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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속에는 ‘서울’이 없다

구한말부터 60년대까지…인심 각박해져 /일제·전쟁·‘잘 살아보세’로 우리 것 실종

이문재 기자 ㅣ | 승인 1993.08.26(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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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중의 상투, 고양이 뿔, 처녀의 뭣도 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서울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1백년이 지난 지금도 저 우스갯소리는 그대로 적용되지만, 찬찬히 둘러보고 또 들여다보면 서울에 없는 것이 딱 한가지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서울이다. 서울에 서울이 없다? 그렇다. 서울에 서울이 없는 것이다. 그 서울은 고지도나 《서울육백년사》와 같은 기록, 그리고 몇 안되는 서울 토박이의 희미한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민족 격변기와 함께 한 전차

 1394년 10월28일 조선 왕조와 도읍으로 정해진 이래 한양은 19세기 말, 그러니까 5백년 가까이 한양의 한양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해왔다. 그러나 일본 세력이 들어오자 서울, 아니 경성은 제국주의의 설계도에 의해 뜯어고쳐지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서울은 즉시 이름을 되찾았지만, 서울다움을 회복하기란 불가능했다. 얼마간 남아 있던 서울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거의 다 파괴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에는 재건의 깃발을 올려졌지만, 군사 정권이 수립된 뒤로 옛 것, 즉 우리 것은 단죄당하기 시작했다. 불도저와 시멘트의 전진이었던 근대화 프로젝트는 오래된 것의 청산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서울 사람들도 저 근대화의 문법을 따라야 했으니, 재건복·새마을복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경제성장률과 1인당 GNP 수치만 바라보며 달렸다.

 서울의 살림살이가 생존에서 생활의 차원으로 넘어선 직후라는 경제사회적 맥락이 없지 않겠지만, 최근 부쩍 눈길을 모으고 있는 서울 정도 6백년 기념사업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서울과 서울 사람의 동일성을 찾아보게 하는 것이어서 적지 않은 의의를 갖는다. 이같은 서울 찾기는 크게 보아 우리 것 찾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을 찾는 일은 만만치 않다. 멀리도 말고 1900년부터 1960년에 이르는 ‘서울 60년’의 흔적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 서울 60년에는 서울 6백년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 시기는 5백년을 지켜온 한양이 경성과 서울, 환도와 서울특별시에 이르는 근현대사의 격변기인 것인데, 우연인지 몰라도 서울 시내를 누비던 전차의 생애(1899~1968)와 일치한다. 21세기 바라보는 신세대의 아버지·할아버지 시대로 거슬러오르는 타임머신으로는 그래서 전차가 마땅해 보인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직후 서울의 풍경이란, 1893년에 세워진 명동성당과 배재·경신·이화·정신 등 신식 학교 건물, 그리고 서양의 공사관 건물 따위를 제외하면 옛모습 그대로였다. 1904년 개통된 경부선 열차의 첫 승객으로 서울 땅을 밟을 스웨덴 신문기자 아손 크렙스트의 눈에 비친 서울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서울은 갈색 동산들과 검고 거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들에 둘러싸여 마치 거대한 독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크렙스트보다 2년 뒤에 서울을 찾은 미국 사진작가 버튼 홈즈의 눈에는 교회 건물이 서울 풍경을 해치는 것으로 보였다. 교회 건물은 ‘외국인들의 몰상식한 부산물로 서울 성벽 아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을 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서울의 전차는 고요히 잠자고 있는 동방의 섬 서울에 들어와 철의 거미집을 짓는 거미로 여겨졌다.

나라 넘어가면서 우리 것 잃기 시작

 교회와 전기가 들어왔는데도 서울은 아직 조선이었다. 조선의 첫 궁이자 마지막 궁궐이 된 경복궁은 날로 쇠락해 갔지만 광화문 앞 육조와 운동가(종로 네거리)는 북적댔고, 청계천 빨래터에는 아낙들의 수다가 넘쳤다.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면서부터 한양, 아니 경성은 신열을 앓기 시작했다. ‘다리건너면 고개, 고개 넘으면 다리’였던 서울 장안은 총독부에 의해 절개되고 잘려나갔다. 광화문을 헐고, 거기에 경복궁을 가로막는 웅장한 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이에 비하면 현재의 광화문 네거리에 불룩 솟아있던 황토현을 깎거나 길을 내는 사업들은 작은 일인지도 몰랐다. 제국주의를 경영하기 위한 기관들도 속속 중심가에 들어섰다.

 서울 사대문 안은 크게 청계천 혹은 종로를 경계로 우대(북촌)와 아래대(남촌)로 나뉘고, 직업별로 또 세분되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종묘와 사직이 이루는 삼각형 일대를 일컫는 북촌은 중인들의 거주지였는데, 관직에 따라 낙향하거나 상경하던 벼슬아치와는 달리 이들은 누대에 걸쳐 이곳에 살았다. 신분으로는 양반에 눌리지만, 지식이나 재산으로는 결코 뒤지지 않았고 그만큼 콧대도 높았다.

 남산 북쪽 기슭이었던 남촌은, 궁핍하지만 절개와 자존심을 칼날같이 세우고 살던 선비들의 동네였다. 남산골 샌님, 혹은 딸각발이라는 별칭에 그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바, 당시 권력을 잡고 자신들의 부와 세력을 과시하던 노론이 아니라 야당격인 소론의 마을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청빈과 지조가 강조되었다. 샌님이란 현실적인 능력이 없는 책상물림이란 뜻이고, 딸각발이란 비오는 날 신는 나막신 할 켤레로 몇 계절을 ‘딸각 소리를 내며 난다’고 하는 뜻으로 가난함의 상징이다.

 현재의 동숭동 뒷산인 낙산 자락에는 천민 기능인들인 백정들이 살았고, 동대문운동장 일대에는 대장간이 즐비했다. 성문 밖 마포·왕십리·세검정 같은 데가 각각 새우젓 미나리깡 능금 따위로 유명했다는 옛 이야기는 이제 제법 알려져 있다.

순하고 부드럽던 말씨와 음식 사라져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은 말씨며 음식, 세시풍속이 그런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청계천 일대 서민은 돈을 ‘둔’ 잘못했다를 ‘잘뭇했다’라고 발음했고, 멀건 장국에 말아먹던 국수며 곰국 장김치 나비아니(불고기) 신선로 설렁탕 추탕 같은 음식맛은 여전했다(64쪽 ‘서울토박이 문화’ 참조).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일본과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서울 인구는 24년 30만을 넘고 35년 35만에 이르렀다. 일제가 권유한 국민복을 입고 카페나 다방, 기생집을 드나들었지만 서울 사람들의 인심은 아직 질박했다.

 36년 서울 시계가 영등포와 노량진으로 넓어지면서, 서울 인구는 73만명에 달했는데(이 중 10만이 일본인이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서울의 물 사정은 급격히 나빠졌다. 청계천 빨래터가 삼청동으로 옮겨갔고, 무엇보다 마실 물이 태부족이었다. 이 때 등장한 이들이 북청 물장수였으니, 아내와 어린 것들은 북청 고향에 두고, 아버지와 학생인 아들만 올라와 공동수도 공급권을 장악했다. 이들의 생활력과 교육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북청 물장수와 더불어 인력거꾼이나 마부, 매파이기도 했던 방물장수, 중국에서 들어온 호떡, 자전거에 목판 그득히 실어 배달하던 평양 냉면, 승강기와 그 안내양이 화제였던 화신백화점, 윤심덕의 노래, 단성사의 무성 영화, 동양 극장의 신파극, 전등과 남폿불, 이광수의 소설들, 일본과 친일파에 맞서던 기생들, 노인들이 오히려 순응했던 창씨개명, 조혼 풍습을 낳았던 징용과 정신대, 신사참배와 전시동원체제(이 때 반상회가 있었다)….

“서울은 서울 속에서 찾아야”

 3·1운동을 지나온 서울은 저렇게 8·15와 가까워지고 있었고, 전차는 그때에도 출발할 때는 한 번, 멈출 때는 두 번씩 경적을 울리며 느릿느릿 시내를 누볐다.

 8·15는 일제로부터는 해방이었지만, ‘자유 만세’를 외치던 민족에게는 혼돈의 출발이었다. 서울에서의 8·15 2주년 기념행사는 좌우익이 따라 가졌고, 나라는 미군정이 맡았다. 48년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곧 냉전체제가 불지른 전쟁에 휘말렸고, 휴전 이후 서울은 폐허 그 자체였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서울은 말투까지 거칠어지고 빨라졌다. 60년 4·19이후 서울은 한껏 들떠 있었지만 이듬해 5월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68년 11월 전차를 은퇴시킨 서울은, 숫자만으로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수많은 현대사의 기념일을 남기며, 세계 그 어느 도시보다 현대적인 변모를 거듭하면서 20세기의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서울 속에는 서울이 없다 하지만, 서울은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없다. 서울은 서울 속에 엄존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서울을 현단계에서 되찾지 못한다면 21세기의 서울, 미래 한국의 토대는 부실할 수밖에 없다. 옛 총독부 청사를 헐어내고 맞이하게 될 서울 정도 6백년이 뜻깊은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李文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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