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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세 김덕룡, 견제구 피해 외유?

한창 바쁜 때 파라과이行…새 역할 부여설, 세력 갈등설 나돌아

김재일 차장 ㅣ 승인 1993.08.26(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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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고 전격 발표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지난 12일 저녁. 마침 그때 대구와 춘천에서는 보궐 선거 개표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날 아침 김덕룡 정무1장관은 조용히 김포공항을 빠져나갔다. 파라과이 대통령 취임식에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12일간 외유길에 오른 것이다.

 날마다 각종 주요 회의에 참석하며 개혁정국에서 핵심 역을 맡고, 하루에도 수십명씩 사람을 만나느라 잠시도 짬을 낼 수 없을 만큼 바쁜 김장관이 왜 두 주일 가까이 자리를 비우는 것일까. 파라과이 대통령 취임식이 우리 입장에서 그토록 중요한 행사라고 보기 어렵고, 이런 경우 대개 정계를 은퇴한 원로나 직책 없는 측근이 참석하는 것이 통례다.

 더구나 패배로 끝난 대구 보궐 선거후의 정국 운영에 대한 대책과, 공직자 재산 공개에 따른 공직 사회의 긴장된 분위기 등으로 정치권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또 금융실명제 실시는 새 정부의 개혁 조처 중 가장 상징적이고 충격이 큰 경제 실험이어서 김영삼 정권의 안정과 직결된 모험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판국에 김장관이 짧지 않은 기간 자리를 뜬 데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김장관은 브라질을 거쳐 파라과이에 들어가 교민 간담회를 갖고 15일 카를로스 와스모시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그 다음날은 페루에 가 후지모리 대통령을 만난 후 교민간담회를 가졌다. 그뒤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일본에 도착하는 날은 21일. 2박3일 동안 도쿄에 머무르며 신정부와 자민당 소속 인사들을 두루 만날 계획이다. 하타 쓰토무 부종리, 야마하나 사다오 정채개혁 담당 장관과 고노 요헤이 자민당 총재, 모리 요시로 간사장 등과의 만남이 확정돼 있으나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와의 면담은 아직 유동적이다. 김장관으로서는 비공식 방문이므로 그쪽에서 만나자고 하면 만나겠다는 입장이다.

김대통령 아들 현철씨와 불화설도
 김장관의 폭넓은 일본 인사 접촉과 관련해 그의 외유 목적이 파라과이 대통령 취임식 참석보다는 한·일 외교 현안에 대한 양국 입장 조율에 더 큰 비중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에는 한·일간 외교와 경제 협력에 있어 항상 과거사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는 시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실적 외교 현안을 과거 문제와 분리해 한·일 관계를 국가와 국가간 본연의 외교, 경협 관계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은 김대통령의 ‘신외교’정책 노선을 연장시킨 한승주 외무부장관의 각론이다. 김대통령은 한장관의 구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마침 최근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도 ‘과거 문제를 매듭짓겠다’고 나섰다. 이에 따라 양국입장을 조율할 필요가 있었고, 김대통령이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최측근인 김장관에게 임무를 부여했다는 관측이다.

 최근 들어 우리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보다 적극적인 이유는 일본과 북한의 관계가 급진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핵문제와 관련한 대북한 협상에서 주도권을 미국에 빼앗긴 우리 정부로서는, 일본과 북한의 접근과 관련해 다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소외당할까 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 정부와 여권은 38년간 집권했던 자민당 외에 비공식 창구가 별로 없어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 데 따른 일본의 정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일부 관측통은 김장관의 일본 방문을 새로운 외교 창구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한·일경제협력위원회(회장 박용학)를 주축으로 한 정부와 재계 투자유치단이 9월초 일본 5대 도시를 방문하는 계획과 맥을 같이한다. 이 계획 역시 일본 재계 인맥을 개발함과 아울러 기존 창구를 조정하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김장관의 외유를 여권 핵심 세력내 권력 게임과 관련해 보는 시각도 있다. 몇몇 관측통은 김장관이 그동안 김대통령의 다른 측근들로부터 독주한다는 비난과 견제를 받아왔다고 말한다. 김대통령이 권력 갈등에 따른 잡음을 없애기 위해 김장관을 파라과이 대통령 취임 일정에 맞춰 당분간 밖으로 내보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김대통령을 둘러싼 세력이 김장관 지지파와 김장관 반대파로 나뉘어 있다고 주장한다. 김장관 지지파로는 한완상 통일원장관과 김정남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꼽힌다. 최형우 전 민자당 사무총장과 서석재 전 의원, 그리고 김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 등은 김장관의 행보에 대해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9월 정기국회 때 ‘대변신’ 할 것”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은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나 지금은 후자 편에 동조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원래 최 전총장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황명수 민자당 사무총장의 경우 명주·양양 보궐선거 패배에 따른 책임공방으로 김장관과 사이가 벌어졌으나 최근 관계가 호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핵심부는 황총장이 말 실수와 좌충우돌하는 행동으로 구설수에 자주 올라 경질을 구상한 적이 있으나 김장관이 황총장을 적극 지원해 현위치를 유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대통령 취임후 실세 중의 실세로 활발한 행보를 보였던 김장관은 수주 전부터 목소리를 낮추고 있다. 갑작스럽게 조심스러워진 그의 행보는 그 전과 비교해 눈에 띌 정도다. 이와 관련해 그가 여권 내에서 심한 견제를 받고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김대통령이 직접 김장관에게 사조직 활동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는 풍문도 있다. 김장관은 대통령선거 때 활약했던 중앙청년연합회 (중청) 조직을 지난 대구 동을 부궐선거에 활용하려 했으나 김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취소했다고 알려진다. 그 조직을 대구 선거에 활용했다면 ‘중청’을 유지할 정당성을 확보할 뻔했다.

 그가 견제를 받는 이유는, 김장관이 다음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모함’때문이다. 그가 자기 사람을 요소요소에 심을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사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김대통령 측근들의 눈에 거슬리고 있는 것이다. 민주계 맏형 격인 최형우 전 총장도 김장관의 이같은 행보를 달가워할 리 없다. 최 전총장은 “사조직은 용납될 수 없다. 누구든 사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도움이 안된다”라고 주장한다.

 정계 재편 문제와 관련해서도 최 전총장과 김장관의 입장이 다르다. 김장관은 정계 재편을 선호하는 반면 최 전총장은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최 전총장이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김윤환 이춘구 이한동 김종호 의원 등 민정계 중진들과 만난 목적은 김대통령의 개혁 작업을 돕기 위해 의견을 교환한 것말고도 정계 재편과 관련한 김장관의 구상을 견제하기 위한 몸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장관은 특히 현철씨와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장관은 다른 측근들과는 달리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비공식 실체를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간 불화설은 김대통령 취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김장관과 현철씨는 인사 문제 때문에 심적으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현철씨 유학설은 김장관 주위에서 의도적으로 흘렸다는 풍문이 있었다. 현철씨측은 유학을 고려한 적이 실제로 있었으나 이같은 보도가 나간 후 ‘밀려서는 안간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불화설과 관련한 또 한가지는 현철씨가 추천했다고 알려진 전병민 전 청와대 정책수석에 대한 해임 사건이다. 전씨는 청와대 수석비서관에 임명된 지 불과 3일 만에 그의 장인이 고하 송진우 선생 암살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해임됐다. 전씨측은 김장관과 가까운 관계인 한 고위 인사가 언론사에 그 정보를 제보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는 권영해 국방부장관의 거취와 관련해 김장관과 현철씨가 내심 다른 입장에 섰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현철씨는 김장관이 차기를 겨냥한 듯한 ‘과한’행보를 하는 데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

 최근 김장관측은 ‘견제받지 않는 유일한 실세’인 현철씨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고 서로 협조 관계를 유지해야 김장관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민정·공화계 뿐 아니라 민주계로부터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김장관에 대한 김대통령의 신임은 돈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아직 큰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 김대통령이 김장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음을 뜻한다. 여권 소식통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최근 의기소침해 있는 김장관을 불러 격려했다고 한다.

 김장관의 파라과이·일본 방문은 김대통령이 여권 내에서 견제를 당해 입지가 위축된 그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민정·공화계 다독거리기에 나서는 등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최 전총장과 균형을 맞추려는 김대통령의 배려라는 풀이도 있다. 따라서 그가 이 바쁜 시국에 외유에 나선 데는 한·일 양국 입장 조율이라는 임무와, 여권 핵심 세력간 갈등 때문이라는 시각이 함께 설득력을 가진다.

 김장관의 측근들은, 그가 지금은 한발 후퇴한 입장이나 9월에 열리는 정기국회에서 ‘대변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외교와 정치 관계법 개정 등 정책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리라는 것이다.
金在日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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