 개인과 공동체를 동시에 추구

아니키즘이란 무엇인가. 아나키들은 누구인가라는질문이 새삼스러운 까닭은 그 이념과 투사들이 해방 이후 줄곧 주변부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은 화석인가, 아니면 대안의 이데올로기인가'라는 물음은 유효하다. 아나키즘이 항일투쟁과정에서 끊임없이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취약지구를 공격했다는 점에서 화석이 아니며, 아나키즘은 최근 '부활'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아나키들은 "정보화후기산업사회가 제시하는 미래사회가 아나키가 내다본 사회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아나키즘은 세계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상"이라고 梁熙錫씨(전 우석대 교수)는 말한다. 해방 직후 결성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이끌었던 양씨는 "그러데 다른 모든 사상보다 가장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면서 그 이유는 아나키즘이 테러리즘과 혼동되는 동시에 무정부주의로 '오역'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일본이 아나키즘을 폄하하기 위해 무정부주의로 번역한 것이다.

아나키가 저항하는 대상은 권력이다. 이때의 권력이란 "남을 복종시키기 위해 만든 힘"이다. 아나키즘이란 한마디로 이 권력에 반대하는 이념 및 그 운동이다. '민주사회연합' 기관지 <민주사회> 발행인 河?洛씨 (전 경북대 교수)는 "아나키는 무질서가 아니라 도리어 고도의 질서"라면서 아나키는 곧 自主人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사회는 구성원 서로의 자유의사와 합의에 따라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공동체(조합)이며, 국가는 이같은 자율사회의 자유연합이다.

프랑스혁명과 볼셰비키혁명 사이의 사상사적 혼란기에 고드윈슈틸너프루동바쿠닌 그리고 크로포트킨 등을 거치며 형성된 아나키즘은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나타냈다. 아나키는 '혼란된 설교자' '천진난만한 꿈의 옹호자' 혹은 테러리스트니힐리스트부르주아 급진주의자자유주의자 등으로 불렸다. 서구 아나키는 극단적 개인주의(슈티르너)상호주의(프루동) 집산주의(바쿠닌) 그리고 공동소유소비를 강조하는 아나르코 공동체(크로포트킨) 등 여러 갈래를 이루었다.

아나키즘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성신여대 方映俊 교수(교육학)에 따르면, 아나키즘이 신봉하는 정의관은 자연주의적 사회관자주적 개인공동체 지향권위에의 저항에서 비롯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니키는 통치기구를 혐오하고, 대의제 민주주의를 불신하며,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를 적대시 하는 등의 현실인식을 갖는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구체적 실천 방법의 결핍, 조직적 실천력의 미흡과 혁명주체의 갈등, 테러리즘에의 유혹" 같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조선혁명선언>과 일본의 '박열 사건'

일제강점기의 한국 지식인들은 중국과 일본 두 경로를 통해 아나키즘과 만나게 된다. 아나키즘과 첫 악수를 나눈 지식인은 又堂 李會榮과 丹齋 申采浩였다. 경술국치(1910)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두 민족주의자는,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가 현태를 설정하지 않고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우당은 1923년 "무정부주의라는 자유연합의 이상과 그 조직의 이론으로서 새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우당은 러시아 혁명 소식을 전해듣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회의를 느꼈다.

단재 또한 같은 시기에 민족주의에서 아니키즘으로 돌아섰다(82면 관련기사 참조). 단재의 아나키즘은 1923년 1월, 의열단의 요청으로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민족독립운동을 민족해방운동과 동일시했다. 단재는 당시 지식인들이 내세우던 문화운동이나 외교론 등을 일절 거부하면서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을 주창했다.

초기 한국 아니키 운동사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일본에서 확약했던 朴列이다. 중국의 한국아니키가 공산주의자를 비판하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던데 비해, 일본의 한국 아니키들은 일본의 노동사회주의 세력과 연계, 좌익 성향이 짙었다. 1921년 그는 일본의 한인 민족주의공산주의아나키 등을 규합, '흑도회'를 결성한다(당시 아나키 단테는 黑자를 애용했는데 흑색이 아나키의 상직색이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이를 기화로 일본 당국은 좌익과 아니키 체포에 열을 올렸다. 이때 박열도 그의 애인인 일본여성 金子文子와 함께 '누명'을 쓰고 검거된다. 이른바 '대역음모'였는데 이 사건은 일본과 한국을 뒤흔들었다.

《한국아나키즘운동사》는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이 아니키즘 혁명이론이고 박열사건은 그 실천적 측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단재의 선언과 박열사건은 아나키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해 평양숭실학교에서 황실무용론이 나왔고, 이어 서울 경기 대구 충주 등 각처에서 아나키들이 일어섰다. 문단에서는 아나키와 카프진영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82면 기사 참조). 1929년 양퍙에서 李弘根 催申龍 蔡殷國 등이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를 계획했으나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실패한다.

중국에서는 1924년 우당이을규이정규정화암 등이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동맹'을 결성하고, 1928년 이정규 등은 동남아 아나키들과 '남경동방연맹'을 창립한다. 1931년 우당백정기유자명정화암 등이 '남화한인연맹'을 일으켜,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펼친다. 1931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남화연맹은 두개의 전시공작대를 조직, 실전에 참가하고 포로구출 작전을 전개했다. 《한국아나키즘운동》는 이 때부터 40년대 초반까지를 아니키 전투기로 구분하고 있다.

아나키와 민족주의 진영의 항일투쟁이 본격화될 즈음, 1930년 白治 金佐鎭이 북만주에서 공산주의자인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국민문화연구소 李文昌 회장은 "김좌진은 신념적 아나키는 아니었지만,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방식이 아나키즘적인 요소를 많이 가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1932년 우당이 한중연합 항일운동을 조직하려고 만주로 향하던 중 대련 수상서원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그해 11월 고문치사 당하고, 아나키로 활동하던 단재가 1928년 대만 기륭항에서 일제에 체포되자 아나키의 투쟁은 주춤한다. 단재는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1936년 2월 옥사하고 만다.

이문창씨는 단재우당이을규이정규정화암 등 재중국 한국 아나키의 항일투쟁은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한 직접폭력혁명'이라는 대전제 아래 "일본의 권력 심장부를 파괴하고, 빼앗긴 자유와 모든 생명적 조건을 탈환하고, 자유연합적 새나라를 건설하는 수순을 지향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한국현대사는 아니키의 항일투쟁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성균관대 徐仲錫 교수(사학)는 "전체 항일운동과 해방정국에서 아나키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우당의 죽음과 단재 투옥 이후 아나키의 활동력이 떨어졌다"고 말한다.

815 이후 서울에 모인 아나키들은 柳林의 독립노농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아나키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구심점으로 하는 비정치적 아나키로 나뉜다. 그러나 정치를 통한 아나키즘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비정치적 성향을 띤 아나키들은 농촌공동체운동이나 환경(생명) 운동 등 '보이지 않는 사회운동'쪽으로 옮아 갔다. 전체 사회 운동 차원에서 볼 때 아나키즘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학계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올해 초 국민문화연구소가 주도한 '자유사회운동 연구모임'은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펼칠 계획이어서 주목된다.

아나키즘의 역사는 그 성공한 모습을 모여주지 못했다. 아나키즘은 아직도 실패의 역사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실패는 기존 체제나 이념에 많은 상상력과 충격을 던져왔다. 아나키즘적인 사유틀이 많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환경운동가 황빈씨는 "독일녹색당의 주류가 아나키"라면서 "자연은 누구의 독점일 수 없다는 아나키즘의 자연관이 환경운동에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나키즘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시인 송재학씨도 "정치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지나가고 공동체 시대가 온다면, 아나키즘의 원리가 사회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경기도 장흥군 일영면 신세계공원 묘지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아나키 묘역이 있다. 얼마 전까지 그 묘역에는 이런 묘비명이 새겨진 碑가 세워져 있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정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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