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 후유증'교훈 흡수통일론 뒷걸음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3.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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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발표가 끝나고 토론장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토론자로 참석한 유명 신문사 논설위원 ㄱ씨가 마이크를 잡았다."통일방안을 놓고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솔직히 말해 저쪽(북한)을 무너뜨리고 흡수 통일하자는 것 아닙니까."

 두 해 전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통일 문제 학술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참석자 가운데 그의 말에 반론을 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ㄱ씨처럼'용감한'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흡수 통일이 최선의 통일 방안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독일이 통일될 무렵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한동안'비빔밥 통일과 흡수 통일'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후자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잡아 먹는'통일이라면 전자는 함께 뒤섞여 사는 통일을 뜻하는 말이다.

"북한 내부 사정에 선의의 무관심 필요"
 그 전까지만 해도 다소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흡수 통일론이 독일 통일을 계기로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언론은 앞을 다퉈'독일에서 배우자'를 외쳐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90년 4월20일 남북교류대책 합동보고회에서"통일원은 상주 직원을 독일에 파견하여 남북 통합이 실현될 때를 대비하라"며 구체적 관심을 보였다. 각 부처는 독일을 모델로 남북통합 대비전략을 서둘러 마련했고, 경제학자들은 그에 필요한 돈, 곧 통일 비용 계산에 열을 올렸다. 또 어느날 갑자기 북한에 급작스런 상황 변화가 생길 수 있으며, 그 상황이 흡수 통일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확산되면서, 안기부 ․ 통일원 등 몇몇 부처에서는'북한 급변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주한미군과 각국 대사관에서도'북한 급변시 자국민 후송대책'을 은밀히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일된 독일이 분단의 고통 못지않게 심각한 통일의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지식인들 사이에 신중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극동문제연구소 강인덕 소장은"정부와 민간 모두 냉정을 되찾고 있다. 흡수 통일은 모두를 불행과 좌절에 빠뜨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취임 1백일 기자회견에서"우리는 북한을 흡수할 의사도 그럴 필요도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라고 공언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정치학자는 이에 대해"독일을 교훈 삼아 감상주의라는 통일의 한 장애를 이제 막 넘어서고 있는 것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봉쇄나 개방 압력이 아니라 북한 스스로 추진하고 있는 생존 전략에 대한'선의의 무관심'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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