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금융혁명 ‘투명 사회’연다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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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 대변혁 예고…불안감 해소·세 부담 완화 ‘숙제’

기업체 과장인 ㄱ씨는 자기 땀에 대한 대가가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유리 지갑처럼 드러난 자신의 봉금에 가혹하리만치 세금이 매겨지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변호사·의사와 자산소득자들도 제대로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에 피해의식이 없어져 일할 맛이 난다. 금융기관 문턱이 낮아져 1천만원 정도 급전을 꾸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금융기관에서 자기를 ‘신용이 좋다’고 반겨주기 때문이다.

 기업인인 ㄴ씨는 비자금 등 이른바 ‘기업유지 비용’을 만들 필요가 없어져 기업 경영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이 기쁘다. 번 만큼 세금을 내 명목상의 부담은 늘었어도 뒷돈이 들어가지 않아 그의 손익계산서는 흑자다. 또 돈 흐름이 건전해져 신용만 튼튼하면 금융기관에 별다른 교섭을 하지않아도 돈을 구할 수 있어 조달 비용이 낮아졌다.

 ㄷ씨는 알아주는 부자지만 떳떳하다. 정당하게 세금을 내고 쌓아올린 그의 부는 사회적으로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외국처럼 한국에도 ‘淸富’의 개념이 자리잡았다.

현재까지 큰 동요 없어
 금융기관도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변칙과 편법 영업을 할 필요가 없다. 고객의 신용이 정확하게 포착돼 돈장사에 애로 요인도 사라졌다. 정부도 국민의 소득과 재산 상황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하고 있으므로 소망하던 공평 과세에 한발 다가섰다. 경제 상황이 비교적 투명해져 정책을 운용하기도 한결 쉬워졌다.

 금융실명제 정착이 보여줄 미래는 이처럼 건강하고 아름답다. 그 과실은 달다. 성장잠재력이 높아져 경제가 잘 돌아가고 비리나 부정부패가 눈에 띄게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명제라는 열매가 익는 기간에는 비바람이 몰아칠 것이고 때아닌 냉해가 덮칠 공산도 배제할 수 없다. 洪在馨 재무부 장관은 실명제 전격 실시를 발표한 직후인 13일 직원 조회에서 ‘앞으로 2~3개월이 고비’라고 밝혔다. 비실명 자산 소유자가 실명제에 순응하지 않고 반항하는 길을 택한다면, 그 강도가 높을수록 경제의 구석구석을 할퀴어 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의 추정에 따르면 비실명 금융자산은 최소한 8조원이며, 차명을 합치면 20조원이 된다. 한 증권사에서는 33조원이라는 분석 수치도 내놓고 있다.

 현재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8조원이 무차별적으로 제도금융권에서 빠져 나와 장롱예금 상태로 숨거나 부동산 등 실물투기로, 또는 해외로 도망친다. 증권 시장의 폭락을 면치 못하고 사채시장도 꽁꽁 얼어붙는다. 금융시장은 극도로 경색되고 중소기업은 연쇄도산 사태가 벌어진다. 실명으로 거래하던 사람들까지 불안해져 이 대열에 끼면 ‘금융 공황’이 온다.

 그러나 이 상황이 현실화할 공산은 극히 작다. 우선 예금 인출상태인데, 뚜껑이 열린 3~4일동안 은행 창구는 한산했다. 입금이 거의 없었지만 예금인출도 평소 수준을 크게 넘지 않았다. 아직 비실명 자신의 소유자들이 돈을 빼내 달아나려고 해도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순인출액이 3천만원 이상이면 국세청에 통보되므로 정체가 드러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한 시중 은행 지점장은 “워낙 꼼꼼하게 자금유출 경로를 차단해놓아 인출사태가 벌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내다봤다.

 돈을 교묘하게 빼냈다 해도 갈 길이 봉쇄돼 있다. 부동산 시장은 실명제 전에도 세금으로 그물망이 쳐져 있었다. 실명제 준비반은 ‘실명제의 성패는 부동산 시장으로 흐르는 검은 돈을 차단하는 데 달렸다’고 보고 한층 촘촘한 그물망을 쳤다. 부동산거래 허가지역을 확대하고 투기 대책반이 즉각 활동하는 등 입체적인 투기 봉쇄책이 가동중이다.

증시, 투자 유망 분야 떠올라
 해외로 달아날 여지도 바늘구멍이다. 1회 송금액이 3천달러이상, 연간 송금액이 1만달러 이상이면 당국의 감시망에 포착된다. 금융기관에서 원화를 외화로 바꾸는 것도 까다롭지만, 이를 반출하려는 시도도 통관 과정에서 걸려들 가능성이 극히 높다. 요행히 달아난다고 해도 국내 금리가 외국보다 높으므로 헛장사를 하는 것이다. 姜哲圭 교수(서울시립대·경제학)는 “돈은 수익률이 높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어서 기승을 떨 유인이 적다”라고 지적했다.

 서화나 골동품 금붙이 같은 실물 쪽의 투기도 가짜가 많이 위험하다. 장롱예금으로 빼돌리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이자 한푼 없이 돈을 썩혀야 하며, 몇십억 단위는 보관하기도 힘들다.

 실명제의 파괴력은 일단 증권시장에서 발휘됐다. 이틀 동안 종합주가지수가 59포인트나 떨어졌다. 위장분산 물량이나 차명계좌와 깡통(담보 부족) 직전의 신용계좌 물량이 쏟아진 탓이다. 그러나 이 반란은 3일째인 16일 폭등세로 반전됐다. 외국인 투자자가 대거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증시가 무조건 위축될 것이라는 예측은 맞지 않는다.

 실명제 시대의 한국 경제에서 돈이 갈 수 있는 유망한 분야는 증시인 게 확실하다. 우선 실명제 실시라는 해묵은 과제가 해결됐다. 주식양도차익 과세라는 메가톤급 악재도 김영삼 대통령 임기(98년 2월) 내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식은 은행 예금 보다 세금 부담이 적어 훨씬 수익률이 짭짤하다.

 정부는 검은 돈이 흐를 수 있는 대부분의 통로는 차단하면서도 증시는 열어놓았다. 쥐를 몰되 되돌아 덤빌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또 ‘당근’도 준비돼 있다. 홍장관은 14일 대통령에게 “눈이 다 내린 다음에 눈을 말끔히 쓸겠다”라고 보고했다. 증시부양책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8·12 조처로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반쪽’이다. 모든 금융자산 소득과 근로소득을 합산해 세금을 매기는 종합과세가 96년 이후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현재의 실명제 아래에서는 차명 계좌의 활동 영역이 존재한다. 가명 계좌는 실명으로 전환되며 서서히 조여드는 느낌을 받겠지만 아직은 불편할 뿐이다. 주식 양도차익 과세도 상당히 뒤에나 실시될 일이며 아예 빛을 못보게 되리라는 견해도 많다. 11명의 실명제 특공대가 대통령에게 건의했듯이 후유증만 크고 실효성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실명제는 ‘금융 거래의 완벽한 실명화’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격한 조처는 빠져 있다. 따라서 실명제가 일으킬 부작용은 상당히 부풀려져 있다. 하지만 최소한 2~3개월 동안은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은 이 후유증을 심하게 겪을 수 있다. 이른바 ‘화폐 퇴장’으로 제도금융권에서 돈이 고갈되거나 잘 돌지 않게 되면 금리가 뛸 뿐더러 당장 기업이 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다. 중소기업이 더 격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대기업들은 나름대로 실명제 이후의 상황을 준비해와 자금 사정이 괜찮다고 알려져 있다.

 중소기업은 사채 의존도가 높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조사에 의하면 운전자금의 23.5%를 사채에 의존하고 있다. 영세 기업일수록 의존도가 높아 19인 이하의 사업체는 41%에 달한다. 정부는 중소기업에 1조30억원을 긴급 방출하는 등 서둘러 파장 줄이기에 나섰다. 이 돈이 어려운 중소기업에 잘 수혈된다면 큰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겠지만 그동안 피돌기가 제대로 안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제때 공급이 안될 우려는 남아 있다.

 정부는 금융실명제 중앙대책위원회(위원장 白源九 재무부차관)를 통제탑으로 해 각 부처에 대책반을 만들고 한국은행과 33개 금융기관이 참여한 금융시장 안정 비상대책반(반장 申復泳 한국은행 부총재)을 가동해 물샐틈없는 방어에 나섰다. 특히 증시안정과 중소기업 자금난 완화를 목표로 행정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실명제 직후부터 터져 나온 대책들은 초강수여서 이 자체가 부작용을 부를 수도 있다. 가령 ‘통화관리를 신축적으로 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통화관리를 포기한 것으로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속의 물가불안)을 초래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정부가 서슴없이 ‘고단위 요법’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은 우선 실명제 안착 목표를 단기간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검은 돈이 교란행위 등으로 경제를 할퀴려 들면 한국 경제는 적잖은 상처를 입을 것이고 실명제는 실명제대로 허공에 떠 버린다.

“금융관행·문화 바꿀 대역사”
 경제 전문가들은 실명제를 성공시키기 위해 두가지 보완책을 주장했다. 세금 징구를 목적으로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비실명 자산에 대해 과거를 묻기로 했다. 인출 사태를 막고 탈세를 일삼았던 돈들을 그대로 사면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이는 정당한 처사이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국민들의 보편적 인식이 국세청 통보를 곧 자금출처 조사·세무 조사로 여긴다. 이는 불안감을 증폭시켜 외피하려는 욕구를 키운다’며 관용을 촉구했다.

 또 세무 전문가들은 실명제가 불러올 세금 부담을 완화할 후속조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명으로 모든 거래가 이루어지면 세원이 낱낱이 드러나므로 세금부담이 느는 계층이 생겨나게 된다. 정부는 94년부터 소득세와 법인세를 줄일 계획이다.

 실명제 성공의 관건은 돈을 금융저축으로 모는 일이다. 비실명 계좌를 실명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소 관용이 허용돼도 좋을 것이다. 근본적인 처방은 금리자율화로 금융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고 철저히 비밀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실명제 실시가 거론된 이후 최근에는 3월, 6월설이 떠돌면서 시중에 현금이 크게 늘어나는 부작용도 경험했다. 경제기획원의 한 과장은 “이미 부작용의 70%를 겪었다고 본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파장은 없을 것이다”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실제 이름으로 거래한다는 실명제의 단순한 취지는 최소한 한 세대에 걸쳐 거래·납세 풍토 등에 있어서 한국사회를 놀라우리만큼 변화시킬 것이 틀림없다. 특공대 11명 중의 한 사람인 재무부 동 陳棟洙 해외투자과장은 “실명제는 단순히 제도 하나를 정착시키는 게 아니라 금융관행과 문화를 바꾸는 대역사다”라고 지적했다.

 崔 洸 교수(한국외국어대·재정학)는 “나라를 잃은 처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듯 실명제도 실명시키지 않을 구국적 도력이 절실하다”라고 강조했다.
張榮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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