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승소 불똥에 관료사회는 ‘쓴 맛’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3.08.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계, “현행 정책에도 강압·자의적 추진 잦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지난 5월15일 한국경영학회 경영자대상 시상식 기조연설에서 3년 전에 ‘정부의 강압에 못이겨 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과거 정부의 정통성 시비 때문에 기업이 모든 사회 문제를 덮어 썼다. 90년 5·8부동산 조처, 나 자신이 나가서 읽었지만 기업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삼성그룹에서 공장용지 사무용지 빼고 땅 산게 있느냐.”

 국제그룹의 해체는 초법적인 공권력 행사이므로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관·재계에 큰 파장을 몰아왔다. 이 판결은 5공 때의 부실 기업 정리를 들추어 내고 있으며 정부의 행정 행위라는 본질적 사안에도 영향을 미쳐 관료 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재계는 판결이 나온 직후 정부의 자의적 개입이 더이상 없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법에 근거하지 않은 초법적인 조처나, 집행과정에서 무리가 따랐던 정책을 철회하라고 요구할 기세다.

 재계는 먼저 5·8 부동산 조처를 심판대에 올려 놓았는데 이미 한 가지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7월30일 롯데그룹은 서울 잠실 제2 롯데월드 부지 관련 법인세 소송에서 서울 고등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얻어냄으로써 비업무용이란 굴레에서 벗어났다. 대법원 판결을 남겨두고 있으나 이 판정으로 국세청은 공신력을 적잖이 훼손당했다.

 5·8 조처는 ‘부동산 투기를 잡아야 한다’는 사회 여론에 부합됐으나 그 과정에는 무리가 없지 않았다. 재무부의 한 과장은 “충격적 요법인 것은 틀림없었다”고 말했다.

 관계 부처의 심한 견해 차를 이겨내고 상공자원부가 야심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 업종 전문화 정책도 이 논란에 휩싸일 공산이 크다. 법적 근거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관련 법률인 공업발전법도 꼭 맞는 것은 아니어서 정부가 공업발전법에 근거 규정을 넣어 개정하려고 검토하고 있기는 하다. 업종 전문화는 주력 기업에 대한 선정 기준과 지원 방안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재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업종 전문화 논란 일듯
 지난 6월5일 있었던 ‘항공산업 전문화 관계 간담회’는 정부의 개입이 몰고 올 파장을 읽게 한다. 이 간담회가 열리게 된 배경은 4월26일 방위산업 업무보고 때 김영삼 대통령이 “최종조립 업체 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 김성섭 획득개발국장은 “시장은 좁은데 여러 회사가 있는 게 좋은가. 한정된 물량에 시설·인력의 중복투자는 사회적 문제다. 정부가 지원해야 하는데 세군데는 너무 많다”라며 최종 조립 업체 수를 단일화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비쳤다.

 그러자 삼성항공을 뺀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한항공 심이택 부사장은 “정책 입안자들의 ‘투입(상황이해)’이 잘못돼 있다. 외국의 경우 회사를 합병하는 첫째 이유는 마케팅이다. 물리적 힘이 아닌 수익성·효율성을 따지는 이른바 적자생존이다”라고 주장했다. 석진철 대우중공업 사장도 “10년에 걸쳐 정착된 3사 체제를 일원화한다는 것이 과연 경쟁력을 위한 것인가. 3사의 역할 재조정 문제는 순서가 잘못되었다. 왜 이런 문제가 나오는지 의구심이 든다”라고 따졌다. 상공자원부 박삼규 제2차관보가 “전문화에 이견이 없는 줄 알았다. 방법이 문제다”라며 간담회를 끝냈지만 항공산업 재편 문제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해준 자리였다.

 재무부의 한 국장은 “어떤 수준에서 정책을 펴야 할지 혼란스럽다. 무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정부더러 왜 대책을 안내놓느냐, 책임을 지라고 하면서 정부를 매도한다”라고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한양 사건도 정부는 상업은행이 스스로 처리하기를 바랐으나 결국 여론의 압력에 이끌려 개입한 꼴이 됐다고 말했다.

“행정 고유 영역 있다” 반론도
 많은 관료가 ‘모든 정책은 법에 근거를 둬야 한다’는 재계의 요구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는 행정 행위의 본질을 모르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경제기획원의 한 과장은 행정 행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의 행정 행위는 기속 행위와 재량 행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기속 행위는 법에 근거해야 하지만 재량 행위는 정부의 상황 판단에 의해 조처할 수 있다. 물론 재량 행위에도 자유 재량과 법적 구속을 받는 기속 재량이 있다. 모든 행정 행위는 법 테두리에서 행사되어야 하지만 재량권을 부여한 것은 합법성 못지 않게 합목적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두부 자르듯이 해법을 찾을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부실기업 정리같이 통치권을 동원한 비상 조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해야 하고, 사유재산권 침해 같은 헌법 질서를 흔드는 개입도 물론 없어져야 하지만 행정 행위의 고유 영역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 행정 행위의 공정성은 합격점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정치 논리나 특정 이해집단의 로비 등으로 원칙이 무너지고 취지가 변질된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대우그룹의 한 관계자는 “기업에 영향을 주는 제도나 행정 규제는 정권교체와 무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일관성과 공정성이 깨졌다. 이는 기업으로 하여금 로비해야 한다는 유혹을 떨칠 수 없게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88년 12월 5공 청문회에서 “기업 경영에 있어서 정권교체기가 가장 어려운 때다”라고 밝힌 것과 맥이 닿는 말이다. 기업 사주는 경영 능력보다 최고통치권자에게 잘 보이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불행한 속설이 한국에는 엄연히 살아 있다.

 이런 권력의 풍향말고도 정부의 행정 행위가 끊임없이 시비에 휘말리는 요인은 행정 내부에도 도사리고 있다. 갖은 명목의 규제가 많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진입을 제한하는 권한과 각종 인·허가권이 있어 기업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정부에 줄을 대려 한다. 항공산업 개편을 위한 간담회에서도 두 업체가 크게 반발하는 속사정을 들어보면 정부가 한 업체의 로비를 받아 그 업체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행정부와 특정 기업의 연결 고리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규제를 대폭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빨리 풀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정당한 행정 행위를 위축시키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의 한 관계자는 “시장 기구라는 국민의 자율적 힘에 따라 굴러가는 경제 체제는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종종 이와 다르게 움직인다. 이런 ‘시장 실패’를 메워주는 역할이 정부의 몫이다”라고 지적했다.

 분명한 것은 정부의 개입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기획원의 한 국장은 “과거처럼 특정 기업에 대한 편파 지원은 안되고, 산업별로 배분하는 방식도 적합하지 않다. 정부의 지원은 한국 경제가 한단계 도약하기 위한 대규모 기술개발 같은 분야나 민간이 하기 어려운 분야에 국한해야 할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강철규 교수(서울시립대·경제학)는 정부의 개입 중에서 완화해야 할 것과 강화해야 할 것을 구분했다. “먼저 금융규제 등 많은 규제들을 과감히 풀거나 자율화해 개입을 축소해야 한다. 하지만 불공정 행위 등 시장 교란 행위에 대한 개입은 더 강화해야 한다.”
張榮熙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