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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정책 실세'시대

저마다 목청 높여 정책 표류…군사정권의 '정치 실세'사라져

서명숙 기자 ㅣ 승인 1993.07.08(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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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泳三 정권의 실세는 누구인가. 언론은 새 정부 출범 이후 이 화두를 붙들고 끊임없이 씨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광복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권력의 흐름과 그 속성을 명확히 읽으려면 '실세 탐색'만큼 유효한 접근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권 역시 귀를 쫑긋 세우고 실세가 등장할 방향을 향해 민감하게 촉수를 내밀고 있다.

 집요한 탐색전을 거치면서 그동안 언론과 정치권이 실세로 꼽아온 인물 목록도 길고 다양하다. 朴實用 비서실장, 金德龍 정무제1장관, 金正男 교육문화수석, 朴在潤 경제수석, 崔炯佑 전 민자당 사무총장, 金英秀 민정수석, 金 悳 안기부장은 모두 한번쯤 실세라는 수식어를 선사받았다. 실세를 파악하려는 언론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뚜렷한 거물급 실세가 잡히지 않다 보니 '중간 실세''실무 실세'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실세 탐색'은 신기루 쫓는 작업
 그런데도 실세를 추적하는 언론의 탐색은 현재까지 별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실세하면 으레 '정치 실세'를 연상하는 과거의 잣대로 현상을 파악하려 들지만, 막강한 정치실세는 이미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정치 실세에 대한 개념 규정은 상황과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소 달라진다. 그러나 공통 부분만을 추출해 보면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받으며, 비록 권력 공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의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집약된다.

 정치 실세의 구체적인 사례로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李起鵬 부통령, 박정희 대통령 초기의 金鍾泌 공화당 의장과 李厚洛 청와대 비서실장, 김의장이 물러난 뒤에 돈과 권력 사이의 비선을 조정했던 'SK'金成坤 공화당 재정위원장, 박정희 대통령 후기의 朴鍾圭․車智澈 경호실장이 꼽힌다. 실세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5공 全斗煥 정권에서는 초기의 3許씨와 張世東 안기부장이, 盧泰愚 정권 아래서는 친인척인 朴哲彦 정무장관이 그 이름에 걸맞는 전천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지목된다. 金東成 교수(중앙대․정치학)는 실세란 군사 정권의 속성에서 파생돼 나온 서술적 개념이라고 전제하고 "국민적 지지와 정통성 없이 출발한 군사 정권은 소수에 의한 군사적 과두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정치 실세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 관측통과 정치학자들은 김영삼 정권에서는 과거 군사 정권에서와 같은 정치 실세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은 출현하기 어려우리라고 전망한다. 金光雄 서울대 행정대학원장은 "정통성을 지닌 문민 정부에서는 내부에서 또 다른 정치 실세를 인정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졌다"면서, 과거 정권과의 성격 차이를 기장 큰 요인으로 지적한다.

 이런 구조적 요인 외에 김영삼 대통령 특유의 정치 형태도 정치 실세를 허용하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청와대의 한 측근 인사는 "김대통령은 정치 9단이다.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며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대통령선거 기간에 김대통령의 자문에 응했던 한 정치학 교수는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한국정치와 관련해서는 절대적으로 자기의 판단이 옳다는, 일종의 신앙 같은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라고 술회한다. 실제로 김대통령과 金大中 씨는 야당 시절 측근 정치를 펴면서도 제2인자는 용납하지 않는 정치 행태를 보여왔다.

 정치 실세의 등장을 현실적으로 가로막는 또 다른 요인도 있다. 차가운 사정 바람 앞에서 인맥을 형성하거나 정치 자금을 모을 수 없다는 현실적으로 정치에 필요한 돈을 어느정도 독자적으로 마련하면서 자기 인맥을 형성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사정 정국 아래서는 누구도 감히 그런 일을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요즈음 행정부와 정치권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기묘한 양상 가운데 하나가 '사람 추천을 꺼리며 저마다 몸을 사리는 풍토'다. 한 행정부 관리는 "누구도 감히 사람을 추천하려 들지 않는다. 잘못하다가는 인맥을 심는다는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털어놓는다.

 정치권에서 가장 자주 실세로 거론되는 金德龍 정무제1장관도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김대중씨가 부러워했던 YS 주변의 몇 안되는 '전략적 사고형 참모'로 꼽히는 김장관에 대한 김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통령은 대통령선거 기간에 만난 사람들에게 "김덕룡이가 감옥에 있으면서도, 감옥에서 죽어도 좋으니 자기의 석방을 놓고 협상하지 말라고 말했다. 대단하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할 정도였다. 최고 권력자의 신임이라는 측면에서 실세의 요검을 갖춘 셈이다. 게다가 김장관은 행정부와 당, 청와대를 잇는 정무장관으로서 정부의 거의 모든 회의에 참석한다.

김덕룡 장관, 공식회의 1주 15차례 참석
 그가 참석하는 공식 회의만 1주일에 15차례에 이르고, 또 직책상 야당 지도자와 재야쪽과도 활발히 접촉한다. 행정부 내에 DR(김덕룡)를 중심으로 한 인맥이 형성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가 하면, 재야 인사의 제도권 진입을 '김덕룡 사단 형성'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현정권에서 정치 실세에 가장 가까운 김장관마저도 과거와 같은 의미의 정치 실세로 재단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우선 정무제1장관실의 판공비마저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되는 현실이 김장관의 독자 행보를 제약하는 요소다. 뿐만 아니라 김장관은 대통령의 신임 속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 보고가 올라가는 등 일정한 견제를 받는다는 후문이다.

 이에 따라 '실세는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청와대의 한 고위 비서관은 "현정권 안에서 김대통령 외에는 그 어떤 실세도 없다. 실세를 쫓는 일은 기존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언론과 정치권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기루를 쫓는 작업에 불과하다"라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실세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속단은 성급하다. 막강한 소수의 정치 실세 대신 그 자리를 다수의 '정책 실세'들이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정책 실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張基榮․金鶴烈․南悳佑 부총리는 경제개발론이 지배하던 시대에, 전두환 정권에서 金在益 경제수석은 물가안정이 지상과제였던 시기에 무한대의 정책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가 하면 유신때 枊赫仁 청와대 정무수석은 시대의 특성상 또 다른 정책 실세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극히 소수의 정책 실세가 다른 유관 부처를 한꺼번에 장악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안의 정책 실세들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많으며 저마다 자신의 정책관련 분야에서 제 목소리를 낸다. 그동안 언론에 의해 몽뚱그려서 실세라고 거론돼온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나 장관들은 사실상 정책실세라는 게 정치학자들의 지적이다.

 金炳局 교수(고려대․정치학)는, 김대통령이 5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방법은 첫째가 사정과 부정부패 추방이고 둘째가 정책 개혁이라고 전제하고 "경제 활성화가 당면한 가장 큰 정책 목표지만 고도화한 산업 사회에서는 다양한 정책 과제와 부딪힐 수밖에 없다. 정책 실세가 여러 측면에서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 밖에서도 정책 영역이 고도로 세분화한 90년대 한국 사회의 관료적 전문성, 부처 이기주의, 부처 영향력을 최대한 확대하고자 하는 관료조직의 속성도 정책 실세의 다원화를 낳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정책 실세는 일반적으로 부처 장의 개인적 영향력, 정치적 상황, 최고 경정권자의 대통령의 의중에 설정된 정책 방향과 정책 우선순위 등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현재 김영삼 정부 안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사정 국면이라는 정치 상황으로 말미암아 영향력을 갖게 된 정책 실세로는 金榮秀 민정수석과 李會昌 감사원장이 꼽힌다. 특히 이감사원장은 감사원을 사장시켰던 과거 정권과 달리 김대통령이 출범 초기부터 감사원을 주요 사정 창구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데다, 감사원장 자신이 '성역 없는 감사'원칙을 철저히 고수하기 때문에 정책 실세로서 영향력을 갖게 된 경우다.

 이밖에도 박재윤 수석은 형정권이 가장 크게 정책적으로 비중을 두는 신경제정책의 입안자로서 정책 실세로 손꼽힌다. 박수석은 신경제정책으로 대통령을 사로잡긴 했지만, 지나친 조급증과 독주로 부총리와 상공․재무 등 관련 부서의 장관을 '사무관급 장관''주사급 장관'으로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또 경제 활성화에 비중을 둔 나머지 새정부의 전반적인 개혁 성향과는 동떨어진 '경제 정책의 보수화 경향'을 유도한 장본이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정책 실세들의 정부내 영향력과 비중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다. 김대통령으로부터 '순발력과 정치 감각'을 높이 인정받아 통일원 수장으로 등장한 한완상 부총리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초 한부총리는 남북 정상회담 등 '매우 놀란 만한 남북관계의 진전과 통일 문제에 대한 전향적 접근'이라는 진보적 대북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런 접근은 정권 출범 직후 '이인모 노인 송환'을 거치면서 성공적으로 출발하는 듯했다. 그러나 송환 이튿날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상황은 돌변했다. 한부총리의 '감성적 접근방식'이 관련 부처의 비판에 직면함으로써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김대통령은 대북 정책에서 다소 보수적이고 신중한 접근을 강조해 온 통일문제 전문가 김 덕 안기부장의 '북한 동향 보고'를 경청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 김대통령이 '안보를 결코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과거에 비해 강도 높은 안보관을 피력한 것도 김안기부장의 정책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후문이다.

 정치 실세를 대신한 정책 실세의 다원화 현상에도 심각한 문제는 있다. 우선 정책 실세들 간에 극심한 견해차가 노정되면서 정책표류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무노동 부분임금'을 둘러싼 경제팀과 이인제 노동부장관과의 심각한 견해차는 아직도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황인성 총리는 "당분간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고 당부한 데 이어, 청와대는 "이 문제가 청와대 개입 없이 당과 행정부 차원에서 해결되기 바란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해결할 수 없으므로 덮어두는'격이다.

 정책 표류 현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북정책을 둘러싼 통일원․외무부와 청와대․안기부의 내부적인 의견차를 틈타 미국은 북한핵 문제 해결에 관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쟁기념관 건립 백지화와 재강행 과정, 약사법 개정 관정에서 보인 행정 난맥상은 국민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안겨다 주고 있다.

"대통령의 마지막 판단력 아쉽다"
 민주당 李海瓚 의원은 정책이 표류하는 원인을 "3당합당에 의해 탄생한 정권인 만큼 6공의 보수적 정책에 종사했던 대다수의 정책 관료에 일부 개혁 세력이 참여한 꼴이다. 하나의 흐름 안에서 각 부처가 일관적 정책을 내놓지 못한 채 정부의 정책이 개인적으로 목소리 큰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라고 진단한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한 정치학 교수는 "김대통령이 모든 정책 사안의 내용을 다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법과 제도적 개혁이라는 자신의 정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어떤 정책적 접근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판단해야 한다. 정책 판단은 정치력과 함께 통치력이 가장 큰 요소다"라며 김대통령의 '마지막 판단력'을 아쉬워한다.

 김대통령은 정치 영역에서는 자기 외의 실세를 배재하는 친위부대를 거느림으로써 명실 상부한 대통령으로서의 지도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책 영역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시켜 줄 일관성 있는 정책팀을 갖지 못한 채 보수와 개혁의 정책 실세들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은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커다란 도전과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徐明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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