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 독립 바람에 옐친 진땀
  • 모스크바·김종일 통신원 ()
  • 승인 1993.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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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정부, 지방에 권력이양 제안…보수파 “연립분열 부채질” 공세

 “러시아가 또다시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러시아 부통령 알렉산더 루츠코이가 지방을 순회하며 연설한 내용 중의 한 대목이다. 그는 악화 일로인 보수 세력을 규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러시아 붕괴론을 들고 나왔는데, 이것이 불붙은 연방 ‘붕괴’사태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러시아 붕괴론은 최근 옐친 대통령이 ‘신 연방헌법안’ 통과를 목표로 중앙 권력을 대폭 지방 정부에 이양하겠다고 제안하며 지방 정부 수뇌부와 연쇄 접촉하면서 표면화했다. 이미 7월1일 스베르들로프로스크주가 일방적으로 공화국을 선포했다. 또 8일에는 沿海州가 공화국을 선포한 데 이어 이를 확인하기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지난 5월에는 모스크바 동북부의 볼로그다주가 독립을 선언했고, 치타주와 칼리닌그라드 지역 역시 공화국 선언을 준비중이다.

 옐친은 지방의 숨은 실력자들의 도움 없이는 신 헌법안을 통과시키기 불가능한 실정이지만 이 또한 옐친의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츠코이 부통령은 최근 극동 지역을 순회하는 자리에서 “서방의 사주로 러시아가 또다시 갈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며 ‘타도 옐친’을 외고 있다. 보수파의 공세 속에서 옐친은 지방 정부에 권력을 내놓지 않고서는 신헌법안에 대한 지방정부 수뇌부의 동조를 받기가 그만큼 힘든 상황이다. 튜멘 지역 최고 행정담당자인 레오니드 로케츠키씨는 최근 RIA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신헌법에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만족할 만한 대가가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지방 정부 경제난에 허덕
 이에 비해 튜멘과 인접한 예카테린부르크자치주(옐친 출신지)는 멀지않아 우랄공화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선언해 옐친이 진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기자 출신인 아나톨리 스탄케비치씨는 “현재 예카테린부르크는 다른 지역의 거취를 관망하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야말로 네비치 지역의 한 고위관리는 “지역과 민족이 원한다면 러시아는 갈라질 필요성이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연방이 아직까지도 예산안조차 해결하지 못해 사실상 중앙과 지방 간의 상호보완 관계가 끝났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옐친을 제거하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독립 요구를 주장하고 있는 지역은 대부분 우랄 동쪽 지역으로 이른바 대국 기질을 가진 민족들이다. 특히 극동 지역은 가장 심하게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 자치주나 공화국이 독립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 중에는 경제 문제가 가장 크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교포 진금순씨(46·상점 판매원)는 3~4개월씩 월급이 밀렸다며 “그것도 중앙 정부가 허락해야 받을 수 있다”고 볼멘 소리를 해댔다. 물건 값이 폭등하고, 가스·석유 값도 치솟아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인데, 만일 천연자원을 중앙 정부의 허락없이 매각·처분할 수 있다면 살림살이가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야쿠츠크와 같은 시베리아 지역은 막대한 천연가스와 원목이 있으나 러시아 연방국 가운데 가장 열악한 경제 환경에 놓여 있으며, 핵 누출 사고 가능성까지 안고 있다. 그러나 중앙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면 한국·일본 등에 원자재를 수출해 경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한국과 일본에 가까운 하바로프스크 지역은 주민의 사고가 자본주의화해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캄차카 어선국에 근무하는 알렉세이 알렉세이비치씨(34·어업감독관)는 “만일 러시아가 무너지면 경제 형편이 좋아질지 모르지만, 국제 경쟁력과 국력이 약화해 선진국의 상품판매 시장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높다”라고 말했다. 분리 독립 요구가 받아들여질 경우 모든 것이 장밋빛처럼 멋진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다.

 세르게이 샤흐라이 제1민족문제 담당 부총리가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이유가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설사 분리독립이 되어도 민족 간에 얽히고 설킨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되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독립국연합(CIS)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히는 국경문제 또한 간단치 않다. 인구 측면에서 볼 때 부모 형제 혈육을 새롭게 갈라놓을 국경지도에 따라 이산가족 문제를 낳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분리 독립 자칫 ‘신냉전’ 부를 수도
 이에 대해 <투르드>의 한 정치부 기자는 “내란 가능성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종교문제까지 가세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라고 말했다.

 분리 독립이 구체화할 경우, 이것은 옐친 진영이나 보수 진영 모두에게 득이 될 게 없는 반역사적 사건으로 판명 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옐친 또한 쉽게 허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루츠코이 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한 기자는 “현재 계속되는 분리 독립 요구는 빠른 자본주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또 다른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공산 보수세력이 대단합할 기회를 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단지 분리 독립 요구 차원에서 문제가 끝을 맺는다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실패로 돌아갈 경우 세계는 또다시 신냉전시대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최근 사견임을 전제로 “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노력하여 독립 국가가 될 수는 없으며, 독립 국가를 꿈꾸는 지역들이 연합해 중앙과 투쟁할때에만 가능할 것이므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고 밝혔다.

 신헌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시점이 러시아 연방의 붕괴를 촉발할지는 알 수 없다. 또 현재의 분리 독립 요구가 올 가을 총선까지 이어질지도 궁금하다. 그렇다고 옐친의 입장에서 분리 독립 요구라는 ‘정치적 지뢰’ 언제까지나 방치할 수도 없다. 얼마전 보수파의 공격으로 위기에 몰렸던 옐친은 이번에는 옛소련 지도를 또 한번 바꿀지도 모를 분리 독립이라는 분규에 휘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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